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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을 껴신고 다니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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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89년 11월 93호
지난 여름, 서울 대각사에 있으면서 어느 회사의 강연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홍보과장이라는 이가 승용차를 갖고 와서 같이 좀 가자기에 갑자기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해서 그냥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 홍보과장의 얘기가 가급적이면 ‘가난과 탐욕’이라는 주제를 갖고 법문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잘 신지 않던 하얀 고무신을 신고, 또한 49재 때 들어온 영가(靈駕)의 고무신 한 켤레를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회사의 사원들 중 불교신자들만 모였다고 하는데 백여명은 족히 될 듯 싶었다. 나는 가방에 넣었던 고무신 한 켤레를 껴신고 들어갔다. 좀 큰 신발을 골랐기에 곁에 껴신었지만 괜찮게 들어갔다. 그래 그 홍보과장인가 하는 이가 내 소개를 다하고 나서 나를 단상에 오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단상 앞에 올라서며 청법대중들 앞을 여유있게 거닐었다. 장삼과 가사가 여법한데 고무신 두 컬레를 껴신었더니 뭔가 안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대중들 대부분이 쿡쿡 대고 킥킥댔다. .그도 그럴 것이다. 원, 세상에 신발을 껴신다니. 우습지 않겠는가 말이다. 맨 앞줄에 앉은 한 여사원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웃음을 입가에 찔끔 흘리며 물어왔다.
“스님, 신발을 껴신으셨군요. 왜 그러셨어요?”
나는 아주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신발이 탑이 나서 안 되겠습디다. 두 켤레 모두 마음에 들길래 한 번 껴신었는데, 왜 어울린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들?”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쏟아져 니왔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신발 껴신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곤 한바탕 웃어들댔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신발을 만들어내는 양화점 주인(사장)이라도 두 켤레 이상을 껴신지는 않는다. 아무리 큰빌딩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동시에 그 큰 빌딩을 혼자서 사용하진 못한다. 아무리 음식을 잘해 놓는다해도 혼자서 호텔의 뷔페식당의 음식을 한꺼번에 다 먹어치울 수는 없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성심편(省心篇)’에 나오는 말처럼 아무리 큰 집이라 해도 여덟 자 방 하나면 잠자리로 족하고, 아무리 좋은 전답이 많다 해도 하루에 두 되의 식량이면 넉넉하다(大厦千間이라도 夜臥八尺이요 良田萬傾이라도 日食二升이니라).
가난이니 탐욕이니 하는 말은 결국은 재물의 많고 적음, 또는 마음의 조급함과 여유있음에 있으리라. 한자를 풀이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탐욕의 탐(貪)은 그 생각을 눈앞에 가로놓인〔今〕 재물〔貝〕에 두는 것이요, 가난하다는 빈(負)은 앞뒤 좌우〔八〕로 나누어진〔刀〕재물〔貝〕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의 이익에만 눈을 돌리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재물을 나누어, 또는 갖고 있는 재물이 별로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한다.
우리가 죽음에 다다라 입고 가는 수의(壽衣)를 보라. 주머니가 있던가? 없다. 수의에는 주머닐랑 없다. 맨손으로 가는 것이다. 주려짜고 긁어모은다 해도 결국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수의, 그것은 인생의 종국을 말해주는 상징물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권세 있고 돈 있던 사람들은 부장품을 챙겼다 온갖 패물들을 시신과 함께 지하에 묻곤 하였다. 그러나 보라. 그러한 부장품들은 결국 후세인들에 의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던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부장품 역시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고, 그리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나 진하기에 명목만으로라도 가져간다는 뜻을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헛된 꿈에 불과하였다.
거대한 호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빌딩, 화려하고 가득찬 백화점의 물건들, 수많은 자동차,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가져봤으면 하고 애달파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 앞으로 등기가 되었으면 또 뭣하겠는가.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호텔 사장은 호텔등기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백화점 사장도 마찬가지다. 빌딩 소유주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택시도 차주는 그저 등기소유자다. 실제 주인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내가 한 시간 서울에 있으면 내 있는 동안은, 내가 있는 공간은 바로 내것이다. 하룻밤 호텔을 사용한다면 그 호텔, 그 방은 바로 내것이다. 내가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지구는 온통 내 땅이다. 구태여 등기부를 손에 들고 그 등기부 때문에 매여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호텔 사장도 하루 세끼의 밥 먹고 호텔 종업원도 하루 세 끼니의 밥을 먹는다. 우리가 한 켤레의 신발을 신듯이 백화점 사장이라 해서 신발을 껴신지는 않는다. 고무신 신는다고 발이 덧나는 것이 아니다. 비싼 구두 신는다고 발바닥 종기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다. 그것은 모두 부질없는 욕심이다. 산승(山僧)의 살림살이는 그저 차밭 서너 이랑이면 족하고 어부의 생애는 낚싯대 하나면 된다.
불교는 무소유(無所有)를 얘기한다. 철저히 무소유이길 권한다. 무소유는 곧 불교의 생명이다. 불도를 수행하는 수도자를 ‘빈도(貧道)’ 라 한다. 겸손이다. 도가 아직 높지 않다는 뜻이다. 아직 도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자기겸칭으로 쓰인다. 또는 무소유(貧)로써 도(道)를 닦아나가는 이를 말한다. 어디에도 주착(主着)함이 없이 구름처럼 물결처럼(雲水) 떠도는 이다. 누더기 옷(納)을 걸친 이(子)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다만 관리한다는 뜻이다. 한 평의 땅을 소유하면 백평의 땅을 관리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다 지니고 있을 수는 없다. 은행에 예치하여야 한다. 그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없는 거나 크게 다를게 없다. 귀중한 패물이 도둑 무서워 은행의 안전금고나 제 집 금고 속에 넣어 두고 쓰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주지(住持)도 마찬가지다. 원래의 의미는 ‘불자주지(佛子住持)’의 뜻이지만, 현재는 어떠한 사찰의 장(長)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과연 주지가 사찰의 장인가? 그것은 그저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스님네 공부하도록 뒷바라지하는 심부름꾼일 따름이다. 한 사찰의 대표권자라고는 하지만 실제 동기부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니다. 공부도 안 된다. 불사(佛事)를 한다 하여 거대한 사원을 건축하고 도량을 넓히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 공부는 안 되는 자리다. 왜 자기 공부가 안되는가? ‘장(長)’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절 짓고 탑 세우는 것을 무슨 큰 불사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진정 대중을 위해서 절을 짓고 탑을 세운다면 그 불사는 대단한 것이다. 경전을 번역하고 해설하며 전하는 공덕만큼 장한 것이다.
신도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돈 있는 사람들이 시주 좀 했다고 거들먹거리면 복은 감해지는 것이다. ‘가난한 여인의 등불’이란 아함경의 설을 이끌어 조금 시주를 하고도, 즉 자신이 갖고 있는 전체 재산의 이주 미세한 부분을 시주하고도 ‘성의만 있으면 된다. 저 가난한 여인의 등불을 보라. 많이 해서 맛이 아니잖는가’ 하지만 그 가난한 여인은 자기의 전재산과 온마음을 다 바치고도 오히려 겸손했기 때문이다. 그 ‘성의’란 재산과 자기 마음의 비율과 항상 비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달마대사가 양무제의 자랑을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고 말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엄양선신(嚴陽善信, ? ~ 904)은 덕이 높아 세상 사람들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 늘 엄양존자(尊者)라 칭하였다. 두 마리의 호랑이와 한 마리의 뱀이 늘 존자를 좌우에서 모시곤 하였다. 그가 하루는 조주스님을 찾아 뵙고 예를 대강 갖춘 뒤 물었다.
“나는 미혹함은 물론이려니와 깨달음마저 깨끗이 잊어 무일물(無一物)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수행하면 좋겠습니까?”
무일물이라 말한 것 자체가 아직 무일물이 경지를 얻지 못한 확실한 증거다. 조주는 간파했다.
“놓아버리게(放下着).
‘자네가 갖고 있는, 나는 무일물이다라고 하는그 의식마저 버려 버리게. 그러면 비로소 참된 무일물의 경지에 도달할 걸세’ 라는 뜻으로 던진 말이다. 엄양은 조주스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놓아버리라니, 뭘 놓으라는 것인가.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
“난 이미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버릴래야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만두게. 아주 한 짐 젊어지고 가도록 하게. 내려놓기 싫으면 가져가라고.”
엄앙은 이 말 한마디에 대오하였다. 일체를 철저히 놓아버린 무일물의 경지, 이것이야말로 쇄쇄낙낙하고 맑고 시원스러움의 극치인 것이다.
「종용록(從容錄)」 제57칙(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