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통 같은 어리석음의 언덕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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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영희
1989년 09월 91호
교무과 옆 부처님 좌상 가까이 봄 동안 그토록 찬란했던 목련나무는 이제 잎만 짙푸르고, 담 너머 불암산 잡목 숲에서는 고향으로 가자고 돌아가자고 한낮을 매미가 울고 있건만, 파렴치한 과거를 부처님 품에 묻은 채 겹겹이 쌓인 암혹의 세계에서 통한과 뉘우침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도 ‘한줄기 거룩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비추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1952년 1월 2일 곶감의 명산지 상주에서 부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 속에서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사바세계에는 고락(苦樂)이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인지라 행복하고 단란했던 우리 집에도 먹구름이 서서히 덮쳐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둔 때부터, 아버님의 사업실패로, 가사는 기울대로 기울고 조용하던 집안에 불화가 자주 일어났던 것입니다. 가까스로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은 엄두도 못 냈기에 빈둥빈둥 목적없는 생활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생활하던 스무살나기 예민하고 반항기 많은 시절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집을 멀리하고 밖으로 나돌았으며 친구를 만나는 것이 모두가 불량한 사람이 고작이고, 그때부터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으며,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한다는 것을 불교를 통해 깨달았다고 하면 경솔한 말인지는 모르나, ‘인과응보’의 참뜻을 석혜스님의 설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도 모두가 석혜스님의 설법에 힘입어 귀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친구들과 어울려 남을 괴롭히고 나쁜 짓을 일삼던 당시의 75년 어느 날, 남의 시계를 뺏은 것이 시초가 되어 김해 교도소에서 일년을 복역한 후 76년에 출소해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77년 가을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도 뚜렷한 직업이 없기 때문에 나쁜 친구의 무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또 다시 남의 물건을 날치기하며 나쁜 짓을 하다가 79년 두살 된 딸과 아내를 외면한 제 경주교도소에서 삼년을 복역했습니다.
나쁜 짓을 할 당시의 행동은 글로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행할 짓이라고 믿기조차 어려웠으니 죄값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요. 복역 당시 그래도 못난 남편을 이해하고 찾아주는 사람은 아내뿐이었습니다. 동분서주 봇짐행상을 하면서도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는 아내에게 출소하면 당신과 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겠노라고 감언이설하면서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정말 그 때의 저는 철저한 위선자였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과 출소 후에 다시 만나서 차를 가지고 다니며 전국을 무대로 날치기하자고 모의하였습니다. 그런 뒤 82년 4월 출소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는 정말 따뜻하게 감싸주었습니다. 나를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며 착하게 살자고 애원하듯이 했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약속한 사람들과 만나는 일 뿐 그 외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내에게는 착실히 살겠노라고 또 거짓말을 하고는, 교도소에서 약속한 동료들과 만나서 나쁜 짓을 하다 또다시 83년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팔개월을 복역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나를 버리지 않고 찾아 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위선이 철저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확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83년 11월에 출소해서 집에 돌아오니 둘째 아이가 태어나 식구가 한 사람 더 불어나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한 가정의 가장이 행해야 할 일들을 능히 알 텐데,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차를 사서 돈을 벌면 된다고 아내를 속여 처갓집에서 얻은 돈으로 자가용을 구입해 전국을 무대로 날치기를 했습니다. 자가용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먹혀들어가지도 않을 거짓말로 정말 어쩌면 그렇게도 속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며 날치기를 했으니 그 행동과 생활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아내는 차사업을 한다고 믿고, 점장이를 찾아다닌다거나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등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했습니다.
사람이 나약하면 미신에 의존하는가 봅니다. 착한 아내는 점장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서른아홉살이 되면 모든 액운이 물러가고 큰 재산이 모인다고 점장이가 말했다면서 그때까지 몸 건강히 계시다가 천운이 오거든 돈을 벌자고 나를 위로하던 아내를 생각할 때, 남을 위해 제 몸을 태우는 양초를 어찌 비교 아니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보살의 표본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으니, 정말 우치로 뭉친 중생이었습니다.
어느날 불공을 드리러 가자고 하는 아내를 따라 대구 팔공산 관암사에 갔습니다. 아내는 목욕재계한 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 곁에 갔지만, 난 위선으로 갔기에 어찌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웅전 부처님 모습을 보니 몹시도 무서워 그냥 자리를 피해 바깥으로 나와 오늘은 어디 가서 날치기하고 어느 술집에서 여자들과 쾌락이나 즐기며 놀까 하는
공상에 빠져 있는데, 아래가 땀을 닦으며 곁에 와서 왜 일찍 나오셨느냐고 묻기에 그냥 얼버무린 척도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을 알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 난다고, 어느 다방의 여자와 살림까지 차렸습니다.아내를 보기를 남의 집 식모만큼도 생각 않고 박대를 했으니 그 죄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래도 아내는 모르는 체 하면서 내가 가정으로 돌아오기만 바라고 두 자식을 품고 살아왔으니 정말 나에게는 과분한 사람입니다.
86년에 또 김해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아내가 면회 와서는 “나는 당신을 버리고 딴 곳으로 재혼을 하면 지금보다는 행복할지 못할지 모르나, 나 한 사람 희생으로 당신과 자식들 모두 세 사람을 구원하는 뜻에서 살겠다”라며 용기를 북돋아주던 아내가 정말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뜻을 저버리고 87년 11월 출소해서 6개월도 못 되어 다시 안양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으니, 입이 열 개인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짐승의 탈을 쓴 미물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88년 l2월에, 교도소 내의 불교 집회에서 석혜은스님의 설법을 듣던 중 ‘인과응보’의 큰 뜻을 느끼며 이상하게도 불교에 마음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 큰 인연으로 며칠 뒤 불과 종교방으로 옮겼고, 불자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종교방 생활도 이제 어언 반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 종교방으로 왔을 적에는 정말 참기 어려웠습니다. 아침 저녁 예불시간에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독경을 했고 사찰에서 수도하시는 스님들처럼 힘든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교육장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불교란 자신과의 싸움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백 마디 말보다 단 한번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행’의 큰 뜻을 알았습니다.
종교방에는 부처님을 모신 불단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리면서 수요일에는 불교총법회가 있고 오후에는 송춘회 보살님의 후원으로 작곡가 이길상 선생님과 성악가 선회정 선생님의 지도로 찬불가 합창 시간을 갖습니다. 또 금요일에는 동국대 학생이신 석정엄스님의 교리시간이 있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이 정말 이쉬울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렵니다. 이곳 교무과 불교 담당인 민찬수 교도관님은 불자들을 위해 열성입니다. 교도관 직분을 떠나서 친형제로 착 할 정도로 이곳 불자들을 위해 많은 지도를 아끼지 않습니다.
저를 교화시켰던 가장 큰 교훈은 불법의 교훈이었습니다. 가혹한 집체훈련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은 종교방에서 교무반장을 맡아서 화요일에는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고 목요일은 불교기초교리에 대한 주제발표를 시키는 등 보람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과거를 청산하고 가족과 이웃을 위해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길을 택하고자 더욱 더 많은 불교서적을 탐독하고 스님들의 설법을 빠뜨리지 않고 듣습니다. 유행가 대신에 내 업에선 찬불가가 나오고 있으며, 마음이 편하니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잠시 마음을 비우고 삼천배 기도를 해 보았습니다. 아침 일곱시에 시작하여 저녁 여섯시에 삼천배 기도를 끝내니 육체적 고통은 있어도 심정이 개운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또 성취감을 생각할 때 날아 갈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불교란 남을 위한 종교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성불의 바탕 원리라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전과가 몇 개인들 어떻습니까? 난 새로 태어난 걸요. 다시는 어두운 생활에 젖어들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과거 남의 물건을 날치기하고 시민을 울린 파렴치한 중생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밝은 빛을 안고 사회로 진출할 내일을 기다리며 “비켜라! 운명아 내가 나간다.” 하고 긴 숨을 내쉽니다.
칠통 같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