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스님께서는 10.27 법난과 유난히 관계가 깊은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80년 11.27 난으로 인하여 서울 도선사 주지를 내놓아야 했고 승려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체탈도첩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중앙승가대학은 10.27을 계기로 태동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그 법난 보상차원에서 중앙승가학교로 정식 인가가 났다.
10.27로 인생 역정의 일대 획을 그어야 했던 스님께서는 10.27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이 학교의 학장으로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은 스님과 10·27과의 기연을 자주 입에 올리기도 한다. 물론 스님 스스로도 ‘아이러니칼’하다며 웃으셨다.
불교인에게는 한국불교 최대의 치욕으로 인식되어 온 10.27법난은 국민의 5공 청산요구와 함께 불교의 계속적인 항의규탄으로 인해 88년 말 국무총리가 공식 사과를 했으며 작년 연말에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국회 증언이 있었다. 그리고 89년 1월에는 국방부와 문공부 주관으로 ‘경위설명회’를 갖고 보상차원으로 승가대 인가와 불교방송국 허가를 약속했었다. 불교방송국은 작년에 이미 허가가 났고 지금은 시험방송 중으로
5월 1일 개국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10.27법난은 이제 끝난 것으로 간주하는 측이 있는 반면에확실한 진상과 책임자의 규명 처벌을 요구하는 측이 상존하고 있다.
이에 대해 스님의 의견은 “끝날 수도 완전할 수도 없는 것이 사바세계의 일 아닙니까. 과거에 연연해서는 새롭게 발전할 수 없습니다. 10.27법난을 물질적 보상으로 마무리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크게 보면 이게 다 우리의 업보입니다. 이를 계기로 반성하고 뉘우쳐서 굳건하고 힘있는 종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전무후무한 법난을 다시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작년 휴암스님이 「승가의 양심과 불교탄압의 문제」라는 소책자를 통해 10·27 법난은 이권다툼에 의한 투서 등 궁극적으로 불교계가 동기와 소재를 제공했다는 주장이었고 나서 교계의 논란이 된 바 있다.
이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여쭈었더니 “시각과 견해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도 있지만 휴암스님은 아무 말씀 안하시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서두를 꺼내셨다. 그 당시 정부 발표 내용 중 상당 부분이 허위 날조로 밝혀졌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부산 대각사 경우스님의 경우는 법인재산을 개인재산으로 잘못 발표했으며, 투서도 국회 5공특위에서 많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고, 실제로 투서에 의해 구속된 승려는 한명도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또 “간첩이 잡혀도 변호사를 선임하고 3심을 하는 실정인데 변호사도 없이 단심으로 채탈도첩을 결정하는 것은 명백히 탄압”이라며 다소 격앙된 어조로 스님께서는 10·27은 분명한 법난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10·27이 전적으로 외부에만 탓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다만 천 수백년을 지내오면서 이러저러한 과정을 수없이 넘겨오고 있는 것인데 다소 바람직스럽지 못한 면이 발견됐다 하더라도 이를 스스로 해결토록 해야지 간첩 잡듯이 전국 사찰을 일제히 뒤지는 것은 대법난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뒤졌으나 나온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스님께서는 관계당국자가 10·27 자체평서를 작성하여 대통령께 보고했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10·27의 법난시비를 일축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계 내부가 밖에서 듣던 바와 같이 부패한 것은 아니다. 둘째, 10·27사태로 불교의 반공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셋째, 불교가 타격을 입고 불교 신도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 넷째, 불교계에 획기적인 발전책의 강구가 요구된다 등이었다.
개인적으로도 10·27이 남다른 형극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보’로 돌리는 스님께서는 오히려 이를 계기로 자신을 탐구하고 수행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중앙승가대학 학장으로 취임한 직후(88년 5월)한 불교잡지와의 대담에서“3년 전에 복권이야 됐지만 그땐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어요. 총칼에 위협당하고 군화벌에 창자가 터지고 했던 그때 이미 나는 죽었고, 이제는 다시 태어나 또다시 출가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당시의 심경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라 한다.
그러나 10·27의 울분과 절망을 삼키고 승가대학 인가를 위해 학장으로 취임한 이래 백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던 스님께서 10·27보상차원으로 인가를 마무리지은 지금 시점에서 남들에게 말 못하는 심경은 어떤 것일까…
혜성스님께서는 중앙승가대학이 교육계의 처음은 아니다. 73년 경기도 평택에 청담 중·고교를 세우면서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이때가 은사스님 청담선사 열반후 2년만의 일이다. 스님의 학교 설립의 배경은 이렇다.
대만 홍콩 등을 방문하여 보니 자항(慧航)스님 사후 그 제자들이 자항 중·고교를 설립했더란다. 서구 종교들도 종교 본연의 일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술을 함께 하는 것을 보면서 종교는 마음과 육체의 병을 동시에 고쳐줄 필요를 느꼈다. 또 정화불사 후 20,30년 동안 교육기관 하나도 세우지 못한 한국불교의 현실이 스님이 학교 설립의 대서원을 세우게 된 이유이다. 해인사만 보더라도 가람수호는 잘 했으나 기존의 학교들을 유지하지 못하는 현실이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도선사에 불교계 최초의 사회복지법인 혜명보육원과 양로원을 개설한 바 있는 스님께서는 청담대학 건설의 원대한 포부가 10.27 법난으로 수포로 돌아간 것이 제일 가슴 아픈 일로 남아 있다. 청담대학을 설립했더라 먼저 갓난아이부터 나이든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교육기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인재 양성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기대섞인 아쉬움이다.
당시 청담 중 ·고교는 종단의 지원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신도 모금, 독지가의 후원, 사찰의 합리적 운영으로 생긴 여유 재정을 가지고 설립되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이번 승가대 인가에서는 재정 때문에 적지 않은 곤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l0억 예치금을 어떻게 마련했느냐는 질문에는 구체적 답변을 피한 스님께서는 불교방송국이 모금을 진행중이라 모금은 안했다고 한다. 승가대학장으로 취임하고 인사차 종정스님을 방문했을 때 큰스님께서 “재원이 없으면 해인사 8만 대장경을 담보해서라도 재원을 마련하고 일을 꼭 추진하라”고 당부한 말씀에 용기를 얻었고 지금도 늘 그 말씀을 간직하며 어려움을 이긴다.
중앙승가학교는 서울 개운사에 있다. 개운사는 고찰로서 세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일주문 공사를 성대히 마쳤다. 요즈음 개운사에서는 중앙승가학교의 시설 마련을 위해
대대적인 정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요사채가 헐리고 뒷산이 운동장으로 변할 예정이다.
부족한 교지, 교사(敎舍) 때문이다. 지난해에 이미 개운사 부지는 종단의 승인하에 학교법인 승가학원으로 풍기가 이전된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의 개운사 부지만 가지고는 발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렇듯 부족한 공간과 인가의 어려우에도 불구하고 중앙승가대 관계자들이 일관되게 서울을 고집했던 이유는 교수확보의 어려움과 지방대학으로의 전락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설명이다.
이제 각종학교가 된 중앙승가학교를 정규대학으로 계속 추진할 계획인 스님은 벌써 5개년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5년내 서울 근교에 새부지를 마련, 캠퍼스를 옮기고 과를 증설할 계획이다. 현재는 불교학과와 불교사회복지학과의 2개과에 각각 60명씩의 학생을 받고 있지만 점차로 유아교육과, 불교미술과, 불교음악과, 철학과 등을 신설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한국불교의 명실상부한
도제양성의 산실을 만들겠다는 포부이다.
지금까지 중앙승가대학은 비인가 종립학교로 8회 졸업생 40여명을 배출했다. 열악한 조건에서 이나마 해 온 것도 퍽 다행이나 타종교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인기를 계기로 승가교육의 새 기틀을 마련했으면 하는 것이 모든 불교도의 바램일 것이다. 각 본사의 강원이 이름은 비록 승가대학으로 바뀌었으나 아직까지 300, 400년전부터 내려오는 1인 강사 밑에서 내전을 주로 배우는 전근대적 기초교육기관에 불과하다는 것이 스님의 판단이다.
현대의 도인(성직자라는 뜻이리라)은 중생교회를 위해서도 외전을 배워야 하고, 내전과 외전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현대적 교육기관이 필수임을 역설한다. 때문에 이번 인가를 “만시지탄이나 다행”이라고 소감을 말씀하셨다.
또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킨 동산, 효봉, 금오, 청담스님 등이 희망하셨다. 도제양성, 포교, 역경을 주창했는데, 도제양성이 되어야 포교도 역경도 되므로 도제양성이야말로 기본이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이번 인가를 계기로 지방 특히 해인사, 송광사, 범어사 등 큰 사찰에서 지방승가대학 건립에 원력을 세우고 작업에 박차를 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셨다. 그리하여 지방에도 4,5개의 인가난 승가대학의 건립을 개별 몇몇 본사가 각자 몇 억, 몇 십억 불사를 하는 실정에서 관심과 애정만 있다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 전망과 계획을 세워 불교계의 역량을 결집하여 하나씩 하나씩 순차적으로 건립하면 일은 더 쉬워질 것도 같다.
혜성스님께서는 중앙승가학교의 성격은 현재처럼 강원졸업생과 선원후 들어오는 재교육기관이 아니라, 이 학교를 졸업해야만 승려가 되는 기초필수교육기관을 원하셨다. 그렇게 되면 불교가 전체적으로 질이 향상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양성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86년 9.7 해인사 승려대회 등을 정점으로 중앙승가대학이 현실참여의 스님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에는 침체되지 않았냐 하는 시각에 대해 스님은, “민주화를 부르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정치인이 알아서 해야할 것”으로 못 박고, “지금 승가학교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제일 시급한 과제”라면서 “승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자기 수행과 학문함구에 전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불교침해 문제에 있어서는 큰 목소리를 내고 단호히 앞장설 것을 다짐하나 그외 문제는 한 발 물러설 것”이라고 밝혔다.
10년 동안 도선사주지로 재직하면서 총무원 사회부장, 재정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스님께서는“공부 안했다고 하면 종아리도 맞아야겠지만 종단에는 나 같은 심부름꾼도 있어야 할 것”이라며 “다시 태어난 셈 치고 승가학교 발전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