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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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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89년 09월 91호
도를 깨닫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무심(無心)하기가 어렵다. 마음을 비우기가 어렵다. 도(道), 도가 뭐 별것이겠는가. 그저 모든 이가 걸어가는 길일 뿐이다. 그러나 ‘도’하면 매우 고차원적인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거리가 멀어 우리의 손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그 어떤 심오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도는 그런 데에만 골라서 자리하지는 않는다. 도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존재한다. 아니 우리들 일상생활 그 자체가 도다. 일상생활 그 자체를 통하여 인생은 살아가고 있고 걸어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진실로 도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너무 쉽다. 도 닦기가 너무 쉽다. 도를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면 도는 찾아져야 할 대상만도 아니요 찾고 있는 주체반도 아닌 온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자. 도는 정말 그처럼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말로 떡을 하면 조선팔도가 먹고도 가래 반이 남는다”고 하지 않던가. 말로야 천하 쉽다. 그저 입만 벌리면 도가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한다. 인생은 이런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처럼 도니, 진리니, 인생이니 하는 것들을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가 있을까? 비록 우리네의 일상생활 그 자체에 도가 있고, 그것이 진리이고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절대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을 천일기도를 통하여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이라 한 것은 확철대오하여 성불한다고 하는 그런 깨달음은 물론 아니다. 뭐든지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안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천일(千日)이란 매우 짧은 것 같지만 그 기간을 열심히 정진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이만사천 시간이다. 이만사천 시간이면 외국어 이십 개를 달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적어도 일천이백 시간이면 어떠한 어려운 외국어도 거의 그 나라 사람만큼 해나갈 수가 있다는 게 인어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머리가 좀 둔한 사람도 한 나라의 국어에 적어도 일천이백 시간 정도만 투자한다면 매우 유창하게 그 나라의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86년 12월 2일부터 89년 8월 27일까지 천 일 동안 용맹정진기도를 봉행하였다. 햇수로는 사년 동안 이어졌으며 만 삼년이라는 기간이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까짓 천 일쯤이야’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혀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갖가지 부조화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른바 마장(魔障)이다. 마장은 언제고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틈만 있으면 여지없이 침략을 감행한다. 그런데 ‘마음에 틈이 없게’라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 필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틈 없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천 일을 하루같이, 그리고 솔직히 얘기해서 단 한 시간도 기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떠나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부질없는 생각들은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것이었다. 부질없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선종의 제 3조이신 승찬 큰스님은 ‘간택(揀擇)’이라 하였다. 그의 저작「신심명(信心銘)」제 1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취사선택,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취사선택만 없으면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으며, 마음에 틈이 없으면 번뇌의 마장이 침략해 들어오지 못한다.
당대(唐代)의 고승 강서마조(江西馬祖) 문하에 대달국사(大達國師)인 분주무업선사(冷州無業禪師)가 있었다. 760년에 태어나 821년에 입적하여 육십이세를 살다간 큰스님이다. 우리나라 불교사전(동국역경원 발행)에도 안나오는 스님이지만 일생을 오로지 ‘막망상(莫妄想)’이라는 테마 하나에 걸고 후학들을 교화하였다. 그의 일생에 대한 얘기는 ‘경덕전등록’ 제8권 무업장(無業章)에 나온다. 그러나 다망상에 관한 얘기는「오동회원」권에 자세히 나온다.
망상이란 허망한 상념이다. 따라서 다망상어란 허망된 생각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망상을 피운다라 하면 잘못된 생각, 그릇된 생각, 그저 놀기나 좋아하고 온갖 욕망이나 내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번뇌망상이라 하면 오욕(五欲)에 뿌리박은 ‘비속한 생각’으로만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망상이란 간택이다. 사물의 진상을 모르는 것,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머리를 모르고 허둥대는 것, 온갖 일을 큰 것과 작은 것, 이름다움과 추함, 이익과 손실 등 상대적으로 파악하고 거기서 한쪽을 취하고 한쪽은 버리고자 하는 분별이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하여 늘어붙는 생각이다. 간단히 말하면 미욱한 생각이다. 따라서 다망상이란 오욕에 이끌려 피상적, 또는 상대적인 것에 집착,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갖다 붙이는 것이 망상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며 좋고 싫은 것을 가리며 흑백을 구분하여 취사선택하는 것을 망상이라 한다. 태양과 같은 마음, 거울과 같은 마음은 망상이 아니다. 태양이 언제 선악, 미추, 호오(好惡), 장단, 득실 등을 가려가며 비추던가. 거울이 언제 아름다운 것만 반영하고 추한 것은 싫다고 하던가. 비가 내릴 때, 크고 작은 일체 초목과 산하대지에 차별없이 내리지 않던가.
무차별의 생각, 그것은 망상이 아니다. 똑같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망상이 아니다. 분별이 망상이다. 아(我), 인(A), 중생(樂生), 수자(壽者)의 사상(四相)을 갖고 사물을 대한다면 그것이 망상이다. 분별이다. 무차별의 순수한마음이 아니다. 청정무구한 본래면목은 아니다. 마불구타(魔佛俱打). 부처와 마군을 함께 물리친 마음이어야 한다. 취불사마(取佛控魔)의 마음은 진정한 무차별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이며 간택이다. 간택이 있는 한지도(至道)와는 한없이 벌어진다.
일체를 던져버려야 한다. 조주 큰스님이 엄양(嚴陽)이라는 납자(納者)가 와서 “저는 현재 미(迷)와 오(悟)의 두 가지 변을 완전히 여읜 무일물(無一物)의 경애(境湮)에 도달하였습니다. 다시 또 뭐 수행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고 일체를 놓아 버려라(放下著) 하고 대답하였다 조주 큰스님은 간파한 것이다. 아직도 ‘무일물’에 결려 있음을 안 것이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는 바로 그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갖는다’, ‘갖지 않는다?\'라고 하면 거기에는 능소주객(能所主客)이라는 대립이 형성된다. 즉, 지니는 주체와 지녀지는 대상이 존립한다. 이러한 차별적인 생각을 망상이라 한다.
분주무업선사가 평생을 \'망상하지 말라\'고 지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차별경계를 내지 말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편안히 살 수 있을까 한다던가. 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일반적인 수도의 개념), 무슨 꿍꿍이 속이나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곧잘 ‘망상 피우고 있군’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망상은 아니다. 양상은 차별심, 분별심이다.
기도란 간절히 구하는 바를 불보살님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능기자(能祈者)와 소기자(所祈者)가 존재한다. 능기자는 기도하는 자요 소기자는 불보살이다. 즉, 중생과 부처가 대립∙형성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다. 그러나 진정 자아의 발견을 위해서는 제이차적인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그것은 불보살과 기원하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불보살이 기도하는 이의 마음에 와서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마음에 조금이라도 차별심이 있다면 아직 최상의 단계는 아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이른바 백척간두(百尺千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여야 한다.
자, 정말 말처럼 기도가 그리 쉬운 것인가. 생각처럼 모든 차별심을 떠나 심일경성(心一境性)의 경지를 터득하기가 쉬운 일인가. 나는 천일기도를 통해 심일경성의 경지를 얻으려 무던히 노력하였다. 차별심으로서가 아니라 부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작업을, 무차별∙무분별의 세계를 유지하려 정진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무엇이 심일경성의 세계를 방해하는가를 알았다. 무엇이 ‘지극한 도’의 세계를 방해하는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주 평범하고 쉬운 말처럼 들리는 무업선사께서 평생을 지도해온 ‘막망상’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명안이었는가를 알게 된 것이다. 허나 이것은 비밀이다.
‘자, 이제 제발 망상은 그만 피우고 공부좀 해라. 공부 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망상, 그 망상은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