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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구도의 순례자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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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찰만담 - 박용길 1989년 09월 91호
과학의 새 발견
칠십년대 말이던가, 세상에는 한동안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후 이는 오랫동안 계속된 세계적인 경제불황의 여파를 타고 하나의 거대한 시대적 사조(思朝)로 증폭되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의식 전반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중동 사태의 악화, 원유가 폭동, 실업자 증가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세기말적인 불안 징후는 인류의 미래가 결코 장미빛 만은 아닌, 음침한 터널 안의 절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꿈과 희망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과학계는 그동안의 ‘긍정적인 예언’에 대해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을 향해 치닫던 현대의 첨단 과학마저도 일차적인 지구 자원의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제사태에 대해 별 뾰족한 수를 제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자조의 분위기와 아울러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자원 및 에너지 고갈, 환경 오염, 그리고 하나의 행성 공동체인 전지구 차원의 생존 문제를 염두에 둔, ‘새로운’ 형태의 과학적 사고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로마클럽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인류의 무분별한 경제 행위로 인한 지구자원의 황폐화를 계속 경고해 오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위기 의식은 조만간 그러한 예언이 현실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대다수의 군중의 무의식적 체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이제 자원 및 경제분야에만 국한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시각에 보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전환기적인 혼란의 대소용돌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갔다.
앞만 보고 내닫던 과학자들의 경직된 보행은 곧 소요유(消遙遊)의 만보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얼마후 그들은 자신들의 흉내내기가 동양의 여러 사상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불교의 화엄 사상도 바로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실타래처럼 얽힌 세상
어릴 적 가난하던 시절, 그때 추위는 또 왜 그리 유별나던지 우리는 돌아오는 겨울마다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루는 심정으로 어머니로부터 ‘계옷’-아마도 순모 털실을 의미하는 일본어 ‘께( )’의 어긋난 발음에다 우리말 ‘옷’이 더해져 만들어진 말인 것 같다-을 받아 입고 얼마나 따사로워했던가! 하지만 그 따사로움은 단지 그것이 양이나 낙타 등의 털을 짜아 만든 진짜 털실로 썼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늦가을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뜨개질은 어느새 무서리가 하얗게 내리던 날 밤이 으슥하도록 마무리에 한창이셨다. 더러는 잠결의 휑한 손더듬질에 흠칫 눈을 떠보면, 어머니는 아직도 꾸부정하니 앉아서 내 겨울 스웨터 짜기에 온통 여념이 없으시더니 … 그 정성, 그 사랑이 올올이 베어든 옷말고 그보다 더 따스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와 같이 사랑으로 날을 삼고 정성으로 씨를 삼아 잔 금쪽 같은 스웨터도 제 겨울 한철을 나기도 전에 그 탄탄하던 짜임새가 온통 느슨해지고 만다. 샘 많은 이웃 동무들의 짖궂은 손에 어느새 한 코, 두 코, 올이 나갔기 때문이다. 그까짓 코 몇 개 터졌다고 멀쩡한 옷이 헌 옷이 되다니…
오늘날 자연과학의 선두 주자인 원자 물리학은 서로 얽히고 설킨 제사건(諸事件)의 다이나믹한 직물(織物)이 곧 우리 우주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이무리 하찮은 것조차도 이웃과, 그리고 전체로부터 따로 떨어져 온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한 부분은 동시에 따른 모든 부분과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이 이루어내는 상호간의 전체적인 조화가 바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즉다(一郞多)… 한 티끌 가운데에도 온통 우주가 들어차i있다는 것이 바로 화엄사상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이야기인 것이다.「화엄경」에서는 인다라망(引院羅網, Indra-Jala)이라는 거대한 그물에 비유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무한히 많은 그물눈 가운데 어느 것을 들어올려도 임의의 눈을 중심으로 거기에 연결된 다른 무수한 그물눈들이 동시에 들어올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구 과학계의 편협된 시각을 열어 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동양의 다층 구조적이고 상호 원인적인 세계관이며 이는 「화엄경」에서, 법계(法界)의 연기법(綠起
法)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상즉상입(相郞相入)한다고 말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스웨터 올 하나에서 스웨터 전체를, 그리고 우주를 볼 수도 있다는 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화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화엄학을 연 이는 신라의 의상 대사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라 안에 이미 화엄 불교가 전개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명실 상부한 화엄 사상의 정수가 한국불교사 위에 커다란 강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의상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의상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법사 의상의 아버지는 이름이 한신(韓信)이며 성은 김씨이다. 의상이 출가한 것은 스물아홉살 나던 해, 서라벌 황복사에서의 일이었다. 중국에 가 불법을 배우고자 하던 차, 얼마 후 마침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이들은 곧 그곳의 고구려 병사들에게 붙잡혀 수십일간 갇혀 있다가 부득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영휘 초(A.D.650), 의상은 마침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양주 땅에 이르자 그곳의 우두머리가 자청하여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하게 대접했다. 얼마후 마침내 종남산 지상사에 가 지엄(智嚴)을 친견하였다.
마침 지엄은 전날 밤, 다음과 같은 꿈을 꾸고 난 뒤였다. 해동에서 자라난 커다란 나무의 무성한가지와 잎이 중국을 뒤덮었는데, 위에는 또 웬 봉황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올라가 보니 그 안에는 한 개의 마니보주가 멀리까지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꿈을 캔 후 놀랍고 이상스러워 주위를 깨끗이 하고 기다렸더니 이튿날, 마침 의상이 찾아온 것이다.
예를 다하여 이국의 순례자를 맞이한 지엄은 의상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꿈에 그대가 올 줄 알았소.”
기꺼이 제자됨을 허락하니 의상은 곧 화엄경 연구에 온 힘을 다했다 운운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의상은 그의 문하에서 팔년을 공부한 뒤, 서기 671년 마혼여닮살 나던 해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귀국 동기에 대해서는, 당고종의 침공 계획을 고국에 미리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기록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단지 그의 귀국 시기를 조금 앞당기도록 하는 이유는 됐을지언정, 아무래도 그 본 뜻은 신라에 화엄 사상을 펴는 데 있지 않았을까?

부석사를 창건하다
신라로 돌아오던 그 해, 의상은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기도에 정진한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은 그의 또 다른 면모인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전체 26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 후 의상은 서기 676년 부석사를 창건하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환다.
의상과 관련하여 부석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해져 온다.

…뱃길로 중국에 이른 의상은 그곳의 한 신도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에는 선묘라는 이름의 아리따운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곧 의상의 뛰어난 용모에 반해 버렸다. 하지만 의상의 마음은 요지부동… 마침내 선묘는 그 굳은 의지에 감복하여 세세생생 의상의 대시주가 될 것을 맹서한다.
이윽고 공부를 다 마친 의상은 선묘의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가는 뱃길에 올랐다. 마침 출타중이었던 선묘는 의상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공양물을 가지고 서둘러 나루터로 나갔다. 하지만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로 멀리 나가 있었다. 그녀는 곧 공양물 상자를 바다에 던져 넣으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마침 한줄기 바람이 일더니 상자를 공중으로 날려 의상이 탄 배에 이를 사뿐히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또 맹서하기를, 용으로 변하여 신라 땅에 무사히 닿을 때까지 저 배를 지키겠노라며 곧 바다로 몸을 던졌다. 의상이 탄 배는 이윽고 선묘 용의 부축을 받아 꿈에 그리던 신라 땅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귀국 후 의상은 화엄 사상을 펼칠 적지를 찾아 산천을 두루 돌아 보았다. 마침내 오늘날의 부석사 터에 이른 의상은 그곳에 먼저 와 자리잡고 있던 삿된 무리들을 보고 내심 큰 고민에 빠졌다.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주던 선묘의 넋이 마침 이를 눈치채고 그녀는다시 큰 원력을 발하여 공중의 큰 바위로 변했다.
사방의 크기가 무려 일리(一里)나 되는 바위 덩어리가 지붕 위에서 마악 떨어지려 하자, 이를 지켜보고 었던 삿된 무리들은 혼비백산하여 그곳을 떠나갔다. 의상은 곧 그곳에 자리를 잡고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화엄경」을 강의했다. 특별히 알리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선묘의 넋이 변하여 된 것이라는 부석(浮石)은 지금도 경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부석사라는 절 이름은 사실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화엄 청토의 만달라
뿐만 아나라 부석사에는 선묘와 관계 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선묘의 혼백을 모신 선묘각(善妙開), 선묘용설화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선묘정(善妙井)
이라는 우물, 그리고 보다 더 신비스러운 것은 이 절의 무량수전 바로 밑에 석룡(石龍)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 때, 일인들에 의해 절이 크게 개축될 당시 바로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량수전의 본존인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부터 머리 부분이 시작되어 앞뜰의 석등 아래로 그 꼬리가 이어져 있다고 한다. 아울러 거기에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비늘 모양의 무늬까지 돋아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곧 위에서 말한 우리나라 화엄의 근본 도량인 부석사의 본당 무량수전에 왜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이 주불로 모셔져 있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창건 당시의 사상적인 배경이야 어쨌든, 그 짜임새의 면면으로 보아 부석사는 분명히 전형적인 정토사찰의 특징을 보여 준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도량전체의 석측을 9단으로 축조했으며,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安養樓)와 안양문을 세워 놓은 것 등이 그것이다.
개산(開山)할 당시 의상대사는 분명히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 이곳에 도량을 이룩했음에 틀림없다. 혹자는 말하길, 「화엄경」의 끝부분이 아미타불에 대한 회향으로 맺음하고 있어 이 두 신앙은 결국 그 뿌리가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는 타당성이 극히 희박하다.
그것은 절정에 이른 사상적 성숙과 원력 어린 실천적 행위를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의상의 사상적 발전이 법성계(法性係)로 집약되는 것이라면 그의 실천적 행위는 부석사의 정토 불교적 축소에 의해 발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부석사에 관계된 이 모든 불확실하고 예외적인 사건들은 이 절이 화엄의 근본 도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결국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울러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