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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화 화합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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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혜능 1997년 11월 189호
계율이 불교에 있는 것은 국가에 법률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계율로 잡아매고 조복하지 않으면 불자의 타락과 승단의 부패는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다.
율장에 성문화된 모든 계는 비구들이 수행중에 일으킨 비법非法과 유루有遍에 대한 실제 기록이다. 율장에는 한 조항도 미리 설정해 놓은 계는 없다. 부처님은 이미 제정된 계율에는 만일 비구가 다시 범하는 일이 없으면 수정하지 않았으며, 미리 새로운 계를 세워 두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불교의 계율은 범부의 입법처럼 아무 때나 함부로 고치고 바꾸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부처님이 계율을 제정하신 까닭은 궁극적으로 수행자가 번뇌를 끊어 없애고, 열반에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로 말미암아 선정이 생기고, 선정으로 인하여 지혜가 생기게 된다. 이와같이 계, 정, 혜의 삼무루학三無遍學을 수행하여 탐, 진, 치 삼독을 소멸하고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부처님을 따라 배움을 원만하게 이루게 하기 위해 계율이 제정된 것이다.
계율을 제정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승단의 질서와 규율, 청정과 순결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계율은 번뇌의 악행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한 측면도 있지만, 그 밖에 사회인들의 승단에 대한 비난을 막기 위해서 제정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입장들을 율장에서는 십구의十句義(十利)라는 이름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렇게 제정된 율장의 교의敎義는 오직 지악止惡과 수선修善으로 열반을 성취하는 것에 있다. 이 지악과 수선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끊어 없애고 청정을 얻어 무량한 공덕을 기르고 깨달음의 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가 계율이 없는 생활을 하면 출가자일 수 없고 수행자일 수 없다. 승단이 계율 없이는 아무리 대승적인 정신으로 중생을 교화하려 할지라도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승단마저도 흩어 놓은 모래알과 같아서 질서도 없고 승가로서의 기풍도 없어 난장판을 이룰 것이다.
궁극적으로 수행자의 마음이 들뜨거나 고요(定)를 잃지 않도록 제지하며 청정과 고요를 유지해 가도록 하는 것이 수행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계율이다. 그런데 도리어 시대나 환경에 따라 계를 바꾸거나 고치게 되면 수행자가 상에 집착하여 청정과 고요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 수행자는 온전한 계가 없으므로 제지하는 것이 없게 되고, 제지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음의 고요한 평정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계라고 할 수도 없다.
또 율장에 전하는 것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입멸 직전에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무엇이 소소계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제 1결집에 참여한 아라현들의 견해가 저마다 달라서 정론이 세워지지 않았다 한다. 계율은 부처님이 제정하신 것이라는 데는 일체 계율 가운데 한가지도 예외의 것이 없으며, 이것은 더 이상 쟁론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제 1결집을 주재한 마하가섭 존자는 “약불선소부제若佛先所不制 금불응제今不應制 불선소제佛先所制 금불응각今不應却 응수불소제이학應隨佛所制而學”이라고 하는 원칙을 세우고 결집을 완성했다.
가섭존자의 본의는 소소계를 버리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제정하신 소소계 대신에 우리가 따로 함부로 제정하는 소소계를 방지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히면 우리가 범부의 지식으로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를 없애려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마하가섭의 이 제한 때문에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을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발심하여 부처님을 따라 배우려는 사람들이 바른 법法과 율律을 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비구가 사회의 변화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바일제법 이하의 소소계율을 버리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출가연의 근본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승가에서는 근본대계는 물론이고 바일제법 이하의 소위 소소계를 등한시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에서 승가의 화합이 깨어져 분열되고 위상이 흐려지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행동과 언행에서 승가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바로 재가인의 신시信施와 공경悲敬과 공양伊養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복전福田이 황폐하게 되고 나아가 불교의 근본 모습도 사라져 버려서 결국 승가가 사명邪命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진다. 만일 사명으로 살아가도 ‘불법의 이익’ 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일체 사명외도耶命外道의 법으로도 역시 성불할 수 있는 것이라서 굳이 불교를 신앙할 필요도 없고 부처님을 따라서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율은 승가 질서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고 승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율이 존재한다. 그런데 승가가 율을 지키지 않고 율을 함부로 뜯어 고치고 율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곧 승가가 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승가가 와해되고 기강이 무너지게 되면 불교의 참다운 수행자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곧 불교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부터 율을 지키는 것에 의해 불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율을 중요시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승가의 존재 이유는 오직 계율에 있고, 그 계율에 근거해서 성립된 승가는 디만 엄격한 지율持律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계율에 의해 성립된 승가가 그것을 지킬 것인지 말것인지를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승가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겠다는 본인의 반성 없이 무책임하게 거론하며 희론을 일삼는 것은 청정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중죄이므로 법대로 다스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분에 대해 냉엄하게 눈을 돌려봐야 한다. 우리의 존재 이유인 계율에 대해서도 피동적이고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본인의 수행을 위해서라도 능동적이고 긍정적이고 포용하는 적극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출가의 진정하고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고苦의 멸진滅盡에 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든 타인을 위해서든 출가 수행자는 반드시 자신과 타인의 청정과 광명과 적정寂靜을 확립하기 위해 힘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출가인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응연凝然이 「율종강요」에서 ‘여래가 제정하신 법法(계율)은 만 가지 경계에 통한다’고 하는 것도 계의 규범이 모든 때와 장소에 타당한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계율의 제도는 근본계든, 소소계든 부처님이 제자들을 소극적이거나 강제로 구속하고 억압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실로 불자가 해탈을 얻게 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고, 또한 계율은 승단의 방부제防腐劃와 같아서 승가를 청정하고 화합하게 장엄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율은 특정인의 전유물이거나 특정인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녀라, 칠중七聚의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그 신분의 분한分限에 따라 반드시 배우고 지켜야 할의무가 있다. 그것을 소홀히 하면서 출가 이전에 못했던 일들을 승단에 들어와서 하려고 하는 주객이 전도된 수행자는 가사와 발우를 바치고 돌아가야 한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