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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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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문옥 1993년 11월 141호
얼마 전에 대입 준비로 짓눌려 있는 막내를 데리고 고향에 갔다. 그 곳의 자연, 푸르른 가을하늘과 누렇게 익어 가는 넓은 들녘들을 보면 대학입학 시험까지 남아 있는 두 달여 동안에 좀더 생기있게 공부할 수 있을뿐더러 스스로 생각하는 기회도 갖고 호연지기도 기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남도 나주군 다서면 운봉리 백동이라는 마을, 내가 태어나서 코 흘리고 놀며 자라난 곳이다. 마을 옆에 있는 용문저수지 길을 걸으면서 저수지와 우리 지에 얽힌 사연을 설명해주는 것으로부터 고향에서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저수지 수면에는 아침 안개가 무럭무럭 솟아 미풍에 흔들리고, 수면의 건너편 산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아름다웠다. 저수지에 낚싯대를 담그고 있는 강태공들의 한가로움이 부럽기까지 했다. 저수지 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농사를 짓던 논과 밭이 잠겨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그 밭에 목화와 콩 등 잡곡을 심고, 논에는 벼와 보리를 심어 정성껏 가꾸며 살았다. 저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마음속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한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작농으로 남은 논과 밭을 경작하다가 그 논밭이 저수지 밑으로 잠겼으니 하루아침에 밥숟가락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자작농토였다면 나라에서 보상금을 받는다지만 만의 논밭을 경작하는 소작농의 경우에는 단 한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백동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영산강을 건너 이사를 했다. 나는 저수지에 눈을 고정하고서 막내에게 우리 가족의 애환을 이야기했지만 막내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막내의 얼굴에는 입시의 중압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한 표정이 일기 시작했다.
그 뚝방은 내가 어려서 죽마를 타던 곳이어서 내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뚝방 안쪽으로 비스듬히 석축이 쌓여 있고 그 석축에는 이름 모르는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막내는 그 이끼가 신기한지 무슨 식물이냐고 물었다. 이끼는 공해에 약한 식물이기 때문에 서울 근교에서는 볼 수 없지만 공해가 없는 시골에 많이 자라는 식물이라는 정도의 설명으로 얼버무렸다. 막내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때 메뚜기가 풀밭에서 튀어나오고 주변 나즈막한 곳에 고추잠자리가 내려앉았다. 막내는 그 것을 잡으려 살금살금 발을 내딛었다. 잠자리를 찾아보기도 힘든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어린애처럼 고추잠자리를 쫓아다녔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를 잡은 막내는 어린애처럼 좋아하다가 다시 하늘 높이 그 잠자리를 날려보내고 있었다. 그 고추잠자리는 극도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듯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막내는 그 광경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대학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그 잠자리처럼 자유로워져서 대학 생활을 만끽해 보고 싶지 않았을까. 어쨌든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는 막내를 나는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용문저수지와 뚝방을 구경하고 백동마을로 들어갔다. 붉게 물든 감을 따는 집도 보였다. 아직은 감나무에 이파리가 남아 있어 벌겋게 물든 감들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파리 사이사이로 보이는 붉은 감이 입맛을 돋우었다. 고향을 지키는 친구의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마당가에 열려있는 단감과 무화과를 따서 먹으라고 주었다. 마을 앞에서 아버지의 들노래를 잊지 못하는 일흔이 넘은 노인을 만나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보면서 함께 걸었다. 아버지께서 농사 짓던 시루벰이논을 알려주기도 하고, 그 마을에서 들노래를 잘 부른다는 노인은 아버지가 부르던 들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들에서 모 심고 김매고 부르는 노래와 모를 끝내고 또는 김매기를 끝내고 마을로 들어오면서 부르는 농부들의 노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랴마는 구수한 노랫가락에 시골정취가 가득 담겨 있고 인정미가 넘치는 가사였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막내를 쓰다듬으면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절에 다니던 이야기와 어머니가 영산포 장날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준 공덕으로 나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막내에게 훈훈한 시골 인심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마을 뒤에 우뚝 솟은 백룡산은 파란 숲으로 덮여 있어 마을의 운치를 살려 주고, 수백년 수천년 동안 백동마을을 비롯하여 많은 인근 마을과 멀리 흐르는 영산강과 나주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잘생긴 산이다. 그런데 그 산도 개발의 몸살을 앓은 흔적이 뚜렷하였다. 산 중심부의 일부를 채석장으로 허가 받은 누군가에 의해서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 산의 상처는 수십리 밖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보기 흉하였다. 지금은 채석을 중단하였지만 그 상처가 아물려면 수백년이 지나야 할 것 같았다. 바위를 뚫어내던 곳이라 바위틈에서 식물이 자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이 아끼며 보존해야 할 좋은 미관과 환경이 돈 때문에 훼손되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인력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찾지 않는다면 그 산은 영원히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채석장도 미관 심사나 환경 평가를 한 뒤에 허가를 한다면 그 곳은 채석장 허가가 나지 않을 지역이었다. 목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쉽게 보이는 국도와 호남선로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명산이기 때문이다. 막내는 이러한 미관 훼손과 환경 훼손 상태를 어떻게 보았을까. 막내가 이 것을 보고 미관 보존과 환경 보존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아버지로서 희망을 가져 보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사 와서 성장하고 고등학교까지 다닌 나주면 왕곡면 송죽리 달골(月谷)에 갔다. 먼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묘소는 낯모를 충청도 풍수(지관)가 잡아준 터였다. 낯설은 사람을 반갑게 대접해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묘터를 잡아주고 간 지관 때문에 아버지는 묘터가 있는 그 산을 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그 곳으로 이장하였다. 그 지관은 낯설은 이곳에 와서 달명당을 찾는다고 한 달 가량 있다가 달명당은 찾지 못하고 친지처럼 반갑게 대해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묘터를 선물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묘정에 오동나무도 심고 조그마한 밭을 개간하여 대나무도 심으면서 지성으로 가꾸었다. 막내가 철이 든 뒤 처음으로 찾아간 묘정이었다. 막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듯한 그 대나무와 오동나무와 소나무들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힘 들여 가꾸어 놓은 흔적만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었다. 나는 막내에게 대학입학 시험 준비의 중압감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려고 하였다. 뜻밖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학 입시 준비로 인한 중압감보다는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나와 마주 대하는 데서 오는 중압감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직장에서 나온 뒤로 막내의 이러한 점을 예견하고 막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면 공원으로 나가든가 정처없이 산길을 걷든지 하며 외출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막내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내가 집에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한 듯 싶었다. 나는 막내에게 그 동안 지내온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막내는 나와 마주치면 자기의 실력이 미치지 않는 대학에 가라고 할까 보아 늘 걱정이 되었고 그런 중압감이 공부하는 데서 오는 중압감보다 컸다는 것이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막내를 불러 실력에 맞는 대학을 선택하도록 말하였다. 그 뒤부터 막내는 전보다 훨씬 명랑하고 생기가 난 것 같아 시골 고향에 갔다온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사람의 몸이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래서 피곤한 몸과 마음을 달랠 때에는 오염되지 않은 흙과 물이 있고 향긋한 바람과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그런 곳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