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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서 조계종 종헌 1조를 조계종 종조는 태고국사로 한다고 분명하게 개정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하신 뒤 한국불교의 법맥이라는 이름으로 천제스님께서 정리하여 1976년에 법보시판으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뒤로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과 반론이 있었는데 그 뒤 큰스님께서 다시 추가하여 1990년 12월에 증보판을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선문에 드시어 “선종의 전통사상 특히 임제종의 종풍은 돈오돈수사상에 있다. 한국의 선가에서 선풍을 드날리는 인재가 배출되지 않음은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보조스님의 수심결사상에 제방의 수좌들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확철한 견성인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종의 정통 종지가 돈오돈수에 있음을 자각하여 용맹 정진하여 확철한 수행인 이 배출되어야 한다”고 오십여 년에 걸쳐서 사자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보조국사의 사상에 물든 조계종 가풍은 하루아침에 큰스님의 사상을 따를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오늘까지도 갑론을박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1981년에「선문정로」를 직접 저술하셔서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 뒤 송광사에서 보조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근년까지 4차에 걸쳐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3,4차는 큰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을 겨냥하고 많은 비판들을 하였지만 큰스님께서 선문정로에서 밝히신 선종정통 사상론과 보조스님의 사상 발전에 대한 큰스님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논문은 없는 듯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오히려 “내가 더 보조사상을 정립한 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1967년 가을 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신 뒤 대중 스님네들이 불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시고 백 일 가까이 하루 한 시간 또는 두 시간씩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제방에 백일법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 시자로 있던 천제스님께서 녹음을 해 두셨는데 카세트 테이프로 칠십여 개 가까이 되었습니다. 뒷방에 있으면서 이런 세월 속에서 저 자신 상기 병으로 좌선도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 테이프를 듣게 되고, 듣는 것은 그 때뿐 곧 잊어버리게 되어서 어느 날 ‘이 녹음을 한번 풀어 보자. 글로 되면 훨씬 이해가 쉽지 않겠나’하는 생각에서 시간 나는 대로 하나 둘 녹음 테이프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스님께서 “맨 날 뒷방에서 뭣하고 있나?” 하시면서 방문을 열어 보시고는 “그건 뭐꼬” 하시길래 “큰스님께서 법문 하신 상당법문을 노트에 풀어 보고 있습니다.” “니가 뭘 안다고 상당법문을 듣고 있노” 하시면서 “그럼 정리해서 한번 가져 와봐라”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정리하여 ‘바리 대를 들고’, ‘꽃을 드니 미소‘, ’뜰 앞의 잣나무‘등을 큰스님께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그래, 누가 이렇게 번역했나? 세상에 이것도 글이라고 가져왔나” 하시면서 원고 뭉치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치셨습니다. 저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얼마나 무안한지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큰스님께서 또 원고를 정리해 오라는 말씀이 계셔서 정리해 올렸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기를 세 번이나 하여 야단만 맞았습니다.
하루는 큰스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암만 해도 안 되겠다. 내가 구술해 줄 터이니 그대로 옮겨 써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정리해 주신 노트를 가지고 새벽 예불이 끝난 뒤 3시 30분부터 5시까지 날마다 구술해 주셨습니다. 큰스님 앞이었지만 예불을 마친 새벽이므로 졸리기 마련이었습니다. 한참 구술해 주시는 가운데 어떤 때는 제가 깜박 졸았나 봅니다. 그 때마다 불호령이 떨어지고 꿀밤도 맞고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한 달이 넘어 걸려 구술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직역해 주신 글로서는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큰스님의 구술만으로는 너무 난해한 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글대장경으로 염송과 전등록이 그 때 마침 출간되어 있어서 그 책들을 참고하여 녹음도 참고하여 구술을 기본으로 하여 윤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일암 법정스님께 다시 한번 윤문을 부탁하여 오늘의「본지풍광」이라는 책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고생 괘나 한 출간이었습니다.
그런 세월 속에서 송광사 구산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49재를 마치고 주지 현호스님과 서울로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주지스님 큰스님께서 열반하시니 큰스님을 위해서 무엇이 가장 아쉽게 느껴지십니까? 저에게도 앞으로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첫째는 큰스님 생전에 어록을 다 내지 못한 것이 제일 후회 스럽고, 둘째는 큰스님 계실 때 마음껏 정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하는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현호스님의 얘기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이 백일법문 테이프를 정리하여 큰스님 생전에 어록을 완간 하여야겠다고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 뒤로 백일법문 테이프를 계속 풀어 나갔습니다. 선에 관한 것부터 정리하여「신심명·증도가 강설」,「돈오입도요문론 강설」이라 제목 하여 1986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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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출간함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제 감상은 완벽을 기하고자 하다가 한 줄도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이 법문 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만 오히려 큰스님께 더 없는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을는지 두려운 마음뿐이었습니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1987년 봄에「선림고경총서」를 간행하기 위해서 문도 들로 ‘백련선서간행회’가 만들어지고 그 첫 사업으로「자기를 바로 봅시다」가 1987년 6월에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전국 선방스님들의 모임이었던 선림회에서 해제 기간 중에 며칠 동안이라도 한자리에 모여 선종 종지에 대해서 특강을 열어서 공부하는 선방스님들에게 정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1987년 봄에 해인사에서 선림회 수련회를 개최케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손수「육조단경 지침」을 저술하시어 강의해 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 그 동안 육조단경에 대해서 남다르게 연구해 오셨는데 덕이 본이 아닌 돈황본 육조단경을 펴내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가지시고 현토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82년 봄에「돈황본 육조단경」이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1988년 7월에「영원한 자유」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책 내용은 1968년 전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하기 수련대회가 해인사에서 개최되어 큰스님께서 ‘불교의 현대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하루 두 시간씩 일 주일 동안 설법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1980년 하안거와 동안거 동안에 인과에 대한 확실한 신심을 갖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하여 보름에 한 번씩 윤회법문을 하셨습니다. 이 두 법문을 기둥으로 삼아 정리한 책입니다. 그리고 부록으로 이언 스티븐슨의 ‘윤회의 20가지 사례’와 부록샴의 ‘한 번 이상 사는가?’를 첨가하여 윤회설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였습니다.
한편 백일법문 테이프를 풀어서 원고를 정리하면서 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원시경전을 비롯하여 중론, 유식 30송, 화엄경, 천태 사상, 열반경 등등의 경들을 종횡 무진하게 인용하시면서 법문 하신 교학의 원고를 정리해 좋고 보니 무언가 미진하여 책으로 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1978년 전후로 기억됩니다. 묵혀 두고 있다가 원영스님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니 자연히 원고를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대학원 주변의 원생들에게 정리를 맡기고 몇몇 교수님들에게 원고를 검토 받고 하여 어렵게 나온 것이 1992년 4월에 출간된「백일법문 상, 하」두 권이었습니다. 정말 십 오 년 가량 걸려 나온 책입니다. 큰스님의 중도에 입각한 교학적 정리인데 시자들이 큰스님의 학문의 영역을 따라가지 못하니 힘만 들고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을 못내 큰 것이었습니다.
어느 때 큰스님께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으로써 선禪과 교敎를 하나로 꿰어서 불교를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하시는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백일법문이 정리되어 출판되기까지 거의 이십 오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십 오 년 전 그 때 책이 되었더라면 큰스님께서 더욱 첨삭하셔서 참으로 좋은 책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막상 책을 내놓고 보니 쉬운 책이 아니라 대학원 교재로나 쓰일 만한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주석을 새로이 하여 더 쉽게 읽히는 책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나는「선문정로」와「본지풍광」이 두 권의 책으로써 부처님께 밥값 하였다”고 말씀할 만큼「선문정로」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셨습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선 서적이어서 상당한 주석 없이는 쉽게 읽힐 수 있는 내용의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평석을 줄여서 선을 수행하려는 분들에게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인연이 없어 주석 서를 발간하지 못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래도 그 스님의 뜻인「선문정로」를 쉽게 읽히기 위해서 생각 끝에 원융스님께서 한글로 더 쉽게 풀어쓰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석을 붙이지 못하고 1992년에「선문정로 주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간함으로써 성철스님 법어집 11권으로서 출간의 대단원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 법어 집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고 또 다른 책을 발간할 수 있는 인연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선림고경총서 완간에 따른 뒷이야기
1984년 가을 한국불교학회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세미나에 참석하고서 저는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큰스님께서 그렇게 선종정통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을 연구하는 분들은 이렇게 많은데 돈오돈수사상을 연구하는 분들은 아무도 없는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자신 해인사 산골짜기에서 큰스님 법문만 듣고 살아왔기 때문에 큰스님 말씀이 세상에 다 알려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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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으로 돌아와서 큰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큰일 났습니다. 큰스님께서 젊어서 일찍이 견처를 여신 뒤로부터 오늘까지 오십여 년 동안 선종의 정통 종지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목 아프게 설파하셨지만 학자들은 누구 하나 동조하지 아니하고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만이 한국불교 학계를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러다가는 큰스님께서 떠나시고 나면 선종의 근본사상은 돈오돈수라고 하신 말씀은 빈 골짜기에 메아리라도 남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헛수고만 하시고 마실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야, 이놈아! 너희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너희들이 부지런히 정진하면 될 것 아니냐?”고 호통을 내리셨습니다.
“큰스님, 사람을 키워 스님의 사상을 올바르게 전파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동안 역대 조사 큰스님네 들의 어록 가운데서 큰스님께서 주장하시는 돈오돈수의 선종정통종지를 천양할 수 있는 어록들을 번역하면, 큰스님께서도 외롭지 아니하시고, 역사적으로도 큰스님의 주장이 헛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고, 후학들이 선의 바른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곡절 끝에 큰스님께서 오가 칠종 개조의 어록과 선종 10부록 등 30여 권이 넘는 어록의 이름을 적어 주시고 그 전집의 이름을「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라고 적어 주셨습니다.
막상 일에 착수하려니 역경 하실 분과 자금이 문제였습니다. 자금은 법보시 회원을 모집하여 해결하기로 하고 먼저 역경에 착수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송찬우 거사를 만나게 되고 1985년 가을에 본격적인 역경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일 처음 번역을 부탁드린 것이「벽암록」이었습니다. 이어「원오심요」「선림보훈집」「산방야화」「동어서화」등이 그 분의 손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분이 그 많은 책들을 번역한다는 것이 벅찬 일로 여겨서 이창섭 선생님께 선종 10부록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의 원영스님께 원고의 윤문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월운스님의 불경학당에 다니는 신규탁 씨와 이인혜 씨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윤문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삼 년만에「산방야화」「동어서화」「치문숭행록」「참선경어」「선림보훈」등이 차례로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렵거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윤문팀들이 곧잘 월운스님을 찾아 뵙고 괴로움을 끼쳐드렸습니다. 선림고경총서 제 1권「선림보전」이 2권「산방야화」보다 몇 개월 늦게 나오게 된 것은 원고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선종의 기본이 되는 가장 정통적인 선사상을 담고 있는 육조단경, 돈오입도요문론, 황벽전심법요와 완등록 그리고 신심명 증도가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임간록」「나호야록」「총림성사」「인천보감」「운와기담」「고애만록」「산암잡록」이 선종 7부록이라 불리는데 여기에「오가정종찬」「종문무고」「임제록」을 합쳐서 선종 10부록이라 말합니다. 이 10부록의 윤문에 전주의 호남연구소의 박완식 씨가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불로 일컬어지는 조주, 설봉, 현사스님의 어록과 더불어 임제, 운문, 동산과 조산, 위산과 영우, 법안, 양기, 황룡스님의 5가 7종 어록이 번역되었습니다. 「종용록」은 내용도 방대하고 양도 많아 망설이다가 봉선사로 월운스님을 찾아 뵙고 역경을 부탁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시다가 마침내 승낙해 주셨습니다.
“종용록을 좋아했기에 역경을 공연히 승낙했다가 너무 고생했다”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월운스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 생각에는 벽암록을 선림고경총서 1,2,3권으로 내려고 했는데 벽암록에 대한 기대가 제방의 스님께서 너무 크신 것 같아 자연 윤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뒤 신규탁 씨에게 윤문을 부탁하였는데 동경대학교로 유학을 가시게 되고 지도교수께서도 마침 이와나미 출판사의 의뢰로 벽암록을 번역하시는 기연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교토로 入矢義高 선생님께 드나들며 어록 공부를 쌓아 가면서 벽암록 윤문을 완성하여 선림고경총서 35, 36, 37권으로 출판하여 선림고경총서 완간을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이 모든 역경들이 길고 힘든 일이었습니다만 오늘 완간의 기쁨을 갖게 되니 그 동안 관심을 가져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는 마음뿐입니다.
제가 큰스님 기대대로 참선을 하지 못하면서 웬 글 농사를 짓게 되었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큰스님 말씀대로 “중은 논두렁을 베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그 정신이나마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야겠습니다.
원택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하였다. 주로 백련암에서 정진을 하였고 지금은 해인사 총무 소임과 종회의원을 역임하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을 만들어 역경과 불교학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