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스님을 찾는 기척에 도행스님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어서 오라 한다. 검은 고무신에 봄볕 같은 능청한 표정으로 스님은 자신이 오히려 손님처럼 낯설어 한다. 도행스님은 키가 자그마하다. 어눌하게 내려앉은 스님의 눈빛은 크게 동요하는 법이 없다. 늘 느릿한 몸짓에 같은 모습으로 조근조근 말씀을 담아 낸다. 어찌 보면 조는 듯도 싶고 달리 보면 무념 무상이 빚어내는 일상의 한 모습인 듯도 싶다.
스님은 우리를 먼저 법당으로 안내하였다. 중앙에는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우측에는 단군 탱화가 모셔져 있다. 스님은 이곳 심원사의 특징이 단군을 모시는 것이라 설명하신다. “우리의 뿌리를 외면하면 이 나라의 진정한 종교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스승이고 단군은 우리 민족의 어버이니 두분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좀더 지혜롭고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스님의 가사에 개긴 ‘법상도’가 눈에 들어온다.
스님의 종교관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둥근원 아래 곧은 선 하나가 가로로 누어 있고 ‘불’자를 길게 늘어뜨려 일직선을 그리고 있다. 사실 스님의 말씀에 공감은 하면서도 조금은 낯설고 어색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단군을 모시는 것이 왜 이렇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 부모, 내 조상을 모시는 일인데. 멀 속이 잠시 뒤숭숭하다.
조금 작은 스님의 방에서 우리는 비로소 스님과 마주 앉게 되었다. 열어 놓은 방문으로 따뜻한 햇살이 넘칠 듯이 바람에 딸려 안겨들었다. 스님은 작년에 꽁꽁 얼려 두었던 감을 썩뚝썩뚝 썰어 내오시며 “이거 아이스크림 이예요”한다. 웃음 띤 얼굴이다. 별미라고 해야 할 맛이다. 얼었던 감이 입안에서 녹녹해지면서 내는 감의 달큰한 맛이 자꾸 손길을 잡아끈다.
이곳 함양이 도행스님의 고향이란다. 이곳에서 시작한 스님의 삶은 사실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석 달 동안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줄초상이 나더군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도 인연 없는 일인지 결국 헤어지게 되었어요. 갑자기 세상에 대한 회의가 짙어지더군요. 사상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도선사로 출가하여 청담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모시고 공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른에 시작한 출가자의 삶은 고아들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다시 한번 파경(?)을 맞게 되었다 한다.
“그 무렵 도선사에는 불사가 한창 있던 때입니다. 우연히 도선사 주변을 배회하면서 지내는 고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고아원이 싫어서 도망은 나왔지만 막상 갈 곳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루 이틀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죠. 그러자 아이들은 늘어나고 그들은 그곳을 결코 떠나려 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문제가 되었지요. 어느 날 은사스님은 승복을 입고 사문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고아들을 거두어들이는 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하시더군요. 결국 고아들을 데리고 산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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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과 속에서 두 번 다 실패를 맛본 셈이다. 스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질펀한 속세의 다툼 안에서 지쳐 가는 모습이었을 듯싶다. 스님은 고아들을 키우며 \'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체험하였다 한다. “그들은 옷을 깨끗이 빨아 입혀도 일부러 땅 위를 떼구르르 굴러 더럽게 해서 입었습니다. 그들의 ‘습’이랄 까요. ‘업’이랄까 어쨌든 그들의 삶을 바꾼다는 것에 대한 제 자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고아들을 지난 날 인연 맺었던 부인의 도움으로 함께 여섯 해쯤 보살펴 왔지만 결국 이것도 평탄치 않아 모두 해산시켜 버리고 다시 승복을 입고 수행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재 출가를 하신 것이다. 비록 잠시 승복을 벗었다 하나 스님의 마음은 결코 승복을 벗은 적이 없었단다. 좋고 맛난 것을 찾으려는 환속이 아니었으니 스님의 말씀대로 언제나 출가 자로서 삶에 임했을 것이다.
그 뒤 백강스님으로부터 단군 사상을 처음 접하였다 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왜 남의 사상과 제도에 의해 종속적인 삶을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 하더란다. “고아들이 저의 스승입니다. 그들과의 경험이 제 생활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든 사람이 고아인 셈입니다. 제 조상, 뿌리를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가 고아이지 뭡니까.”
스님은 이 민족 자결 시대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깨달아 최초의 문화민족 시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군신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단다. “단군신화는 실존실화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서양의 조상 아브라함과 예수에 대한 신화를 믿으면서 우리의 신화는 미신 취급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단군 국조의 홍익사상은 가장 우리 것이면서도 세계적일 수 있는 대동의 사상입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서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뼈아픈 굴욕감을 느껴야만 합니다. 단기라는 것이 있는데 왜 우리가 서양 역사를 좇아 오늘을 가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 아무런 지각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책임한 일인지 싶은 생각이 든다. 단기든 서기든 우리 자신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에 무관심으로 일관해 온 것이 사실이다. 뿌리 사상을 단절시켜 놓고서 무슨 남북통일 운운하느냐는 스님의 매서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귀뿌리에 맴돈다.
종교 분쟁은 사실 가장 아이러니한 느낌을 주는 싸움이다. 자신의 종교를 위해 다른 사람의 사상과 종교를 잠식시키려는 죽음을 불사한 투쟁이기에 더 서글프다. 도행스님은 오늘날 현대의 종교는 포용적이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고 지적하신다.
“우리는 하나가 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종교는 인류 구원 차원이지 예속성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이 홍익사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 모두를 염려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옆 사람이 아프다면, 가난으로 힘에 겨워한다면 우리 스스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복되게 살아가는 것이 최우선의 바람 아닙니까. 저는 이러한 단군 사상을 불교와 접맥시키고 있습니다.“ “강물에 부모와 스승이 빠져 있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먼저 구하겠습니까?” 스님이 던진 질문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외면하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 그리고 광대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두가 수승하고 진정 의미 있는 것이지만 뿌리 의식이 결여된 상태로는 우리말을 잃은 노예 불교 밖에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절마다 ‘산신각’에 산신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산신이 단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님은 단군 사상이 우리 민족 불교에 그리 낯설 까닭이 없음을 설명한다.
교과서에 잠시 잠깐 배우고 넘어가는 우리의 국조를 우리들은 얼마만큼 신뢰하고 가슴에 담아 보았던가, 반성해야 할 일이지 싶다. 스님은 이러한 스님의 사상을 ‘한 불교’라고 칭한다. 분쟁 없이 서로를 포용하여 ‘하나로 몰아가야’하기 때문이란다.
스님을 도와주고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의 손길이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도행스님은 조금은 초조함이나 게으름도 허용하지 않는다. 두 권의 책을 출판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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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등불’이라는 사면지의 포교지도 낸다. 물론 스님의 책과 포교지 좌측 상단에 날짜를 단기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우측 상단에 불기 표시도 잊지 않고 해 놓고 있다. 느릿한 말투에 어눌한 눈빛으로 얘기하는 스님을 보면 어디서 이러한 힘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스님의 일상 가운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일요일만 빼고 날마다 탁발을 나간다는 점이다. 발 닿는 대로 여기저기 탁발을 다닌다.
“고아 아이들 기를 때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탁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포교를 합니다. 단군 이야기도 하고 부처님 말씀도 하면 사람들이 물어봐요. ‘당신 진짜 중이요?’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저도 ‘당신은 진자 신도입니까?’하고 되묻지요.” 스님의 말끝 따라 일제히 웃음이 인다.
때로 길이나 집에서 만나게 되는 탁발스님을 보면서 솔직히 가슴 저 안에서 한번쯤 일었던 질문이다. ‘진짜 신도인가?’하고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행스님은 보여주고 또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것이 많은 듯 바쁘다. 법당 뒤쪽에 단군 국조를 모신 정각이 흔적을 찾기도 어려울 만큼 무너져 있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옆 작은 방에 모셨다며 우리 일행을 안내한다. 단군 화상을 밖으로 내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스님은 영 내키지 않은 듯 우리와 단군 화상을 번갈아 보며 한참 망설인다. 결국 우리의 부탁에 응해 주었지만 스님은 “이거 죄송해서”하며 단군 화상을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사진기를 바라본다.
햇살에 감이 더 많이 영글었을 듯 싶다. 돌아가야 할 길이 바빠 서둘러 나서자 스님은 “제 얘기만 했습니다.”하며 억울(?)하신 듯 우리의 이름을 차근차근 되묻는다. 10월 개천절에 있을 단군 제에 꼭 오라며 스님은 아쉬움을 다진다.
때로 스님은 마이크로 동네 사람들에게 법문을 하기도 한다. 상상도 안 될 만큼 정겹고 엉뚱한 발상 같아 우리는 웃음을 베어 물며 좁은 발길을 걸어 나왔다. 곧 연시가 후둑 떨어지고 빨갛게 익어 가는 대추도 동네 녀석들의 손길에 오래지 않아 빈 나무가 될 것이다.
“자연법이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학문과 기술은 따라 앞설 수 있지만 자연은 앞설 수 없습니다. 속임이나 편법이 없지요.” 스님의 말씀이다.
차가운 바람결에 곧 우리는 늦가을에서 겨울로 다가서게 되리라. 단기 4326년에서 4327년으로. 우리 일행의 차가 떠나고 있는데 스님은 늘 상의 내려앉은 눈빛에 무언無言의 말씀을 담고 서 있다. 햇살 아래 잠에 겨운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