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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지명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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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11월 93호
지명스님은 이 시대의 바람직한 승려상에 관해 골똘하는 편이다. 일천육백여 년의 역사를
면면이 흘러온 불교가 오늘에 이르러 어찌하면 부처님 가르침 닮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리 될 수 있도록 승가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를 구상하고 있다. 강의를 준비하는 간간이 청탁받는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을 제하고 나면 승가의 조직을 꾸리고 여하히 포교활동을 해나갈 것인가로 깊고 깊은 방법을 찾아 고심하는데, 그 까닭은 불교가 신라와 고려를 이어온 묻힌 맥을 잇는 데서 스스로가 작은 구석이라도 일조할 수 있기를 발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10․27법난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몇년 뒤 신흥사 사태 소식을 들었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전해 듣는 이 나라 불교에 대한 절망적인 기별은, 지명스님에게 “공부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승단을 단단히 다지고 개조하는 것”이라는 더욱 명확한 사명감을 짐 지워 주었다. 귀국해 보니, ‘봉은사 사태’가 진행중이었다. 서로 지칠 때까지머리 터지도록 싸우는 모습에 경악하면서, 석림회 동문 스님들과 모여 “양쪽 퇴진”을 주장하며 조계사에서 기도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 일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뭘 한번 하려면 제대로 안 되는’ 우리네 불교 현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건 좌절감이었다.
얼마 전의 동국대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많고많은 불자들이 조직의 필요성, 단합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자유롭기를 좋아하고 간섭받기를 거부하여 마음에 안 들면 바랑 걸머지고 훌훌 떠나버리는 스님들, 배출된 문중 인원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는 본사, 상좌들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사는지 알 리 없는 은사, 이 모든 것의 중심은 ‘조직’을 통하여 건설되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지관스님은 훌륭한 스님으로 존경하여 그 스님 일에는 발 벗고 나서 단결하면서도, 왜 수감중인 지선스님은 종단 차원에서 보호하질 못하는지… 민주화운동을 하는 스님도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게고, 그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할 필연적인 일인데, 스님을 스님들이 보호하지 못하는 풍토가 되다보니 너나없이 ‘그건 걸리는 일’하며 주춤하거든.”
스님은 낙공에 떨어져 허무주의, 염세주의적으로 되어버리고 수행과 깨달음을 이분화하는 승가의 분위기가 변화를 일으켜야 우리의 불교계도 비젼을 지닐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신도들에게 정토사상을 가르치면서 정작 승려 자신은 순간적인 이익을 취하는 건 아닌지, 참선은 방법일 뿐 오히려 목표는 ‘그 시대 사회와 더불어 평화를 얻는 일’이거늘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다니는 일만이 능사가 아님을 아는지를 스님은 이땅의 승려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불교는 어찌된 영문인지 큰 것, 더 큰 것을 찾아나가고 있어, 맡은 바 작은 역할에도 성실하지 못하면서 더 큰 절, 더 큰 지위로 끝없이 전진 또 전진한단 말이야. 마치 스땅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처럼 성직이 욕망 추구의 장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몰라.”
벽지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근 동리 사람들에게 성실한 승려의 자세를 보이는 것이 무슨 본사 주지를 한다거나 총무원으로 입성하는 일보다 훌륭한 것임을 모두가 공감하면서 뜨거운 격려를 보내는 그날이 오려면 승려들이 뭉치고 불자들이 조직적으로 모여야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스님은 ‘교수’라는 직함, ‘박사’라는 직함보다는 그저 ‘스님’으로 불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틈 나는 대로 언제고 선방에 들어가 있을 참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야 귀국하면 곧바로 선방부터 찾아갈 생각이었다. 허나, ‘선방으로 갈 거면 뭐하러 고생하고 학위받아 왔느냐’는 주변의 만류로, 삼선교의 청룡사에 머물러 앉았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한 건 어디까지나 서양 종교와 불교를 비교 공부하고 탐색작업을 한 것에 불과하거든, 학위라든가 교수라는 직업은 염두에도 없었는데 사람들의 기대치는 그게 아닌가봐.” 그래서 지명스님은 앞으로도 ‘한국 승려들이 밝고 건강한 의식을 깨치고 포교에 전념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귀국한 지 일년이 채 안 되었다.
그 사이에 스님은 불교 개혁을 위한 각종 세미나에서 ‘승가 체질의 변혁’을 강조했고, 성열스님이 초대 원장이던 한국불교사회교육원의 두 번째 원장이 되었다. 그 덕분에 정권의 탄압으로 스님은 얼마 전에 낱말도 생소한 ‘기소중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불교 교리를 일반 사회에 응용하고 어떻게 이 사회에, 역사에 응용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단체거든. 민족 문제, 통일 문제를 다룬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은 셈이지. 불교야 원래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 아닌가. 그런데도 일반에게는 천주교가 ‘정의의 종교’로 여겨지는 것에 반하여 불교는 ‘어용 종교’로 인식되고 있지. 유신 이후로 천주교는 민중의 편에 선 것에 반하여, 불교는 연신 굽신거리고 아첨하여 떡고물을 챙긴 업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젠 더 이상 당하면 안 돼.”
저녁 늦은 시간에 교육원에 모여 공부하는 해맑은 눈동자의 직장인들로부터, 또 그가 가르치는 동국대 및 승가대의 젊은 학승과 학생들로부터 오히려 스님은 ‘성실성’을 배우노라고 토로한다.

한 주일에 한번씩 선종사상사(승가대)와 천태학(동국대)을 강의하고 있다. 스님의 강의방법은 과다한 분량(?)의 과제물이 특징이다.
매주 한권의 서적을 읽고 와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형식으로 수업을 이끌어간다고 한다.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승가대 스님들을 보면서, 지명스님은 사찰의 적극적인 교육 투자를 기대해 본다. 공부하는 스님들이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지 못하고, 재정 문제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퍽이나 안쓰럽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절에서 성장한 스님은 열여섯살이 되던 해에 범어사에서 득도하였다. 강사 스님을 좇아 영천에서 이십리나 더 들어간 산골의 죽림사에 머물던 시절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였다. 신도들 그림자라곤 자취조차 없는 적막한 사찰에서, 뒷동산에 오르면 눈 아래 굽어보이는 금호강의 푸른 물줄기에 콧잔등이 시큰해지도록 알 수 없는 향수를 느끼고, 철로 위로 달리는 기치를 바라보며 ‘저 기차의 끝은 어디일까’를 까치발하며 더듬어보기도 하였다. 그런 지명스님이 범어사로 가 공부를 하던 중 문득 ‘현대학문’을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경전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보살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화엄경의 그 속 깊은 뜻은 무엇인지, 목이 타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간단한 짐을 꾸려 서울의 선학원으로 올라왔다. 절 공부만 해온 스님인지라 아무런 기반이 없었고, 검정고시학원을 다니면서 중학검정고시부터 준비를 했다. 선학원에 앞길에 서서 아침나절 총총히 교문 안에 들어서는 풍문여고, 경기고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 모습을 응시하며, ‘난 저토록 중한 공부도 않고 이제껏 무엇을 했던가’ 하는 안타까움에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선학원에서 공양주를 하였다. 절 안에 맛깔 좋은 음식 솜씨가 소문이 나면서 본격적인 요리를 만들기 위해, 다른 겨를이 없는 와중에도, 한정혜 요리학원을 수강했다. 스님이 요리학원에 다닌다는 게 이색적이었는지 학원 원장의 간청에 빵모자를 머리에 얹고 냄비 들고 일간지, 주간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 기억도 있다. 그렇게 ‘매스콤’을 타고나니 여기저기서 스님에게 요리에 대해 문의하는 이들이 숱하게 나타났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스님은 “이제사 생각해보니 요리학원의 선전용 모델로 이용당한 것 같다”며 허허 웃으신다. 당시엔 스님 대학생이 드물었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도
밤 늦도록 또 공부하던 지명스님은 주지스님으로부터 “이놈아, 중이면 염불 참선이나 열심히 해 !”라는 꾸지람을 수시로 들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남들의 눈을 피해 벽장 속에 숨어서 춧불을 켜고 공부를 하기도 했고, 연탄창고 위를 개조하여 그 속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드디어 칠십일년에 동국대학에 입학하였다. 문수보살이 왜 그 이름을 지녔고, 그가 상정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런그런 것들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스님은 ‘재발심’의 기회를 갖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친 뒤에 스님은 미국행을 결심한다.
기독교가 극성을 떨치던 그 시기에 길 가던 스님은 끔찍하도록 여러 차례씩이나 그네들의 끈질긴 강요에 저주의 협박까지 들어야했던 것. 그래서 기독교의 힘은 어디서 나오며 그 힘은 무엇인가, 또 서양의 기독문화란 어떤 것인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피부로 체험해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처음부터 반드시 공부하련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홀가분한 심경으로 본질을 살피고 온다는 ‘야무진’ 판단으로 떠났을 따름이었다.
미국 달마사에서 운 좋게도 후원자를 자처하는 신도들을 만나 동부의 템플대학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홉 해 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힘들었던 일은 뭐니뭐니 해도 언어 문제였다. 가르치는 이 없이 홀로 깨친 영어에다가 아직 한국어 발음에도 자신없어 하는 스님인지라, 듣고 말하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게다가 물을 갈아먹으면서 생긴 피부병에 시달리고, 참선하듯 밤낮없이 몰두하던 공부로 말미암아 간장을 많이 해치기도 하였다. 그래서 요즈음 스님은 건강 되찾는 일을 제일의 과제로 삼고 있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승려 달라이라마는 이런 말을 하였다.
“자기 자신을 개혁하고 출가하는 것은 좋지만, 속세를 벗어난다고 해서 속세의 모양을 버린다거나 속세의 이웃을 버려서는 안 된다. 속세와 함께 하듯 그 안에서 진실로 탈속해 진흙 속에 연꽃 피듯 살아야 한다.”
불법, 그 오묘하고 높고 큰 진리 안에 어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던가.
“집착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금강경의 말씀을 신명처럼 좌우명처럼 가슴팍에 새겨두고 살아온 지명스님은, 그 뜻처럼 맑고 편안한 인상의 스님이시다. 모든 혼란과 고난을 헤치고 역사 속에 기여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지명스님은 오늘도 역시 분주하게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