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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참모습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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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도관 1989년 11월 93호
천육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는 한민족의 정서와 함께 호흡하면서 민족의 삶과 함께 해 왔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불교의 모습은 이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또한 이 땅의 종교로서 사회에 어떤 이익을 환원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자신의 축적된 역량에 기초한 대안을 제시할 종단의 힘에 대해 많은 불제자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부정적 시각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 청년승려들은 한국불교를 올바르게 진단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는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많은 출가자들의 생각들이 극히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모습으로 굳어져 있어서 그 본래의 올바른 세계를 달리 보고 있는 선(輝)에 대해서도 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선이 어떤 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고민해 봐야 할 것이며 그리고 참 부처님의 진리가 중생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져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승가는 시대적으로 볼 때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를 꽤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 승단은 어떻게 발전해야 민족의 이해를 대변해내는 민족종교의 불교교단이 될 수 있는가를 청년승려의 한 사람으로 더듬어 볼까 한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카필라성에서 궁궐 바깥의 고(苦)의 세계를 인식하시고 그 중생들의 고뇌에 찬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셨으며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의 세계를 증득하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단순히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고뇌에 찬 현실과 원인과 그 해결 방법을 다르마에 맞게 깨달으시고 따라서 현실의 모습에서 모순 구조와 고통을 적극적으로 부정해 가려는 사회적 실천에 찬 깨달음이 그 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외의 과정과 모순된 구조를 극복하여 환멸연기(還滅緣起)로 나아가는 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참 교리였다.
이러한 중생해방을 부르짖는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와 조선조 500년을 통과하면서 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파에 소외되는 과정을 밟아오면서, 어떤 선사는 외세를 찬양하고 왕의 성수만세를 기원하였으며 또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이라(경허선사의 참선곡 중에서)”라고 노래하여 중생들의 구조적 고통과 사회적 질곡을 외면하고 안일한 개인의 수행만 일삼아 왔었다. 따라서 이젠 선(禪)도 구체적 현실을 살아가는 민중의 고뇌를 해결하여 참으로 중생과 같이 ‘자유의 길’로 나아가는데 고민하고 정진해야 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삼법인(三法印)의 무아사상에서 세계의 연기적 구조와 상호연관성 그리고 주위의 허위의식과 삿된 행을 부정하여 중생들을 해방의 세계로 나아가게 함을 설하셨는데 역사 속의 한국불교는 찬란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얼마만큼 중생들의 모순된 고통의 삶과 질곡을 부정하는데 얼마나 노력해왔는가 한번 냉정하게 비판해 볼 일이다.
일체법이 무아(無我)인 부처님의 사상은 세상 만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상주하는 것이 없고 항상 변화와 발전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사회도 지금 현재의 모순 구조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좋은 사회 즉 보다 많은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모순이 지양된 그런 사회로 발전하여 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 불자들은 여기에 대한 낙관성을 가지고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지양하여 분단과 예측이 없는 통일 정토를 앞당기는 데 정진해야 할 것이며, 민족대중의 요구와 지향을 우리 불교는 충족시켜 대중과 부처님 법이 상호 침투하여 정토사회를 앞당기는 데 보살의 원력과 수행을 아울러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승단이 어떠한 모습으로 현재의 잘못된 점을 개선해 나가고 올바른 부처님의 진리를 실천수행 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 주위에는 똑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달리 이해하고 있는 것을 올바로 통일시켜 사상을 전 대중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로 들어 업(業)에 대한사장을 어떤 사람은 ‘팔자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실천적이며 창조적인 연기론적 사장으로 이해하는 이도 있다. 이렇듯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교리의 왜곡된 이해를 통정토 건설에 어울리는 부처님의 사상체계를 세워 대중의 사장공유 정신을 함양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 불교의 문제 중 사찰운영의 비민주성이나 교단의 정권에 대한 예속성 둥을 극복하고 내부에 체질화되어 있는 봉건성을 깨어내고 혁신을 꾀하여 불교대중을 조직하고 위축된 교세를 다시 살려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구조를 바꾸어 나가는 데 전 불교도가 뭉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처처가 부처님이 계신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을 수백번 폭파하고도 남을 핵폭탄이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있으며 사용 가능하게 되어 있다. 또한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이 있어 존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생산대중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농민은 저 농산물 정책과 수입개방 등으로 정든 땅을 떠나 도시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며 심지어는 빚에 눌려 자살까지 하는 실정이며 임금 노동자들은 임금동결정책으로 신성한 자기의 노동을 여러 방면으로 수탈당하고 있으며 젊은이가 정보기관에 젊은이가 정보기관에 끌려가 의문사를 당하기도 하는 저주받을 이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있다.
이러한 중생들이 안고 있는 고통을 우리 불교는 어떻게 풀 것인가를 전술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고(苦)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교의 모습이 올바르지 못한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모습이 있었다면 반성해 볼 일이며 대부분인 힘이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보충할 일이다.
이제 우리 송가는 안으로 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대중을 교화하고 묶어내어 민족종교로서 모습을 더욱 굳건히 하고 비불교적 요소를 목적의식적으로 부정하여 정토사회를 이루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며, 밖으로 전 불교도들은 민족의 자주화와 예속과 질곡이 없는 해방정토를 건설하는데 쉼없는 정진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불교는 올바른 모습으로 역사의 바퀴는 구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