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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가는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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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을 위한 사색 - 현기 1989년 11월 93호
스님이 계신 산사도 이제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난번에 주신 소식에서 장안에다도 더 시끄러운 곳이 산사라 하셨는데, 그 말씀을 이번 여행길에서 더욱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산사의 정경은 차라리 옛날 창경원이라고 해야 좋을 듯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국립공원 내에 있는 사찰은 어두(語頭)에 관광이라는 말을 붙여 관광사찰이라 말하는 것이겠지요.
관광사찰, 이 말속에는 분명 사찰이 중요시되기보다는 관광이 더 앞서 버팅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광사찰 속에서 승려들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절간이 창경원이나 다름없듯이 중이 원숭이 이상의 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중. 정중함이란 조금도 찾을 수 없는 그 어떤 호기심 때문에 바라보는 눈길들, 참으로 절박하고도 서글픈 일입니다.
매표소 입구에서부터 관광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돈이 없으면 산사에도 갈 수 없다는 둥, 관람료가 너무 비싸다는 둥, 또는 관람료를 많이 받으니 절이 살찌고 중이 자가용 타고 다닌다는 둥, 저마다 나름대로의 불만과 감정을 토로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향해 변명할 아무런 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법당이나 법당에 앉아 계신 부처님을 하나의 장식물이나 유물로 볼지라도, 도시의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네킹처럼 여긴다 할지라도, 지금 한국불교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변명처럼 들려줄 이야기는 있겠지요. 관람료를 받는 것은 우리의 돈이 아니요 정부의 시책에 의한 것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요, 우리도 관람료 받기를 원치 않는다고요. 관람료로 말미암아 주지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주지자리 싸움이 벌어지고 주지와 기관과의 타협이 이루어지고 신도 조직이 붕괴되고-종교는 종교의 실천 모습이 신도들에게 발양되어 시주나 공물에 의하여 운영되어야 하나 사원경제가 관람료에 집중됨으로 해서 신도들에게 소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 마침내 단위 관광사찰의 신도 조직이
붕괴되곤 한다-, 자립경제 토대가 무너지는데, 어찌 우리가 그것을 원하겠습니까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좀더 엄격히 말하면 산문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책임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스님 !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끄러움은 오늘날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몫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관광객들의 모습이 불쾌하다 하여 불편한 심기를 갖는 것조차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독재정권이 만들어낸 관광정책이며 문화정책이며 불교를 족쇄 채우려는 고도의 술책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벗겨내어야 할 임무임을 각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나 성당에 갈 때 핫팬티차림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름 산사의 뜨락에 서 있자면 형형색색의 짧은 팬티차림으로 나다니는 무리들을 봅니다. 스님, 이것이 한국불교의 모습이요 현재적 실상입니다. 자, 어찌하시렵니까? 그대의 후배들에게도 이러한낡은 사원을 물려주시렵니까? 불교의 마당에도 이와 같은 한국의 구조적 모순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두가 성성(星星)히 들립니까?
산중으로 처음 들어가신 스님께 또 다신 속된 이야기로 선정을 어지럽힘을 용서하시기를 지도지도(至禱至禱)하면서 이번 여행에서 생각한 것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도 생경(生經)에 나와 있는 토끼의 구도 이야기와 육도집경(六度集經)에 나와 있는 원숭이의 설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만, 여기에서 간단하게 그 줄거리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많은 토끼를 휘하에 거느리고있는 토끼왕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 토끼왕은 짐승의 몸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 토끼가 사는 숲속에 한 수행자가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토끼왕은 수행자의 경 읽는 소리와 가지런히 앉아 수행하는 자세가 너무 좋아 언제나 먹을 것을 준비하여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지요. 그러나 겨울이 되어 숲속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수행자는 마을로 내려가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토끼왕은 슬퍼하면서 저희들이 먹을 것을 구하여드릴 터이니 머물러 가르침을 베풀어달라고 간청을 하게 됩니다. 이어 정히 저희들을 버리고 가시겠다면 저의 몸을 버려 공양으로 바치겠다고까지 말합니다. 수행자 가 묵묵히 있자 토끼왕은 불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 공덕으로 토끼왕은 내생에서 인간의 몸을 받았다고 경전의 설화는 전합니다.
또 육도집경에 나와 있는 설화는 이렇습니다. 많은 원숭이를 거느리고 있는 원숭이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때 원숭이가 사는 숲속에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왕은 원숭이들을 이끌고 개울을 건너 사람들이 사는 성으로 들어가 임금의 집에 있는 과일을 몽땅 따먹어 버렸습니다. 이에 임금은 사람들을 시켜 원숭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것을 명합니다. 원숭이왕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다른 원숭이들을 구해낼 것을 결심합니다. 원숭이왕은 등 덩굴을 여러 가닥으로 엮어서 길게 이어, 한 쪽은 성 쪽의 큰 나무에 동여매고 한 쪽은 자신의 허리에 매었습니다. 그러고는 하늘을 날아 원숭이가 살던 숲의 큰 나무를 붙잡았습니다. 성과 숲 사이에 다리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등나무 줄이 약간 짧아서 원숭이왕은 나뭇가지를 단단히 불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많은 원숭이가 이 등 줄다리를 타고 다 건넜을 때 원숭이왕은 더 이상 지탱할 힘을 잃고 떨어져 기절하였다가 잡혀 버렸습니다. 임금의 앞에 선 원숭이왕은 “이 모든 죄는 제게 다 있습니다. 다른 원숭이들은 제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살이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여러분의 하루 아침 찬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원숭이왕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임금은 감복하여 용서해 주었을 뿐더러 원숭이들에게 갖가지 음식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던 중에 포항 해변가에서 어느 노동자를 만나고 난 뒤에 불현듯 떠오른 이 두가지 설화는 저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요즈음 흔히 불교에서는 공덕(功德)의 의미가 단순하게 복(福)을 짓는다거나 선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불교가 기복으로 흐르게 된 이유도 이렇게 해석하여 가르쳐 온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번에 새삼 깨달은 공덕의 참뜻은 자기 생명의 투신과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희생이란 생명의 비움과 나눔이고 그 나눔은 타자를 위해 투신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토끼가 불 속에 몸을 던지는 것은 토끼 스스로 생명을 던져 고깃덩이라는 먹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비움으로써 고깃덩이가 새로운 큰 생명으로 발현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공덕일 것입니다. 토끼의 투신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요, 원숭이왕이 목숨을 비움으로써 다른 모든 원숭이들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짐은 바로 우리가 희구하는 완전한 덕상(德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의 진실된 가치는 스스로의 생명을 다른 생명들에게 끊임없는 투신 속에서 비워내 주는 것 속에 있습니다. 나에게 집착한 선행이나 희생은 그것이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푸는 것일지라도 공덕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앉아서는 공덕을 쌓을 수 없습니다. 깊은 산 속에 홀로 고요히 앉아서는 깨달음의 묘용(妙用)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나의 생명과 연결된 다른 모든 생명들과의 만남 속에서 생명의 비움은 역사와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덕(德)이란 구체적인 일과 그 실천을 나눌 때 진덕(眞德)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도 덕이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깨달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을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풍요한 것을 덕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스님, 지금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이 땅에 많은 토끼와 원숭이들의 공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이 역사의 땅에서 숨쉬게 하는 것은 산속의 깨달음이 아니라 불속에 몸을 사룬 열사들과 대자비의 끈으로 허리를 동여매고 일하는 보살들의, 생명을 비움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의 목소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어떻게 세상에 아픔 속에서 고유한 몸짓을 나투겠습니까? 석가모니의 일생도 모든 중생에게로 생명을 비워냄이었지요.
스님!
중생 속으로 중생 속으로 투신하여 거기서 생명의 화엄경을 이룹시다. 생명의 투신과 용기있는 사람들의 터전, 거짓된 자와 억압하는 자와 핍박하는 자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난 끝, 거기에 우리의 숲이 있습니다. 이제 목숨을 비우러 떠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