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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난 고려대장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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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이윤수 1997년 11월 189호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를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나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어지 중에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의 정신은 ‘자비심’ 에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옮기지 못하는 백성들을 ‘여여삐(가엾이)’ 여긴 왕. 그 ‘어여삐’ 는 ‘크게 사랑(慧)하고 크게 가엾게(悲) 여기는’ 자비심으로부터 출발한다. 훈민정음은 글자 없는 생활 속에서 자신의 권리조차 찾지 못하는 백성을 위한 뜨거운 자비심 속에 탄생한 새글이었다.
훈민정음은 민들 때부터 한문을 받드는 유학자들과 마찰이 빚어졌다. 좀더 많은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글, ‘주체적인 우리글’ 이 되려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까, 그런 고민들이 치열하게 전개됐을 것이다. 모두 일백 여덟 글자 속에 담긴 정신도 그렇거니와 훈민정음의 창제와 함께 가장 먼저 행해진 작업은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말로 읽히고 전하는 창작과 번역 작업이었다.
한글 최초의 문학작품이라 할 「용비어천가」가 완성된다. 모두 백스물다섯 장의 악장체 영웅서사시, 조선왕조 성립의 당위성을 위해서 인연의 도리, 인과응보의 이치를 그 안에 담았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두해 뒤에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담은 ‘석가보’ 의 내용을 한글로 옮긴 석보상절은 아름다운 우리 문체가 돋보이는 서사문학의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같은해 석보상절을 읽은 세종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월인천강지곡」을 손수 짓는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함께 이루어진 일련의 작업들. 왜 부처님의 가르침부터 옮겼으며, 불교경전의 번역 작업은 왜 필요한 것이었을까?

유교 국가였지만 고려조의 불심은 서민들 사이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당대 백성들어 가장 신뢰하고 존중하는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더욱 많은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또 세종 역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는 조선왕조의 왕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신심 깊은 왕이었다. 신심 깊은 왕과 국가가 주도해 불경의 번역 사업을 펼치니 그것은 백성들 사어에서 관심 높게 읽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자적인 우리글의 창제,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말 작업을 통해 조심스럽게 실험되고 확인되었다. 사대부들이 외면하는 한글의 대중화 역시 부처님 가르침의 홍포와 함께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뒤로 역대 왕에 의해 선종영기집 언해, 금강경 언해, 목우자 수심결 언해를 비롯한 무수한 경전의 번역이 이루어진다. 고려대장경 경판 속에 잠들어 있던 글자들이 자주적인 우리글로 되살아나 낱낱이 백성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불사가 시작된 것이다.
근대사 속에서 불교 경전의 한글화 불사를 펼친 대표적인 분은 용성스님이다. 삼장역경회란 기구를 만들어 경전의 한글화 불사를 펼치는 일에 여력을 다했다. 1964년 오십 년 계획 아래 운허스님에 의해 동국역경원이 문을 연다. 고려대장경과 고려대장경에 입장되지 않은 삼장, 우리 고승의 저서를 망라해 번역한다는 빛나는 취지로 출범했다. 초기에 손쉬운 번역부터 행하다 보니 대장경의 함순서에 의한 번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95년도까지 경판의 오만삼천여 면이 번역됐으며 지금까지 번역된 고려대장경은 ‘한글대장경’ 이란 이름으로 모두 이백이십여 권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고려대장경에 포함돼 있지 않은 고승들의 작품집도 들어 있다.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장이던 70년대. 북한을 방문해 가장 먼저 선물로 전한 것이 우리말로 번역된 이 ‘팔만대장경’ 전집이었다. 작지만 이젠 정부의 지원도 있다. 앞으로 고려대장경은 보유판의 일부를 제하곤 내년까지 번역을 마칠 계획이다. 그 다음 해 봄, 고려대장경은 마침내 완결될 것이다. 우리말 우리글로 다시 태어나는 고려대장경이다.

우리글을 모르는 이들을 문맹이라 했다. 문맹을 없애기 위해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불경의 번역 작업이 선행됐다. 문맹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몽운동도 펼쳐졌다. 이제 문맹율은 낮은 수치로 뚝 떨어져 버렸다. 문맹이 사라진 세상에 컴맹이 등장한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첨단의 시대에 컴퓨터를 모르고서는 대화도 어렵다. 삶의 방식도 뒤바꿔 놓았다. 컴맹을 벗어나면 은행을 가지 않고도, 책방에 가지 않고도, 신문을 읽지 않고도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다 읽고,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첨단의 시대에 고려대장경도 새로운 모습을 나투고 있다. 고려대장경의 전산화 작업, 씨디롬의 출반, 고려대장경의 인터넷 작엽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다. 첨단의 시대에 고려대장경 보존을 위한 작업들도 새롭다.
경북대 박상진 교수 연구실에는 B5 용지만한 상자가 가득하다. 그 안에 고려대장경이 들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려대장경판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부스러기들이다. 상자 안에는 깎아 놓은 손톱만한 미세한 부스러기들이 정제돼 고유 번호를 단 채 작은 해판 안에 누워 있다. 그 하나하나가 고려대장경판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그 연구실도 장경각이란 느낌마저 들었다.
유리판을 광학 현미경 속에 넣어 컴퓨터 모니터로 관찰하면 고려시대 나무의 섬세한 세포 조직이 한눈에 드러난다. 엉키고 설킨 그 조직을 통해 나무의 종류를 분석해 내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려대장경에 사용된 나무는 산벚나무가 칠팔십 퍼센트를 차지한 것으로 밝혀져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익히 알려진 자작나무는 돌배나무 등과 함께 얼마 되지 않는 수치로 밝혀졌다. 벚나무를 바라보며 이젠 ‘왜놈의 나무’ 라고 생각지 않는다. 도리어 고려대장경의 판목이었다는 생각에 예사롭지 않은 정마저 느낀다. 사라진 칠백년 역사의 기록을 첨단과학이 되살려 놓은 것이다.
이태녕 박사(서울대 명예교수)의 조촐한 연구실, 그의 작은 컴퓨터는 또 하나의 장경각이다. 팔만천이백쉰여덟 경판 하나하나의 크기와 두께, 무게 그리고 훼손된 상태 등이 저마다 고유번호를 달고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키보드로 어느 경전 어느 대목을 누르면 그 경판의 현재 상태가 고스란히 등장한다. 장경각의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지, 해충에 의한 손상은 없는지, 비틀어지고 있는 것은 없는지 등의 항목만 무려 서른네 가지나 된다. 의료보험 카드 번호를 달고 병명과 증상, 지금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병원의 환자기록부와 다를 바 없다.
이같은 고려대장경 경판의 데이터 베이스 작업은 경판마다 새생명을 부여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경판이 처한조건과 상태에 맞게 처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천 년, 이천 년 후에에 보전될 고려대장경을 위한 첨단과학을 통한 보살핌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