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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찾는 우리 문화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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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강우방 1993년 11월 141호
멀리 떠나면 가족이 생각나고 조국이 그리워진다. 늘 대하던 가족이 더 정겨워지고 언제나 다니던 조국의 산천이 다른 모습으로 가슴에 되살아난다. 이러한 경험은 누구나 겪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가족을 더 가까이 결합시키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를 더 공고히 단합시키며 더 나아가 조국의 산천 그리고 민족의 새로운 이미지를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 민족의 문화도 타국에서 절실하게 재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집트나 미국 등 외국에 다녀오면, 흔히 우리의 문화재나 산천이 왜 그리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한탄한다. 프랑스의 기메 박물관이나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에 다녀와서 왜 우리 나라의 박물관들은 그리 규모가 작고 전시된 유물도 우리 것밖에 없고 볼 것이 없냐고 실망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민족의 역사나 문화에 그처럼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왜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자기 민족이 남긴 문화유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일까.
그것도 우리 나라의 교육 과정에도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은 최근세에 들어서 관찰력이 부족해진 데서 비롯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리 나라의 미술은 19세기에 들어와서 그 수준이 급격히 떨어진다. 외국의 영향에서 탈피하고 주제를 우리의 산천이나 우리 나라 사람들로 삼는 19세기의 일반 회화나 불교 회화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되지만 아쉽게도 표현력의 기량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그것은 끈질긴 관찰력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불교 조각도 이미 18세기에는 획일화되어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미술적 가치가 거의 없어졌다. 나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보았다. 결국 자아 실현의 결여, 자기 민족 역사의 재해석 포기, 자기 민족의 산천에 대한 사랑의 결핍, 그리고 문화유산의 재발견과 보존에 대한 열의 상실 등 궁극적으로 그 모두가 관찰력의 부족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사물을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모르면 남도 이해할 수 없으며 자기 나라의 풍토나 민족에 대하여 애정을 지니지 않으면 다른 나라의 풍토나 민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도 어렵다. 그렇게 되면 자기 나라의 문화 본질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우리 나라의 모든 분야가 19세기에 쇠퇴하여 가는 동안 다른 몇몇 나라의 문화는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창조를 위하여 급격히 상승하였으므로 그런 나라들의 현란한 발전상에 눈이 어두워져서 우리 자신이 열등감에 빠지고 그 문화에 실망한 나머지 우리 나라 과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관찰력의 약화로 비교의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나는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나 역사의 부침이 있으며 따라서 문화의 성쇠가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19세기란 것은 우리 나라 역사 가운데 있었던 부침과 성쇠의 한 시기에 불과한 것이지 영원한 우리의 슬픈 자화상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참모습이라 생각하여 지금도 우리는 자기를 비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태어났고 그런 분위기에서 오래도록 방황하여 왔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에 대하여 처음에는 전혀 불감증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1975년 일본재단의 초청으로 일본 경도국립박물관에서 일 년 동안 동양 미술을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일본에는 중국과 한국의 문화재가 엄청나게 많아서 한, 중, 일의 미술을 비교 연수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나라였다. 아마도 세계에서 그렇게 좋은 여건을 갖춘 나라도 없을 것이다. 동양 여러 나라의 문화재도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여러 나라 미술의 연구자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구의 수준은 세계에서 으뜸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는 매우 행복하였다. 나는 온 힘을 기울여 중국과 일본의 조각품을 세밀히 관찰하였고 여러 사찰을 답사하였고 일본에 있는 우리 나라 미술품을 조사하였다. 그러는 사이에서 나라 미술의 독자적 특성에 점차 눈뜨기 시작하였다. 특성의 파악은 비교 연구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동안 눈에 뜨이지 않던 한국 미술의 독창성 성격이 점차 파악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내가 일본에 있던 그 당시 마침 ‘한국미술오천년’ 일본 순회전시회가 경도국립박물관에서 역사적인 막을 올리게 되었다. 해방 뒤 삼십 년 동안의 교섭의 단절 끝에 마침내 그 해빙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분관인 경주박물관의 연구원이었으므로 국립중앙박물관 주최의 그 특별전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유물 포장을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여러 유물들이 새로이 느껴지는 가운데 특히 충격을 준 것은 바로 조그만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이었다. 내 손으로 포장일 풀며 손안에 놓인 그 불상을 보면서 가슴에 고동이 맥박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나라 불상 가운데 현재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인 539년 고구려에서 만들어 진 연가명불延嘉銘佛을 손에 든 순간 총 높이가 16센티미터이며 불상의 높이는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조그만 것이지만 생명력에 가득 찬 양감量感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전에도 늘 보던 것이지만 그 날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이 나는 중국과 일본의 많은 금동불을 손으로 만져 보며 조사한 바 있었으므로 그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한눈에 잡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되 고구려 민족의 힘찬 기상에 의하여 전혀 다른 양식으로 이미 처음부터 변하여 있었다. 얼굴과 몸매가 갸름하나 두터운 법의는 힘찬 양감이 넘쳐흘렀으며 대좌의 연꽃잎도 한껏 부풀어올라 손으로 누르면 눌러질 것 같은 탄력이 있었다. 이 고구려 불상에서 느낀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불상에서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경도박물관에 서 있는 동안 우리 나라 미술을 재발견한 두 번째 경험을 겪었다. 어느 날 경도박물관 스튜디오에서 불상을 촬영하고 있는데 마침 큰 그림이 운반되어 촬영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서서히 오랫동안 펼쳐지면서 차차 넓고 높은 스튜디오를 꽉 채우면서 다 펼 져진 그림은 바로 일본 규우슈의 경신 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 시대의 수월관음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예기치 못한 우연한 만남이었다. 4미터가 넘는 높이의 이 대형 불화를 보았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있다. 그 크기에도 압도되었지만 탄력성이 있는 선과 치밀하고 정교한 채색에 감탄하였다. 투명한 사라를 통하여 미세한 부분까지 정성을 다하여 착색한 현란한 그림은 가까이 에서 보았을 때나 멀리서 보았을 때나 어느 구석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외국에서 본 첫 고려불화였다. 그러나 또 한번 놀란 것은 완벽한 보존 상태였다. 일본 사람들은 어느 나라 것을 막론하고 모든 나라의 미술품을 자기 나라 것과 똑같이 소중히 다루어 간직하였다.
나는 그 두 소중한 체험을 외국에서 겪었다. 그리고 그 체험은 우리 나라의 미술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지니게 하였고 내 눈이 뜨여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내가 다른 나라의 미술을 연구하지 않았으면 우리 미술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결코 파악하지 못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