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의 울림소리 같이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유곡
1989년 11월 93호
우리가 불교를 이야기할 때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승가의 모습일 것이다. 물론 불․법 ․숭 삼보이며 이 가운데에서도 부처님을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겠으나, 우리의 처지에서는 산속 깊숙이 안치된 연화대 위의 부처님보다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스님들을 생각하는 것이 더욱 시각적이고 현실적이다.
승가 곧 스님들도 삼보의 하나이니 보물이다. 보물이라 하면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을 일컬음일진대, 그렇다면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스님들이 과연 그렇게 보물 같은 모습으로, 보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보물 같은 광채를 갖고 살아가느냐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면 공연한 자기비하일까.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자신에게 닿으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자신의 위상에 허물이 되는 것이라면 지나치게 분노하면서도, 그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이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그것이 비록 동료들에게 온 것일지라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회피해버리는 오늘의 우리들, 집에 불이 났는데 나는 안방에 앉아 있으니 사랑방에서야 불길이 솟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있는 범부와 무엇이 다르랴.
내 동료이면 바로 나 자신일 수 있고 내가 몸담고 있는 내 집단일 수 있다. 우리 몸의 한 부분이 이를테면 팔이나 다리 한쪽이 상하고 다쳤다고 해서 몸 자체를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상하고 이지러진 팔이나 다리라 하여도 그것은 내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젊은 스님들은 두셋만 모여 앉아도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절 집안의 구조와 제도 따위의 불합리성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곤 한다. 도대체가 설 곳이 없단다. 공부를 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오면 갈 곳이 없고, 어떠한 진보적인 의식을 가져도 그것을 제대로 수용하고 폭넓게 배양해줄 따뜻한 양지도 없고. 그렇다고 젊음의 열꽃으로 방황하는 무거운 가슴을 덮어줄 손길도 없다고. 다만 전통과 관념에 물든 관념적인 수행자로서의 중노릇만이 참된 도의 길이요 승려의 본분인 양 온갖 얽힘으로 억누르고 있다고 말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찌하면 욕 안 먹고 처신 잘 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되어버린 우리네 풍속도,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언제까지고 내 집안의 허물만을 붙잡고 통탄하기엔 우리는 너무나도 급박하고 첨예한 현실의 문턱에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집안에 갇혀 가추를 드러내고 있는 동안에도, 이 땅에는 한시라도 울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고 있다.
불교가, 승가가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불교가 제 몫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집안의 망극한 현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를 과감히 털어버리고 우선 자기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정화작업이 선행 되어야 한다. 구도자라는 생각에, 법복에 대하여 사회가 부여한 제도적 우월감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한다. 자기기만의 우월감 속에서 현실과 사회에 대한 시각에는 빗장을 건 채, 현실의 학문에 대하여 안일하며 또 같은 연배의 세속인 보다 훨씬 더 역사와 민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함에 대하여 뼈를 깎는 반성의 아픔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불교가 주는, 불교가 갖는 지혜와 용기와 사랑은 어디에다 두고, 제 몫을 찾기 위하여 교수, 학생, 광부, 농민 할 것 없이 하다못해 무의탁 노인들까지도 투쟁하여 성취해내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동을 하지 않고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는 우리는 그 사람들이 갖다바친 원(願)과 망(望)이 서련 시주물에 의탁하고 있다. 제 몫도 찾을 줄 모르면서 어떻게 그들의 원과 망을 들어주는 역할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도 저도 돌아봄 없이, 다만 자신의 가치와 행복만을 생각해서 일생을 외톨이 마냥 살아간다면 이는 분명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지난 9월 6일, 조계사에서 열린 6공법난 동국대 사태 범불교도 대회에서 어떤 스님께선 절규하셨다. 오늘 이 땅에 자기 역할과 몫을 충실히 해내는 참다운 불자가 있느냐, 오늘날 우리가 받는 불합리한 불평등 대우에 대하여 더 이상 탄압 받을 수만은 없다고 하여 모였는데, 과연 우리 불자가 탄압을 받고 있는가, 다시 말해 불자가 불교의 가르침대로 행하며 그 가르침을 펴다가 받는 공권력의 제지를 받곤 하는 그러한 억울한 탄압이냐고.
우리가, 우리 승가가 개개인의 모두 자기 역할을 제 위치에서 충실히 이행했다면, 그리고 승가에 대한 개개인의 애정이 도타왔다면, 아프고 그늘진 곳에서 숨 한번 크게 못 쉬어보고 살아온 가난하고 힘없어 소외된 사람들에게 자애로움을 나누어주는 삶이 이어졌다면, 우리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슬픈 현실을 맞딱뜨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며 지금처럼 제 역할을 하니 못하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무력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의의 개념이 희박해진 요즈음은 힘이 정의를 지배하는 논리가 적용되는 세상이다.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힘이 지배하는 상황에 굴복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외국의 고승께서는 승가의 존재 의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반 사람으로 생활하면서도 불교를 따를 수 있다면 왜 부처님에 의해 확립된 승가가 존재하겠는가. 승단은 자신의 정신적, 지적인 발전은 물론 타인들에 대하여 봉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 가정을 가진 일반 신자들은 타인을 돕기 위해서 그들의 전 생애를 바치는 것이 어렵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얽매임이 전혀 없는 승려는 대중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들의 전 인생을 바칠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오늘의 승가의 참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참으로 명쾌한 예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승가는 역량과 지혜를 갖춘 모습으로 새롭게 살아나야만 한다. 비록 한쪽이 상하고 일그러져 보기 흉하다 할지라도 내 몸은 버릴 수 없는 것처럼, 내 가장 가까운 이웃, 나와 가장 많이 가장 길게 호흡하는 내 동료들부터 아끼고 보살피는 사랑의 실천에서 온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에 이르기까지를, 마치 메아리가 온 산에 퍼져 나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