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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승단 위상(位相)확립을 위한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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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석지명 1990년 04월 98호
불교가 잘 되려면 승단이 잘 되어야 하고 승단이 잘 되려면 바른 승풍(僧風)이 확립되어야 한다. ‘바른 승풍’이란, 스님들이 수행을 위주로 해서 생활하고 아울러 그 수행과 세상에 이익을 주는 일에 차별을 않는 보살정신을 실천하는 자세와 기풍을 말한다. 승단에 흐르는 은둔도피주의, 무책임주의, 개인주의, 안일주의, 방랑자주의, 상식을 무시한 초월적 직관력에 대한 과신주의, 행동이 구두선을 따르지 못하는 추상적 이상주의 등은 깊은 걱정을 일깨운다.
이같은 현실의 승단분위기를 만들어낸 원인이 이조 500년동안 박해를 받아야만 했던 과거의 역사에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활짝 열린 마음,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눈을 가르친 옛 조사들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인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경허스님의 무애행 가운데에서 활짝 열린 마음을 배우지 못하고 막행막식하는 형태만을 흉내내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고, 달마조사의 不立文字의 가르침에서 문자를 뛰어넘는 직관의 수행자세를 배우기보다는 문자와 상식을 저버리고“무식한 사람이 용기 있다” 는 말을 실천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수행과 포교에 있어서 도피적이 아닌 전진적인 자세 그리고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불립문자, 돈오점수, 방하착 등의 말들이 나타내는 진정한 가르침을 터득해서 그 깨달음을 이 시대의 낮은 근기의 중생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짐짓 모양을 지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속의 중생들이 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청정한 승행을 보이는 자비를 아끼지 말아야 하리라.

1. 불립문자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이 필요 없지만 건너기 전에는 뗏목이 필요하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하는 데에서 소리의 언어가 주는 상징, 형상의 언어가 주는 상정, 문자가 주는 상징 등은 도움이 된다. 불립문자라는 말자체가 상징적인 언어요, 말과 생각을 끊은 자리를 나타내려고 하는 옛 선사들의 화두적인 기행 또한 바른 수행의 길을 가리키려고 하는 상징적인 언어이다. 불립문자를 외치던 대부분의 옛 선사들이 문자를 모르거나 문자를 이용하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단지 분별심의 산물인 고착개념들에 속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승단의 풍토는 승려들이 문자를 통해 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배우는 데 소홀한 편이다. 언어 또는 문자를 통한공부가 별것이 아니라는 관념이 전 승단에 만연되어 있어서, 먼저 배운 이가 선배가 되지도 못하고 존경받지도 못하게 된다. 이런 풍토에서 선배와 후배,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구별되지 않는 무질서의 혼돈이 있게 된다.
‘배움’이라는 말로 필자는 정부기관이나 사회에서 인정하는 가식적 학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승려가 꼭 알아야 할 기본적인 상식들을 말한다. 이 상식 속에는 불교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승단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고I 성직자가 일반인에게 어떻게 보여야 포교의 효과가 있게 되는가를 알려주는 지식도 포함된다. 승려들의 “몰상식”을 치료하지 못한 상태에서 승단의 고결화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

2. 수행과 깨달음 사이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즉 어떤 종류의 수행이건 자신이 처한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보리를 구하거나 중생을 위한 보살행을 담을 경우, 그 수행 자체가 바로 궁극적 이상의 전부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고 행하도록 해야

우리 교단의 승려들이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내는 치명적인 실수 하나는 수행과 깨달음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를 두어서 보조국사의 선을 일종의 대오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대오선적인 수행과 증득의 해석은 깨달음을 일종의 실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 염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수행하는 이들이 목표달성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이 없게 되면 방황하기가 쉽고, 또 깨달음을 증득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수행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 선사들이 흔히 말하는 번뇌와 지혜의 不二, 생사와 열반의 불이, 중생과 부처의 불이 등은 그 둘 사이에 어떤 시간적인 또는 공간적인 차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전제한 절대현전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성이 있다고 할 때 그 불성 안에 진리 자체, 진리를 깨닫는 수행, 진리를 깨달은 지혜의 하나하나가 시간 차이를 두고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있어야 한다. 여 세 가지의 동시적 상호전제나 예상은 혹, 업, 고 삼도가 동시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미혹과 악업과 고통이 동시적이듯 수행과 목표의 증득이 동시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수행이든 그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증득을 전제로 할 때에만 당시당처에서 상대적인 것들의 양변의 불이가 가능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등식이 아무런 시간적인 차이가 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보리를 구하는 수행=보살행=포교=지혜=성불

3. 요도된 방하작 제일주의로부터 벗어나
조사들이 방하착을 말할 때, 오욕락이든지 고착화 또는 실체화된 진리를 구하는 태도로부터의 초월을 말하는 것이지, 무책임하게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든지 얽매이기를 싫어하고 구름처럼 떠다닐 수 있는 자유를 보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많은 승려들이 “중이 처자가 있나, 상투가 있나, 죽은 후에 무덤이 있나…”를 자랑처럼 뇌까린다. 이 오도된 방하착 제일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낳고 이 개인주의는 철저히 무책임한 활량주의를 낳는다. 주위를 돌아보면 자신을 현실에 짐짓 얽어매어 보살의 원력을 성취하려는 이들보다는 활량으로서 즐기는 데 치중하는 이들이 더 많다. 이 방하착 제일주의 또는 활량적 개인주의로부터 승려들이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4.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우리가 공부하는 내용과 이상은 역사를 초월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는 분명히 역사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불교 교리가 우리 승려들에게는 초시간 초공간 적인 특수한 것이지만, 사회 전체로 볼 때 불교는 현실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안을 주는 종교의 하나일 뿐이다. 지금까지 일반인이 평범하게 기대하는 승려상과 우리가 그들에게 보인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일반 국민들은 승려들이 사뭇 신비스러운 사람들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길거리나 텔레비젼에 비친 승려의 행동거지는 전연 다른 것이었다. 승려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 고기를 먹는 모습, 술을 마시는 모습, 여자와 접촉하는 모습, 담배를 피우는 모습, 교양없이 처신하는 모습 등을 보며 일반인은 당황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반인들이 승려들에게 거는 기대가 모두 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거나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들 자신이 무명과 집착에 고통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도 저급하고 합당치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승려들은 그들을 일깨워 바른 기대를 가지게 해야하고, 또 그 기대에 부응하는 승려상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일반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승려들에게 기대할 것이다.
1) 승려들은 탈속해야 한다. 속인들보다는 욕심, 속기, 집착 등에서 벗어난 모습을 행주좌와에서 항시 보여야 한다.
2) 자기의 즐거움을 버릴 수 있고, 일반인들이 행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신심과 정력으로 기도, 절, 좌선 등을 할 때 일반인들은 감화를 받고 공경심을 발하여 귀의처를 찾게 된다.
3) 보살행을 지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익을 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설사 눈오는 밤에 깊은 산속을 훌로 걸어가더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발자국을 남김으로써 뒤에 이들이 마옴놓고 그 자취를 따를 수 있는 이익을 주어야 한다.
4) 멀리 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일반인들보다는 한 수 앞을 더 볼 수 있어야 한다. 일반인들이 돈이나 권력을 잡기 위해서 내는 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와 이익을 얻는 지혜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5)사람들의 고통과 기쁨을 찾고 그것들을 같이 나누는 모습을 지어야 한다. 세상과 지극히 가까이 있으면서 세인들과 같이 희로애락을 겪으면서도 마음 바닥이 동하지 않는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야 한다.
6) 신비성을 보여야 한다. 결코 인간적인 면과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적이면서도 일반인들이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이한 맛을 풍겨야 한다.
7) 청정해야 한다. 우리에겐 전통적으로 종교인에게 기대되는 금기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모든 계율을 다 지키지 못한다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청정을 지키고 보여야 한다.

5. 계율을 지켜야
현대 승려들에게 부과된 기본계율을 현실적으로 검토하여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킬 수 있게 고쳐야 한다. 상근기 뿐만 아니라 하근기도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현실에 맞게 정해진 계율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우리가 지금 당장 모든 계율을 꼭 지켜야만 하고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조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많은 승려들이 파계자나 위선자가 된다. 사람들이 더 중요시하는 것은 정해진 계율을 그대로 지키는지의 여부이다. 지키기 어려운 계목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지키겠다고 약속한 계율을 그대로 지키는 것을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6. 결사하는 심정으로 각자의 처소에서 수행과 포교를 옛날식의 결사라고 하면 같은 뜻을 가친 이들이 한 곳에 모여서 흩어지지 않고 일정한 기간동안 염불, 기도, 참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법은 전 종도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는 좋은 방법이긴 하나 전국의 승려가 다 동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결사 방법은 그대로 좋겠고, 형편이 그렇지 못한 이는 각자의 수도 포교 도량에서라도 수행과 포교가 둘이 아닌 수행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 세 스님이 결사를 했는데, 각기 시중에 뛰어들어서 보살행을 하면서 수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본을 따라서 우리도 각자가위치한 장소에서 품위있는 승단위상 확립을 위해 나름대로 공헌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