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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장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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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산책 - 최태선 1999년 01월 203호
불교의 장엄은 크게 탑塔, 당우堂宇, 불상佛像에 대한 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석존을 친견하고자 하는 열망에 따라 사리를 안치하고 예배하는 것이 불교의 주된 장엄의식이나, 탑과 당우의 경우는 축조과정에서 지신에게 공양되는 제례의식을 포함하기도 한다.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분되어야 하겠으나, 궁극적으로 불국토의 구현이라는 의미로 함축한다면 모두 통일한 불교의 장엄의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탑, 당우, 불상에 대한 장엄의식을 다음의 순서에 의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탑-축조과정에서의 장엄
탑-사리장엄
당우-축조과정에서의 장엄
불상-복장장엄

탑-축조과정에서의 장엄
탑의 어원은 인도의 불탑佛塔을 중국에서 음역하여 素覩波, 卒塔婆, 窣堵波 등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략하여 탑
파 또는 탑이라 한다.
탑의 기원은 석존께서 열반하신 뒤(B.C 486). 그 유해를 다비하고 마르타 족이 쿠시나가라에 탑을 세우고 공양하려 하자 주변의 여덟 부족이 사리를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였고, “도로나”라는 바리문의 중재로 사리가 분배되어 각지에 사리탑이 건립되었다. 바라문은 사리의 양量을 달 때 쓰던 병甁을 자기 고향으로 가지고 가서 병탑甁塔을 세웠고, 늦게 도착한 한 부족은 사리를 분배받지 못하여 다비 때 나온 재를 가지고 가 재탑을 세우므로 사리팔탑舍利八塔과 함께 모두 십탑十塔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때에 조성된 탑의 형식과 재료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인도의 산치대탑에서 그 모습을 추정하고 있다. 산치대탑은 먼저 평면원형의 기단을 설치하고, 위에 토만두형 분구를 쌓있다. 그 정상에 돌을 돌리고, 찰주를 세워 산傘을 배치한 형태이다. 산치대탑과 같은 외형은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나라마다 특징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었으나, 상륜부에는 이러한 산치대탑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탑 형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탑이 건립되는 의미와 건립 때 행해지는 의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탑의 의미는 기원에서 언급하였듯이 석존의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부도와 같은 의미이고, 석존에 대한 홈모와 친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사리가 들어온 것은 549년으로, 양무제가 신라 진흥왕에게 사리를 보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 뒤 자장이 선덕왕 12년(643)에 당에서 두골頭骨, 불아佛牙, 사리를 가져왔는데 사리는 3분하여 황룡사, 대화탑, 통도사계단通度寺戒壇에 안치하였다고 전한다.
사리를 봉안한 탑이 초기에는 가람의 중심이 되며,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초기의 대표적 가림인 황룡사지 , 미륵사지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탑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람은 대부분이 목탑으로 거대하게 조영되었던 것 같고, 미륵사지처럼 석재로써 목탑을 모방한 형태도 확인된다.
다음 호에 살펴볼 탑의 사리장엄 외에 고고학적 방법에 의해 기단을 조성하기 전부터 치러지는 지진地鎭과 진단鎭壇의 장엄이 있다. 지진장엄은 탑의 단을 구축하기 전에 주제자가 땅의 길흉을 지신地神에게 접치는 제사행위로 여러 공양물을 지주의 신께 바치는 의례이다. 진단장엄은 단을 구축한 뒤에 치러지는 장엄의식으로 진단은 금당의 수미단과같이 단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반 신도들이 공양하는 것이라는 데서 지진장엄과 다르다. 이러한 장엄행위는 고고학적 조사에서는 공양물이 흩뿌려지는 형태로만 확인되기 때문에 발굴조사 때 탑지가 교란되어 있다거나, 조사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혼적들이다. 탑지의 지진과 진단의례가 조사된 것으로는 황룡사 목탑지, 분황사지, 백제지역의 미록사지, 군수리사지 등 몇 가지 예가 보고되어 있다.
탑지의 지진장엄과 진단장엄은 황룡사의 예처럼, 심초석 아래에서 출토된 것을 단을 만들기 이전의 지진장엄의 결과물로(地鎭具), 심초석 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위치상에서 진단구鎭裡具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지진구나 진단구에 사용되는 유물들은 여러 형태의 옥류玉類, 용기류容器類, 도자刀子, 동경鋼鏡, 화폐貨帶 등의 금속류들로 매우 다양하다.
황룡사 목탑지에서 심초석心礎石 주위에 금, 은, 진주, 수정, 옥, 유리, 호박 둥 칠보와 함께 갖가지 장신구 들이 흩뿌려진 형태로 출토되었고, 심초석 아래에서는 중국 백자등이 놓여진 형태로 확인되었다. 분황사의 탑지에서는 각종 옥류 700여 점과 금제이식, 장신구, 화폐등 102점의 유물이 수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록사지의 경우도 황룡사지와 유사한 종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철기로 제작된 동물성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시기는 늦지만 인각사의 고려시대 석탑지에서는 탑의 남쪽과 북쪽에 대형 호가 매납되어 있는 것이 보고 된 바 있다. 탑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볼 때 장엄의식構式의 단계는 다르지만 매납되는 공양물들은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초기사원의 탑지에서 출토되는 지진 ·진단장엄의 유물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이들 지진 진단장엄의 유물들은 고대 삼국시대의 왕릉급 고분에 매납되는 부장유물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즉,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고분의 출토품도 엄격히 구분하면 축조 때 이루어지는 제사 의식용과 사자死者와 함께 매납되는 것으로 나눌 수 있으나 내용물의 종류는 거의 통일하다- 과 불교유적인 탑의 축조시에 공양되는 유물이 유사하다는 것은 초기 불교의 정착과정인지 장엄 또는 제사의례에 대한 동일한 표현인지는 풀어야 할 과제이다.
둘째, 미륵사지나 황룡사지 등에서 출토되는 철제, 토제의 동물상動物像에 대한 해석이다. 이러한 동물상은 이성산정 등 불교유적이 아닌 다른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데, 완전한 형태보다 목이나 다리가 절단된 형태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근래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이러한 것 들이 출토되는 유적은 제사유적蔡祝遺體으로 분류되고 있고, 동물장의 각 부위가 절단된 체 출토되는 것은 자연적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라 제사시 제물을 봉양한 형태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제사의식에 사용된 유물이 불교유적에서 함께 출토되는 것은 지진이나 지단의 장엄이 토속 신앙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셋째, 이러한 지진, 진단장엄의 유물들은 소규모 가람이나 후대로 갈수록 유물의 규모나 수량에 있어 현저하게 축소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 가람에 있어 국가왕실의 비호 속에서 건립되었던 성전가람(국가 사찰격)과 일반가람의 차이인지, 또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불교의례가 정착화 된 현상인지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