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르침의 통로〔敎道〕를 여는 새로운 모색과 교체론
우리는 경전이나 이에 대한 다양하고 상이한 해석들에 맞서 있다. 이러한 문자화된 문헌들을, 가르침을 수행하는 일차적인 통로로 규정한다. 화엄현담은 화엄경이라는 문헌을 해석하기 위한 전제들을 실험하고 설명하는 문헌일 뿐이다. 이러한 현담의 재해석을 통해, 현담교체론이 두 가지 중요한 측면, 즉 교체논쟁의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의의와, 그러한 교체논쟁의 화엄교학적 귀결로서의 본성론적 의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후자는 전자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원리가 된다.) 현담은 교체론의 전개과정-소위 본성론적 전환이라고 규정한-에서 전자의 의의를 후자의 원리로 치환해 버린다. 이러한 본성론적 전환은, 그러나, 理證으로도 經證으로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또한 이러한 전환이 이뤄지게 된 사고방식을 추적하면서, 이 전환이 본성론적 교학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됨을 밝혔다.
문제는 본성론적 교학이 다루는 본성론적 교체론은 가르침의 동일성을 성공적으로 확보해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누차 지적했듯 화엄교화의 허구적인 전제들은 가르침의 수행을 위해 기반이 되어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전제들을 더 이상 의심없이 수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가르침을 수행하기 위한 선결과제로서의), 본성론적 교학의 허구성을 극복하면서 가르침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역사적인 교체논쟁의 전개과정을 살피면 다양한 한계 속에서 그러한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들을 읽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하려 했던 점이 바로 이러한 구체적인 노력들이었으며, 이를 통해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유용한 단서들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첫째로, 언어명구에 대한 교학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명구에 대한 태도는 경전 해석에 일차적인 방향을 결정한다. 이러한 문제는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언어나 해석에 대한 태도와 연결될 수 도 있다. 언어명구에 대한 전통교학의 태도는 교학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둘째, 가르침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하는 지혜나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이해의 영역이 되는 언어, 의식, 경험 따위와 이들을 연결하는 교학적인 통로를 모색해야 한다 (예컨대 현담은 그 본성론적 특성으로 인해 실패한 언어명구와 지혜 따위의로). 셋째, 체용론, 四句作對法 따위의 전통적 교학방법론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이러한 방법론을 이해하고 극복함으로써만이 敎道를 여는 새로운 교학 방법론을 얻어 나갈 수 있다. 넷째, 실천의 문제에 대한 교학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예컨대, 화엄교학은 언어, 의식, 깨달음, 지혜, 실천 따위를 포괄하는 삶 전체의 해석이론을 제시한다. 경문의 해석이 의미나 이해의 문제에 한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화엄교학은 그 본성론적 특성으로 인해 가르침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를 관념적인 희론으로 채색해 버렸다. 본성론적 교학의 자기동일성을 극복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가르침은 동일성을 확보하는 일과 더불어, 이와 밀착한 실천에의 통로를 모색하여야 한다. 다섯째, 가르침이 현실에 뿌리를 둔 문제해결을 위해 요청되었던 것인 한, 가르침의 현대적인 수행 또한 현실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교학은, 따라서, 현실사회의 다양한 측면들을 자신의 영역 안에서 섬세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교체론의 역사는 말씀으로 던져진 가르침, 또는 이에 대한 언어적인 기록을 통해 가르침의 재현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 논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논쟁은 시대상황에 따른 교단의 동일성 위기를 반영한다. 새로운 교체론의 성립은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혼란을 극복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르침이 실제적으로 수행되는) 통로를 여는 첫걸음이 되어 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외적, 내적으로 산적해 있는 당면 문제들의 요청에 반해, 그 해결에 실마리가 되어줄 가르침은 오리무중으로 다양한 해석의 혼란 속에 묻혀 있다. 가르침에 대한 자기동일성이 회복되고, 이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한(가르침이 수행되는 사회적인 통로가 열리지 않는 한) ‘불교’라는 이름으로는 현실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통 교학의 교체논쟁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교학운동에 밝은 전망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3. 後記
해인지에 이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을 넘겼다. 그동안 부분적이고 제한된 것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절한 지적과 비판을 받았다. 그 지적들은 대체로 “어렵다,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지극히 제한적인 주제로 시의적절한 내용도 아니다” 따위의 투정과 질책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질책들은 ‘해인지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읽히지 않은 글’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질책들에 대한 변명이나 반성도 문제려니와, 이 글이 교학운동의 일환으로써 씌어진 글인 이상, 개인적인 수행이나, 그 운동의 방향을 위해서도 얼마간의 정리된 반성을 사족으로 달아 놓아야겠다.
이 글은 ‘전통교학의 현대적 재수용’이라는 현실적 욕구의 실현과정에서 씌어졌다. 이러한 욕구는 무엇보다도 ‘불교운동’의 흐름 아래 널려 있는 교학적인 이견들의 혼란상에서 촉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 혼란은 전통교학의 권위, 이념, 수행 방식, 언어습관 따위와 현실적인 난제들을 해결해 가는 현대적 시각 사이의 날카로운 긴장관계를 반영한다. 이 글에 대한 다양한 지적들은 전통과 현대라고 요약할 수 있는 긴장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이 글은 먼저 전통교학의 비교적 섬세한 문제를 전문적인 시각으로 다룬 것이다. 또 이 글은 그러한 전통교학의 전문적인 주제를 어느 정도 비전통적인 시각으로 다룬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시각 중 왜 어느 한편에 이해를 갖는 사람들-불교권 안에서 이러한 시각 차이는 비교적 극명하게 드러나는데-모두에게 이 글은 부정확하고 불충분하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전통교학의 시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극복되어야 할 대상, 그리고 비전통적인 시각에 의한 불교해석은 자기동일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양면 모두를 향한 문제제기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전통교학의 현대적 재수용’이라는 광범위한 주제를 드러내놓기에는 이 글의 내용 자체가 지나치게 국소적이었으며, 이 글의 내용을 그 광범위한 주제로 연결시키는 데에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이 글은 고리타분하고 현학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이 성격적으로 강한 시사성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했지만, 작은 문제를 지나치게 섬세하게 다룸으로 해서 그 시사적인 의미를 잃고 말았으며, 또 충분히 전문적이지도 못하여 다만 현학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그 광범위하고, 현실적인 주제(전통교학의 현대적 재수용이라는)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을 문제삼았다. 그것은 그 주제를 해결해 가는 새로운 교학운동의 실마리로써 이 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글의 문제 제기가 그 주제에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시간적으로는 전통과 현대, 공간적으로는 이론과 현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있어서의 서로 다른 이념들 따위의 긴장관계들이 골고루 얽혀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계에 대한 비판과 요청의 에너지는 내외로 더욱 커져가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시대에도 역시 가르침 일 수 있고, 몇천년을 지난 오늘날 아직도 우리가 佛子일 수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나아가 새로운 교학운동에 대한 자그마한 전망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읽히지도 않는 미숙한 글로 인해 귀중한 지면을 탈취당했던 해인지 독자 여러분께, 성장의 기회를 할애하여 주신 편집위원 여러분께 죄송함과 감사함을 함께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