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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불교의 성지 팔공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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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찰만담 - 박용길 1989년 11월 93호
하양읍 신풍속도
대구에서 하양 이르는 길은 크게 보아 두 갈래이다. 시 북쪽의 금호강 건너 동촌 및 반야월로 나가 청천을 경유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군소재지인 동시에 얼마 전 시로 숭격된 경산시를 경유하여 하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뒤엣길은 대구시와 그 외곽 도시를 연결하는 순환 노선인 까닭에, 기왕에 시내에서부터 버스를 이용할 양이면 아무래도 앞엣길을 타고 하양을 하는게 더 현명한 일일 것 같다. 중앙통에서 타는 하양행 시내버스는 언제나 만원-북적대는 거리를 빠져나온 차는 동대구역 초입의 신암동 등마루를 넘으면서 그제사 겨우 한숨을 몰아쉰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쯤에서부터 시내의 매캐한 공기와는 완연히 다른, 제법 신선한 대기의 교외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마악 아양교를 건넌 버스는 이제 동화사와 K-2 공군 기지로 갈라져 드는 길을 뒤로 하고 일로 하양으로 치닫는다. 동촌-몰락한 유원지와 기지촌 그리고 취락지 너무 가까이에 비행장이 있는 곳, 반야월-이름 그대로 대구시 및 경북 인근에의 연탄 공급을 위해 이곳에 조성한 연료 공단의 탄가루로 시가지 전역이 늘 어둠침침한 곳, 안심-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버젓이 드러내놓고 말고기를 파는 곳, 청천-맑은 물이 예전에는 제법 노닐기도 좋았던 곳임이 분명한데 지금은 청천 하늘에 웬 날벼락인지 정유회사의 저유 탱크가 큰 산 하나 허물고 들어앉은 곳, 물띠미-하양 들목의 유원지이며 매운탕 속의 팩팩한 양어장 물고기도 곧잘 바로 앞 금호강 물고기로 둔갑하는 곳, 그리고 하양. 하양도 제볍 달라진 것이 많다. 여기저기 들어선 적당한 높이의 아파트군, 번듯한 상점, 빈번한 버스의 왕래, 유달리 눈에 많이 띄는 젊은이들 …
이와 같은 모든 변화의 주역은 아무래도 대구에서 들어오는 읍 초입의 봉긋한 구릉 너머로 구비구비 들어선 효성여자대학교인 것 같다. 이전만 해도 하양은 주로 인근의 농민, 특히 와촌 신령 청통 지역 주민들이 이곳의 오일장을 보기 위해 드나들던 보잘 것 없는 소읍이었다. 도로망으로 보아서는 가까운 곳의 영천 ․경산 ․신령, 멀리로는 경주와 의성 그리고 청송으로 오가는 길이 대구를 목전에 두고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지만, 결국 대구가 너무 가깝다는 점이 오히려 발전에 장애가 되어 왔던 곳. 주차장의 몰골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도-매점의 아줌마는 여전히 드링크류와 과자부스러기․주간지를 벌여놓은 채 김오르는 오뎅 국물을 홀짝거리고 있다- 차를 기다리는 승객은 이제 농민들만은 아닌, 대구 시내에서 통학하는 생기 넘치는 여대생들로 붐비고 있다.
지금은 밤 아홉시. 대구 가는 총알택시 손님도 뜸한 시각이다. 어둑한 거리-갓 오픈한 까페의 불빛만 아스라이 다가든다.

와혼율 지나며
주차장에는 마침 아홉시에 떠나는 은해사행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냐 싶어 서둘러 계단을 오르자 이내 차는 주차장을 나섰다. 나중에 알고보니 하양에서 은해사를 오가는 버스는, 아직도 차가 세대나 남은 밤 열시 이십분이 막차 시간이었다. 말끔한 차 안에는 겨우 서너 명의 승객뿐. 기사가 여벌로 틀어놓은 노래는 설운도의 가요메들리였다. 하양 우시장을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이내 짙은 어두움이 밀려든다. 밖을 내다보는 시선 앞에 맞은편 빈 좌석이 슬쩍 어른거린다. 어둠 속 저 아래에는 여전히 벼가 잘 익은 들판이 누워 있을까? 그리고 가을에 벼를 거두어들인 뒤,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양파 종자를 파종하던 농부들 모습도 생각이 났다. 온 들판 가득 양파를 심어 이듬해 논기슭마다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이제나 저제나하며 마냥 같은 자리를 맴도는 양파 시세에 폭폭 속 끓이던 농민들. 행여 쌀 수매가나 좋아지면 몰라도 올해도 역시 그들은 속절없이 얼른 벼 베낸 자리에 양파 심을 궁리들이나 하고 있겠지. 텅 빈 도로 위에 라이트 불빛을 굴리며 버스는 어둠 속을 한참 달린다. 와촌-하양과 청통 사이의 한촌. 하지만 오랜만에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와촌의 밤거리는 어둠 속인데도 제법 단장된 모습이었다. 새로 지은 우체국ㆍ수퍼마켓ㆍ식당 다방 등지에서 흘러나온 불빛으로 이제 와촌의 밤거리는 더 이상 쓸쓸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전국에서 그 덩치가 제일일 듯싶은 이곳 국민학교 운동장의 플라타너스도 지금쯤 마악 누런 잎으로 물들어가고 있겠지? 경산군 소속의 와촌면은 관내에 불굴사와 선본사를 두고 있기도 하다. 팔공산의 한 자락이 마침 이 면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선본사는 따로 본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의 공양 도량이 바로 이곳이며 와촌의 동강동이 그 들머리이다.
교통이 여간 불편하지 않아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대편 동화사 쪽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웬만큼 포장도 됐고 또 선본사 바로 밑에까지 노선 버스가 다닌다고 하니, 언제 한번 꼭 가보아야겠다.
와촌을 지나면서 급기야 차 안에는 나만 오독 남게 되었다. 목적지가 눈앞에 가까워지자 새삼 오늘밤 잠자리 걱정이 엄습해왔다. 물론 민박을 염두에 두고 늦은 시각에 차를 탔던 것이지만, 유달리 잠자리에 민감한 데다가 혹시 썰렁한 냉방에라도 들게 되는 날이면 틀림없이 그 지독한 몸살에 다시 한번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가늠하니, 한편으로는 버스가 그냥 한없이 가주었으면 하는, 턱없는 생각도 들었다.

사하혼 언저리
청통을 지나 은해사 주차장에 차가 도착한 것은 아홉시 반이 다 되어서였다. 주위에는 별로 인적도 없고 버스도 주차장 한켠으로 돌아가 가만히 서 있다. 유난히 총총한 별무리. 문득 까마득히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동안의 일탈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멀리 개 짖는 소리가 흠칫 반가와서였다.
발길을 옮겨 은해사로 향했다. 절로 이르는 좁은 길-양손을 벋으면 족히 닿을 정도로 은해사 밑의 상가는 마주보며 서로 그렇게 불어 있다. 잘 맞지 않는 문짝을 밀쳐 닫고 몇몇 가게에서는 아직도 술판이 한창이다. 옹백이 안의 도토리묵! 거무튀튀한 색깔이 분명 그것은 매양 속아 사먹던 시내의 가짜 도토리묵과는 애초부터 그 본이 다른, 진짜배기 묵이 틀림없었다. 안주가 일품이니 이른 저녘부터 술맛이 날 수밖에-.
은해사를 찾는 이유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이들 허술한, 그래서 더욱 정스러운 분위기의 상가에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의도적으로 그러한 모습을 시위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어둑한 구석이 남아 있는 은해사 골짜기와는 여간 잘 어울리는 정경이 아니다. 어쩌면 이곳도 머지않아 새로운 상가로 정리될는지 모르지만, 여기 저기 절을 찾을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까닭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상가마다 온통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심지의 여느 식당을 연상케 하는 세련(?)된 외양의 음식점․획일화의 모범을 보는 것 같은 진부한 메뉴․여관․다방 그리고 다시 대량 생산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그리하여 전국 관광지를 돌아보아도 여전히 그게 그것인 알량한 기념품 상가, 억척으로
밀려드는 놀이꾼들을 먹이고 재우자면 개발도 필요하고 정리도 해야 되겠지만 그래도 한쪽으로는 이렇게 좀 푸근한 구석도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또 유명한 것은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논에 가두어 재배한 ‘청정 미나리’이다. 미나리란 원래 빨래도 하고 쌀도 씻는 마을 공동우물가 한켠의 ‘미나리 광’처럼 지저분하고 거름기 많은 땅에서나 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차에, 이곳의 청정 미나리는 과연 “보기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우리나라 전래의 미식 철학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 독특한 향과 색을 고루 갖춘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때맞추어 나오기 시작한 도토리묵과 잘 어우러진 맛이라니….
마침 늦게 귀사하는 스님을 따라 은해사 객실에 여장을 푼 것은 이럭저럭 열시가 넘어서였다. 생경스러운 민박보다는 그래도 넉넉한 잠자리가 아니겠는가?

옛절의 명화
늦게 마신 작설차 탓이었는지 얼핏 잠을 설친 밤이었다. 아니 오랫만에든 산사의 객실인지라 짐짓 설레임 같은 것도 조금은 있었던 때문이리라. 두런두런 일어서는 도량. 빛바랜 창호지 위 물빛으로 젖어드는 신새벽 공기. 그리고 썰물처럼 머리 속을 빠져나가는 졸음.
오늘날 팔공산 자락에는 대한 불교 조계종 이십오개 본산 가운데 두 개의 본산이 자리하고 있다.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그리고 제10교구 본사인 이 은해사가 바로 그곳이다. 한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산에 이처럼 본사급의 대찰이 두개나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나라 안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 외에 지리산에도 본사가 두 곳이 있고 조계산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 교세(敎勢)에 있어서 만큼은 팔공산에 비할 바가 못된다. 물론 본산 제도라는 것이 우리 불교권에 대한 관의 효율적인 간섭 및 일본 불교에의 종속을 도모하기 위해 합방 초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방으로 제정된 사찰령이란 악법의 소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시 각 사찰의 사세에 대한 객관적인 심사 결과에 따라 그중 일정수만이 본산에 지정되었으리라는 개연성만큼은 어느 정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로 이루어볼 때, 당시 팔고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던 사암의 교세가 영남 불교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연 얼마만큼이었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나을 것이다.
처음 일제에 의해 지정된 본산의 수는 일천구백십일년 당시 삼십 개소였다. 그러니까 그때는 아직 남북이 분단되기 전이었으므로 열네개에 이르는 도마다 평균 두 개 남짓한 본산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유독 경상북도에만은 무려 다섯 개의 본산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김용사ㆍ동화사ㆍ은해사ㆍ기림사 그리고 고운사가 바로 그곳이다. 이들 다섯 개 본산 가운데에서 그 교세가 으뜸이었던 사찰은 단연 은해사였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우리는 당시 은해사가 소유하고있던 농토의 규모로만 미루어 그 교세를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무렵의 은해사 땅은, 가까이로는 신령과 청통 일대의 문전옥답을 위시하여 멀리로는 하양과 금호 그리고 영천 일대에 이르는, 실로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척박한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수확만 해도 일년에 쌀로 삼 사천석, 추수 직전에 전 농토를 돌며 작황을 살펴보는 ‘감상’을 모두 마치는 데만 꼬박 스무날 정도가 걸렸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당시 은해사의 \'떨쳤던‘ 교세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영남 불교 신교육의 산실
그랬던 은해사가 오늘날 조계종 전국 이십오개 교구 본사 기운데에서 이처럼 비교적 낙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이와 같은 낙후성, 즉 덜 되바라진 어둑함이야말로 오늘날 다시금 은해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소중한 요소라는 것도 얄궂은(?) 현실이기는 하지만.
은해사에 오산불교학교가 설립된 것은 일제 강점기의 후반부에 속하는 일천구백삼십구년의 일이었다. 일본의 황민화 정책에 저항하여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불교 정신으로 민족 정기를 바로잡아 나라의 독립을 앞당기려는 것이 그 설립 취지였다. 학교 설립의 재원은 위의 경북 지역 다섯개 본산에서 공동으로 염출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당연히 은해사의 분담 몫이 가장 컸다. 당시는 민족 교육의 진흥이라는 기치 하에 전국 주요 사찰마다 각급 교육시설이
경쟁적으로 설치되던 때였으며, 은해사도 이에 자극을 받아 오산불교학교 설립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장에는 우리나라 불교학 발전의 태두 김동화 박사가 취임하였고, 이후 학교는 줄곧 순수한 한국인 학생과 교원만으로 신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영남 불교 인재 양성의 근본 도량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당시 오산불교학교는 스님들은 물론 인근 마을의 청소년들에게도 그 문호가 널리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승속을 막론하고 가까운 은해사로부터 물심 양면으로 전적인 후원을 받아 가까이는 대구ㆍ서울로 멀리는 일본으로까지 유학을 떠났다. 나아가 은해사는 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웬만큼 사회적으로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도 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그 졸업생 가운데에는 오늘날 알게 모르게 사회 각계에서 주요 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도 많고 당시의 오산불교학교는 개교 오십주년의 대구 능인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지만, 정작 은해사는 아직도 커서는 난 몰라라하는 제 새끼들에게 모두 빨려 해깝한 형해만 쓸쓸한 어미 거미 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은해사여, 기지개 좀 키거라. 요즘 마악 시작된 원력어린 중창 불사 또한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부디 오산불교학교의 정신으로 한국불교의 새 역사를 일받히는 큰 꿈을 잉태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