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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무서운 청빈 정신을 실천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그 무렵 많은 성직자들과 존경을 받던 귀족들은 도대체 이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수도원 개혁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그녀를 질타하였다. 이 혼란한 시대에 수도원이 스스로 외부와의 문을 단절하고 평생을 수도원에 갇혀서 밤낮 기도만 하는 관상생활이 이 사회에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기득권을 가졌던 모든 종교 집단의 질문이었다. 이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전쟁터에서는 적과 싸우는 병사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터에서는 비록 칼과 총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도 필요한 법입니다. 기수는 비록 싸우지는 않지만 깃발을 들고 있으므로 모든 병사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과 승리를 약속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수는 오히려 병사들보다 부상을 입거나 상처를 입어도 쓰러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쓰러지면 깃발도 함께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수는 적(악마)으로부터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적들은 기수를 쓰러뜨림으로써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수를 공격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들 수도자들은 전쟁터의 기수와 같은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은 오늘날의 모든 수도자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구도자들은 처음부터 영예로운 전사의 길을 포기한 사람들 아닌가. 적을 이기고 승리함으로써 개선 장군이 되면 몸에는 훈장과 승리의 갑옷을 입는 그 세속의 영광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이 아닌가. 수도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보상도 없고 오직 적으로부터 표적이 되는, 그러면서도 가장 앞서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깃발을 세워 든 기수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 아닌가.
이러할 때 나는 불교인들이 좀더 깊은 청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불교의 교세를 더욱 확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의 교화시키기보다는 스스로를 더 많이 교화시키는 불교인이 점점 늘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남을 성불시키기보다는 스스로를 성불시키고 도시의 한복판에 불사를 하여서 법당을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에 더 청정한 법당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불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구도의 길이 아닐 것인가.
깊은 산 속에서 피어 있는 매화라 할지라도 그 향기는 산기슭에서도 맡을 수 있으며 매화의 향기는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향기를 숨기려고 할수록 매화의 향기는 온 산에 흘러 넘칠 것이다.
일찍이 경허선사가 승려로서의 마지막 시절 애제자인 한암漢巖과 함께 범어사를 떠나서 해인사로 가는 길 도중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짓는다.
안다는 것 얕은 소견 이름만 높아가고
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기만 하구나
모를 일이여 어느 곳에 가히 몸을 감출 것인가
어촌이나 술자리 그 어느 곳에 처소가 없을까마는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더욱 새로워질까
다만 그를 두려워 하노라
경허의 시는 하나의 구경究竟이다.
진실로 그가 덕이 있다면 이름을 감추려 할수록 그 이름은 더욱 새로워질 것이다. 잊혀짐을 두려워해서 이름을 내보인다 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허의 시처럼 도에 들수록 잊혀지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숨기면 숨길수록 숨겨지지 않는다. 버리면 버릴수록 버려지지 않는다.
아빌라의 테레사와 더불어 남자 개혁 수도원의 창립자였던 뛰어난 영성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모든 것을 얻기에 이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되기에 이르려면
모든 것이 되려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알기에 이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마라
맛보지 못한 것에 이르려면
맛없는 그 곳을 거쳐서 가라
모르는 그 곳에 이르려면
모르는 그 곳을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곳에 이르려면
가지지 않은 곳을 거쳐서 가라
그대 있지 않은 곳에 이르려면
그대 있지 않은 곳을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는 곳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곳에도 발을 멈추지 마라
나는 오늘을 사는 우리 불교인들이 더 깊은 청산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의 불교인들이 더 가난한 맨발의 수도자이기를 바라며 나는 우리의 불교인들이 빈손의 수도자이기를 바란다. 더 서슬이 푸른 수도자가 되어서 매일매일 뾰족이 깍은 연필의 촉처럼 정신의 촉이 날카로워지기를 바란다. 가장 뾰족이 깎은 연필만이 가장 가는 선을 그을 수 있으며 가장 날카롭게 칼날을 간 취모검이야말로 먼지라도 끊을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최인호 선생님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단편「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문단에 나왔다. 대표작으로「바보들의 행진」「도시의 사냥꾼」「지구인」등 다수가 있으며「깊고 푸른 밤」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최근작으로「잃어버린 왕국」「길 없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