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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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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김종성 1989년 09월 91호
월전사에서 부서져온 종소리가 박돌이의 청각을 일으켜세웠다. 박돌이는 눈을 떴다. 만원홍(滿園紅)의 비수처럼 차가운 얼굴이 창문에 걸려 있었다. 박돌이는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만원홍의 흰 얼굴은 허공으로 달아나고 없었다.
‘도대체 글줄이나 읽고 돈푼이냐 있는 놈들은 한번씩 다 안아 봤다는 만원홍을 나는 왜 만나볼 수조차 없단 말인가.’
박돌이는 다시 요 위에 쓰러졌다. 몸을 뒤채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몸 아래쪽에서 싱싱한 가물치가 파닥거렸다. 그때마다 김진사와 만원홍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졌다.
“박돌이 아직 안 일어났느냐. 어서 소꼴 좀 베어와야지.”
주인영감의 굵은 목소리가 문풍지를 건드렸다.
박돌이는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다. 멀리 형제봉 밑 김진사 집의 기왓골 위로 햇살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박돌이, 같이 가자.”
붙들이가 쫓아왔다.
박돌이와 붙들이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미륵바위 위로 햇살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오늘 미륵보살님의 미소가 더 환하다.”
붙들이가 말했다.
“정말 그래.”
박돌이가 미륵보살의 인중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내며 대꾸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붙들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뭐가?”
“네가 미륵보살님을 발견한 게…”
붙들이가 미륵보살외 코를 어루만졌다.
“돌더미에 묻혀 있는 미륵보살을 내가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어. 새가 한 마리 깃털을 펄럭이고 있기에 쫓아가 잡으려다가 돌더미에 걸려 자빠졌었는데… 무너진 돌더미 틈에서 미륵보살님을 발견한 거지.”
“아뭏든, 박돌이, 넌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김진사 집의 기왓골이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거렸다.
“박돌아, 이상한 소문 못 들었니?”
붙들이가 커다란 바위 밑에 지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뭔데?”
박돌이가 다그치듯 물었다.
“허어, 성질 하나 되게 급하네.”
붙들이가 낫으로 꼴을 베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 봐.”
박돌이가 낫질을 멈추었다.
“만원홍이가 학질에 걸려 앓고 있대. 서너 달이 지났는데도 백약이 무효라지 뭔가.”
붙들이가 말을 끝내고 허리를 세웠다.
박둘이의 눈에서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불씨는 참나무 숯불처럼 이글거렸다.
“…박돌아,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해. 만원홍이가 어디 우리 같은 것들은 거들떠보기나 하겠니?”
붙들이가 낫질을 계속했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집들을 봐. 대궐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놈들이 온갖 좋다는 건 다 구해다 쳐먹고선 손녀딸 같은 만원홍을 매일 안아보고…”
박돌이가 잠시 말을 끊었다.
“예나 이제나 젊고 예쁜 계집은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 노리개가 아녀.”
붙들이가 지게를 세우며 말했다.
“아냐, 똥개는 똥개끼리 궁합을 맞춰야 하는 거여. 만원홍이도 따지고 보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여.”
박돌이가 지게를 지고 일어서며 말했다.
박돌이는 집으로 돌아오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뒤, 거리를 쏘다녔다. 그러면서 자기는 비록 배운 기술은 없으나 학질 떼는 기술은 최고라고 사람들의 귀에다 밀어넣고 다녔다.
마침내 그 소문이 만원홍의 귀에 들어갔다.
“박돌아, 누가 찾아왔다.”
깨돌이의 말에 박돌이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셨다. 만원홍이 보낸 소년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바쁘고 하니 내일 일찍 내가 찾아가겠다.”
박돌이가 말했다.
날이 밝자, 박돌이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수중막골로 향했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뜸했다.
만원홍의 집 추녀가 보였다. 박돌이는 점잖은 걸음으로 돌담을 돌아갔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만원홍의 동생이 버선발로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제발 우리 언니 좀 살려 주세요.”
만원홍의 동생이 박돌이의 팔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박돌이는 만원홍이 누워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 만원홍의 하얀 얼굴이 박돌이의 망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박돌이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윽고 박돌이가 천천히 입을 뗐다.
“만일 그대가 내 말을 좇지 않으면 그대는 영원히 학질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박돌이가 위엄을 부리며 말했다.
“병만 고쳐 준다면야 무슨 짓이든 못하겠어요.”
만원홍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소리를 희미하게 게워냈다.
“그렇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는가?”
박돌이가 말끝을 높였다.
“하다말다요.”
만원홍이 다급하게 말했다.
“내일 꼭두새벽에 서너 너덧 자가 실히 되는 대막대기를 구하여 그 양쪽 구멍에 굵은 밧줄 한 자씩을 얽어 매어 가지고, 이 뒷골 성황당 앞에서 나를 기다려라. 그러면 내 의심없이 학질을 떼어 주리라.”
박돌이가 말을 끝냈다.
“시키는 대로 꼭 그대로 하겠어요.”
만원홍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튿날, 박돌이는 새벽 안개를 밟고 성황당으로 갔다. 과연 만원홍이 대다대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왔군요.”
박돌이가 대막대기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학질달 고치려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요.”
만원홍이 배시서 웃으며 말했다.
“먼저, 대막대기를 땅 위에다 놓으세요. 대막대기를 목침으로 하여 반듯하게 드러둡고 눈 감으세요.”
박돌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원홍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다대기에 머리를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박돌이는 튼튼한 밧줄로 만원홍의 두 팔과 손을 꽁꽁 묶었다.
“지금부터 이열치열 치료를 시작합니다. 꼼짝 말고 누워 있으세요.”
박돌이가 만원홍의 봉긋한 젖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박돌이의 혀끝이 인두가 되어 만원홍을 지져대기 시작했다. 만원홍이 신음을 발했다. 그때 박돌이는 종소리를 들었다. 월전사에서 부서져오는 소리였다.
미륵보살의 웃음소리가 종소리 속으로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