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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런 풀 냄새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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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정완석 1989년 09월 91호
‘싱그런 풀 냄새’ 이것은 내가 매주 이 나라의 불교학생회 아이들과 일선에서 포교를 위해 애쓰는 여러분들을 위해 만들어내는, 소박하고 보잘것 없는 팜플렛의 제목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팜플렛 속에는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신앙이 있고, 소박한 꿈이 있으며, 이 땅의 불교를 위해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일선의 여러 법사님과 선생님의 땀이 배어있는 순수한 포교지이다. 또한 ‘싱그런 풀 냄새’는 부처님 마음을 닮고 싶고 또 닮아가는 예쁘고 고마운 마음들, 곱고도 장하신 마음들, 이런 마음들의 빛깔이요, 소리며, 냄새요, 맛의 대명사이다.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이 땅의 불교역사는 16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적 바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선 시대의 500년이라는 억불 암혹기는 우리들 속에서 불교문화를 말살한 질곡의 역사였던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물밀듯이 밀려들어 온 서구문화는 옛 우리 조상들의 고결한 정신과 얼을 되돌아볼 틈도 없이 마구 우리 주위에 넘쳐흘러, 아름답던 이 땅의 민족문화를 마치 괴괴하고 이상스러운 미신이나 골동품쯤으로 여기도록 부추겨 왔다. 특히, 아이들이 아무 편견없이 배우고 받아들여야 할 교과서에서까지 그런 일이 번진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동안의 보도매체나 우리의 정신사가 모두 이러한 경향이었던 것은, 이 땅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었음을, 언젠가는 회고할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소읍(小邑) 안강은, 옛부터 신라의 고토(古土)이며 찬란한 불교문화의 요람 서라벌과는 이웃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 읍의 주변에는 옛 신라시대의 설화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으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런 설화 속에서 자라난 이 곳 사람들은 사실상 축복받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이런 자연적인 환경과 정신적인 토양은 내가 불교신앙으로 나아가는 반석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의 영향은 어린날 보았던 내 어머니의 신앙의 자세가 곧 나에게는 지순하게 비쳐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만드는 법보(法報)에, 나의 어머니의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절에 가실 때마다 목욕하시던 어머니의 고마운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겨우 작업복 입고 일하다가도 절에 갈 때면 반드시 와이셔cm 넥타이 정도의 정장을 하는 것뿐인데, 어머니께서는 월초에 날을 받아두시면 적어도 3일은 대문에 솔가지로 금기를 쳐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시고, 멸치 조각도 안 잡수시고, 절에 가시는 길에는 어떤 사람과도 인사도 안 하시며, 30리 길을 도중에 앉아 쉬시는 법도 없으시던 그 철저한 신앙심을 우러러봅니다.
이런 노보살님들의 신앙을 요새 청년들은 고작 교리 몇 단어 배워 들었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기복신앙 운운하며 배척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타작마당에서 공양미는 따로 담으시고, 방아 찧어 오시면 동지분, 구정분, 삼진분, 초파일분…으로 따로 따로 공양미를 정성껏 준비하셔서, 돌도 뉘도 가려내시던 정성을 나는 보았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올곧은 정성은 곧 신앙의 극치였음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남들에게 감화를 주는 것이란, 더 높은 학문이나, 지식이나, 번지레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극정성을 다하는 그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이다. 사실 요즘도 비록 작은 포교전단을 만들 때나 또는 진실한 포교를 생각할 때마마 어머니의 그 절절한 정성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실, 포교란 사람을 이끌어 오는 상업광고 같은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가르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의 생각으론 포교란 먼저 자신이 본을 보여주는 데서부터 비롯되어, 그의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 이끌리어 오도록 감화를 주는 일일 것이다. 제 일은 엉망으로 하는 사람이 말로만 비단결 같이 유혹을 한다고, 그게 진정한 포교가 될 까닭이 없다. 먼저 각자가 자신의 손이 닿는 사람들을 위하여, 꾸밈없는 보시라도 행해야 할 것이다.
어느 사회, 어느 집단이고 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일이란, 확실한 미래를 가꾸고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불교를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지만, 우선 청소년을 위한 불교운동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최근 어느 신문보도를 통하여 발표된 종교인구 분포를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사십대를 전후해서, 사십대 이상의 세대에서는 불교신자가 많으나 이삼십대에서는 불교신자가 기독교 신자의 절반도 되지 않은 것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따라서, 청소년 불교운동이란 불교의 미래를 다져가는 일이라 하겠다.
사실 시골로 갈수록 법사도 없고 지도해 줄 선생님도 계시지 않는 이 나라의 불교적 현실을 보면서, 진실로 부처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시작한 일이 싱그런 풀 냄새. 즉 법보를 매주 만들고 보내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해온 지도, 이제 십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제, 그 햇수만큼이나 많은 학생회가 가입하여, 육십 개 학생회의 회원삼천 명이 우리 법보 가족이 되었다. 나는 법보를 만들면서 피곤하거나 지칠때마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생각하고, 혹 이 법보를 통하여 환희발심히여 조용히 입가에 번지는 맑은 웃음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곤 한다. 이제 나의 전공과목은 학교교육에서 불교교육으로, 그 중에서도 우선 영남지역 각 불교학생회의 법회와 이에 동참하는 고등학교 불자님들을 도와주는 과제로 바뀌었다.
다만, 지금 내가 가진 거라고는 일 미터짜리 교편 하나와, 쓰다 남은 분필 두 통, 그때 달고 다니던 교무 정환석이라고 새겨진 아크릴 명찰, 학급 경영록 몇 권, 열한살 때부터 금년까지 써 온 일기장, 받은 편지 묶음 몇십 권 등이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나의 교직 이력서에는 또한 많은 시련들이 얼룩져 있었고 학교에서는 결국 쫓겨났고 학원에서는 정부시책으로 분필을 놓은 것이다. 덕택에 나는 안강 불교 학생회를 내 담임학급으로 여길 수가 있었고, 지금은 영남불교학생회 육십 개 학급을 도와주는 ‘불교학교 교무주임’ 쯤 되었다.
나의 학교는, 이제 담장이 없이 넓어졌고 교무실에 나 혼자 있어도 교장 선생님이신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여러 불보살님들이 나의 근무를 지휘 독려 결제해주시고 교과서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말씀〔經〕이시며 교감선생님은 여러 스님들이시니, 나는 교무주임도 좋고 청소부나 사환이라도 좋으며 또한 많은 동료직원들이 함께 있어 외롭지 않다.
내가 한때 교직에 있을 때, 링컨 대통령처럼 이이들을 위하여(for the children), 아이들과 함께(with the children), 아이들처럼(Iike the children), 이라는 나의 생활 신조를 이제는 부처님을 위하여(for the Buddha), 부처님과 함께(Wlth the Buddha), 부처님처럼(Iike the Buddha)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욕심 많게도, 전국의 불도학생회의 교무주임이 되고 싶다. 그러고, 언제나 더 많은 수업량을 맡기를 자원한다. 어렵고 힘겨워도 교장선생님께는 결코 항변하지는 않겠다. 또한 전보발령을 원하거나 내신서를 결코 제출하지는 않겠다. 나의 학교는 종신근무제이다. 종신이 무언가 내생에도 세세생생토록, 영구 불멸토록 근무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