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여윈 진리의 세계
무위사라는 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버거운 마음이 되는 것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엄한 벽화를 볼 수 있다는 설레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절 집의 이름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과 왕건과 결탁한 형미스님의 행적이 다분히 정치적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한번은 집고 넘어가야 할 높은 산이다. 행장을 꾸려 떠나는 가을 남도답사는 길가의 코스모스도 반가웁다.
무위無爲라는 한자말을 새겨 보면 인위적인 조작이 없다는 뜻이다. 위작이나 조작 따위로 얽힌 인연의 사슬을 여윈, 4상(생, 주, 이, 멸)의 변천이 없는 진리로 풀이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법의 진실 체인데 작위적인 인연에 끄달리지 말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추구하자는 다분히 교훈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이 절 집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자리하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월출산 산자락 여기저기에는 불교의 흔적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구정봉 북쪽 정상 봉우리에 턱 앉아 있는 국보 마애불이 인상적이다. 또 천왕봉 동북쪽 천황사는 목탑지가 확인되어 그 옛날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쇠락한 모습이 애잔하기만 하다. 이밖에도 도갑산 북서쪽 산기슭에는 해탈문과 도선국사의 수미비로 유명한 도갑사가 있다. 도갑산 동남쪽에는 고려 무신 정권기에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기 전의 최이, 최항이 이곳 진각국사에 혜심을 도와 세웠던 월남사가 폐찰이 되어 안타깝다. 여기서 살펴볼 무위사도 도갑산 동남쪽에 터를 다졌다. 이 모든 월출산 자락의 불적들은 적어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어 낸 담담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백제 혜현스님이 수행하신 달나산은 월출산의 옛이름
무위사의 그 담담한 모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절 집에 깃든 진정한 역사적인 뜻을 알려면 몇 권의 책을 들추어보는 수고가 오히려 즐겁다. 「속고승전」에 실린 ‘백제국달나산석혜현전伯濟國達擊山釋慧顯傳’에는 이곳 월출산과 관계가 있었음직한 기사가 있어 흥미롭다. 이 기록은 백제 사람인 혜현스님(570∼627)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 형식인데 백제국 북부 수덕사에 머물다가 남방 달나산으로 가서 수행하다 돌아가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문제는 백제국 남방에 있다는 달나산이 어느 곳에 있는 산이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동국여지승람」에 월출산의 각주가 참고된다. 신라 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조선 때는 월출산月出山이라 한 기록이 그것이다. 이러한 산 이름의 변화는 음역과 의역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모든 지명이나 산 이름이 그렇듯이 말을 문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뜻과 음을 합성하다가 나중에는 음역으로 정착하는 현상을 보여주는데 이로 미루어 백제 때 월출산의 이름은 달나산으로 한자의 음가만을 빌어 표기하였을 것이다. 이는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께서 이미 월간조선 1993년 2월호인 명찰순례 58 ‘강진 월출산 무위사’에서 지적한 바 있다. 무위사 터가 남향으로 처진 것이나 포구를 등에 진 것 등이 수덕사의 위치와 방불하다는 설명은 그만두더라도 달나산이 월출산임을 의심할 여기가 없고 이를 입증할 만한 백제 시대에 해당하는 부교 유적이나 유물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도 먼저이다. 전북 정읍 지역 아래로는 백제 시대의 불교 유적이나 유물이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형편이지만 이러한 문헌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도 불교가 이해되고 있음을 웅변해 주는 자료이다. 몇 년 전에 월남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계 연화문 숫막새나 무위사 극락보전 앞의 백제식 연화문 배례석 등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좋은 징조로 여겨진다.
무위사의 이모저모
이제 무위사로 한발 다가가 보자. 현재까지 무위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946년에 건립된 ‘高麗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과 1739년에 기록된 ‘무위사無爲寺 사적事蹟’이 참고된다. 고려 정종 1년에 세운 선각대사 형미의 비문은 금석문 자료로서 가치는 높으나 비의 마멸이 심하고 개인 행적 중심으로 여러 자료들을 곁들여서 더듬어 보자.
‘무위사 사적’은 건륭 4년(영조 15년, 1739년)에 주지 극잠克岑이 중심이 되어 사찰을 보수하면서 기록한 사적기인데 범해梵海 각안覺岸의 후서가 붙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원효대사가 초창하여 관음사라 하고 그 뒤 헌강왕 원년(875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갈옥사葛屋寺라 하였고 조선 명종 10년(1555년) 을묘에 태감太甘대사가 4창하면서 무위사無爲寺로 고치고 비로전, 미타전, 영산전, 문수전 등 많은 전각과 당우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위사 사적’의 오류를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진평왕 39년 원효대사(617∼686년) 창건 설인데 이 해는 원효대사가 출생하던 때이며 월출산 일대는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억측에 가깝다. 더욱이 헌강왕 원년(875년)의 도선국사(827∼898) 중창 설은 도선국사가 역사적 실재 인물이다는 견해와 형미의 행적을 바탕으로 몇 사람의 행적을 보태어 꾸며 낸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이능화, 금서룡)이 있는 등 논란이 있으므로 이 또한 믿기 어렵다. 더구나 논리상 동리산문계통의 선승 도선이 중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효공왕 9년(905) 이후 가지산문 계통의 선승 선각대사 형미逈微가 주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도선과 형미의 시호가 다 같은 선각이었기 때문에 오는 오류로 해석된다.
왕건에 붙은 선각대사 형미를 한하며
무위사의 실질적인 창건주는 선각대사 형미로 보아야 한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는 유물이 없고 형미스님의 평광영탑비가 가장 빠른 시기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형미(864∼917)는 속성이 최씨이며 무주(광주) 출신이다. 15세 되던 해인878년에 가지산 보림사의 보조 체징에게 선법을 배우고 18세인 882년에 화엄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8세(891년)에 조공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雲居 도응의 법을 이어받고 42세(905년)에 귀국하여 무위사 주지가 되었다. 그 뒤 54세인 917년에 입적하였는데 중국에서 운거 문하에 려엄, 리엄, 경유와 함께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신라 출신의 승려이다.
무위사는 형미가 주석했던 10세기 이전에 이미 창건되었고 당시의 사찰 이름은 무위갑사였다. 그런데 ‘무위사 사적’ 946년에 무위사를 3창하고 절 이름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아마 짐작컨대 형미가 모옥이었던 무위갑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 되었든지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선각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고 가지 산문 소속 사찰로 불교사적 의의를 가진 사찰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선각대사 형미를 당시 훗날 고려 태조가 될 왕건이 무위갑사에 머물러 살도록 청하였다는 사실이 바로 편광영탑비문에 기록되어 있고 그 비눈의 머리 제목에도 무위갑사라 하고 있다. 형미가 왕건의 소청에 따라 무위갑사에 머무르면서 사찰을 중건하고 널리 교화를 펼쳐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반도가 후삼국으로 갈려서 혼란할 때에 귀국하여 왕건이 불교계의 지지를 얻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미화한 서술로 여겨진다. 형미는 가지 산문의 개산이 보조선사 체징의 제자로 당에 유학하여 운거 도선의 심임을 전해온 것으로 보아 조동종 사상을 초전한 선종 승려였다. 형미는 궁예에게 몰린 왕건을 비호하다 정개 4년인 917년에 도리어 궁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왕위에 오른 왕건이 형미의 죽음에 보답하고자 919년에 개성 오관산에 석탑을 세워 장사를 지내게 하고 선각대사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의 이름을 편광영탑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또 수호 사찰을 태안사라 이름하고 태상 최언위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개성 오관산의 태안사에서 비석이 세워지지 않고 27년이 지난 뒤에야 이곳 무위사에 세워지는지 의문이다.
고려 시대의 무위사 자취는 946년인 정종 1년에 세운 선각대사 탑비와 삼층석탑 외에는 고증할 만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조선시대 무위사는 천태종 사찰이다.
그런데 무위사는 조선 초기에 활발한 활동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태종 7년(1407) 12월에 각 처의 명찰로서 여러 주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위사의 사찰 성격의 변동은 고려 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근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는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불교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의 변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어졌다가 조선 초기에 사찰의 통, 폐합의 2차 정리 시기인 태종 7년(1407)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또한 무위사는 선덕 5년 곧 세종 12년(1430년)에 극락전이 만들어지고 그로부터 46년 뒤인 성종 7년(1476)에 극락전 벽화가 조성되었음을 ‘무위사 극락전 묵서명’이나 아미타 삼존도 벽화의 화가로 확인된다.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후불 벽화의 조성에는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 강진군 부인 조씨 그밖에 수십 명의 서민들이 시주를 했고 대선사 해련海建등이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것은 불화의 조성에 고려 시대에는 주로 귀족들이 발원 조성했던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양반은 물론 서민층에게까지 불사 참여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이지만, 불교가 여전히 기층사회에서는 열렬히 신앙되고 대중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아미타삼존도의 경우 건장하고 당당한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배치한 것은, 고려 후기이래 유행되었던 지장 신앙의 ‘무량수여래’라 적고 아미타 신앙의 핵심 가운데서 수명무량의 원을 강조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태호 선생님은 전남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황호균 선생님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