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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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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09월 91호
대구 불교교육원에서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사려깊은 큰 눈하며 찬찬하고 나즈막한 음성과 단정한 매무새의 스님에게선 전형적인 학자 냄새가 났으며 그래서인지 언뜻 비춰지는 스님의 모습은 차갑다는 느낌이었다.
스님의 속마음이 푸근하고 부드러운 줄을 모르는 학생들이 스님더러 ‘엄하다’ 혹은 ‘딱딱하다’하여 동국대 경주캠퍼스 내에서 스님은 딱딱하고 메마른 ‘율사 아닌 율사’가 되어버렸다. 겁이나 그러는지 쉽사리 연구실 문을 노크하는 제자들도 없고 보면 통 인기없는 교수같아 보이지만 먹물 옷 입고 가르치는 스승이 전통적 스승상이라 여기는지 수업시간 분위기는 의외로 뜨겁고 학생들은 ‘좋아라’한다.
큰스님들이 ‘야’ 혹은 ‘너’가 아닌 ‘스님’하고 불러주시고 말어미를 반드시 ‘~까?’로 붙여주시던 게 습관이 되어 삼십년이나 아래인 제자들에게조차 반드시 존대어를 쓰는 스님이 법혜스님이다.
체질적으로 병약했던 스님은 무리한 공부로 인해 더 약해진 데다가 신경질환을 앓게 돼 요즈음은 제일로 해보고픈 판서도 못하고 원고도 쓰질 못해 아주 답답한 형편이다. 학교에 병가를 내고 쉴 예정이었지만, 지난해 겨울 정각원 방화사건 이후로 정각원 원장을 맡게 돼 물리치료는 고사하고 짬이 없을 만치 바쁘게 산다.

스님은 오십칠년에 해인사로 입산했다. 해인강원 4회 출신으로 지관스님께 배웠다. 출가 당시 가끔 솟구치던 서글픈 생각은 흑판에서 설명하는 강사스님을 뵙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찾았구나’하는 안도감 속에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
강원 졸업 후 영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회계소임을 맡았다. 돈 만지는 일이 생리에 맞지 않아 바꿔달라고 부탁을 드렸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가 이틀 동안 단식투쟁을 벌인다. ‘누구는 구년동안 회계하다가 강사를 맡았는데 고작 구개월 하고서 무슨 소리냐’는 핀잔만 받고, 안해본 단식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나도 고집은 있다’고 여겨 인수 인계 준비를 완료하고 인수인계서에 도장까지 찍은 뒤 몰래 대구로 도망나와 버렸다. 시내 사찰에 머물면서 대학입시 공부를 하였다.
한해 반이 지나서야 법혜스님은 잘못을 사죄하며 스님들을 찾아뵈었다. 잘못을 빌려면 들어와 서기를 맡으라는 엄명에 강등된 채 한해 동안 서기를 맡았다. 노다지 장갑끼고 일하면서 미비된 서류를 모두 수정보완하고 작은 안내판이라도 써붙이며 임기를 마치자 그제서야 스님들도 흡족해 하셨다.
“난 주지나 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뵌 주지 강사스님들은 절을 꾸리고 대중을 위해 애쓰시는 품이 아주 극진하셨거든요.”
운력 때면 주지스님부터 앞장 서서 어지간한 돌담장이나 축대는 다 고치고, 지붕 꼭대기에 올라 풀을 뽑고, 산불이 나면 쫓아올라가 불 끄느라 밤을 지새우는 스님들을 뵈면서, 어쩌다 한번 따라가면 며칠을 앓기 일쑤였던 법혜스님으로선 ‘글 배워 학인 가르치라면 나도 신이 나도 그 학인 거느리고 운력(雲力)에 앞장설 주지나 강사가 될 그릇은 아니다’하고 스스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죽은 사람도 일어난다는 ‘운력’시간에 스님은 항상 ‘집 보는 신세’였다.
대입 검정을 거쳐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기껏 공들여 봤자 퇴속한다’는 주변의 선입감 때문에 외부로부터 지탄도 많은, 그 종비생 5기로 등록금 걱정없이 기숙사 생활비까지 받아 생활한 육팔학번이다.
나이 들어 입학한 학교이기에 어학이 가장 어려웠지만 백상원에서 생활한 스님들 모두가 서로를 아끼며 열심히 살았다. 백상원에서 묘하게도, 목탁치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이들과 느려터지게 행동하는 이들과의 구별점을 발견했는데 선두주자 모두가 강원 출신이었다고.
“지금도 그런 전통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 대학생이라 하면 모두가 신뢰했어요. 만에 하나 품위에 손상이 가 기숙사로 알려지면 가차없이 퇴학이었지요. 잘 모르고 저지른 실수로 아깝게 중도탈락한 도반도 있었지만, 대체로 절 생활이 몸에 뱄기 때문에 단체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수유리에서 대한 극장까지 십구번이나 이십번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일은 고역이었다. 멀기도 먼 데다 버스는 어찌나 붐비던지 ‘졸업할 때가 되면 골병든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고, 내리고 보면 영락없이 옷고름이 떨어져 있거나 어디 한군데가 튿어져 있기 다반사여서 ‘양복 입게 해달라’고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기숙사 시절, 스님의 별호는 ‘해인사의 율사’였다.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막혔다는 지적도 많이 받아 스스로도 성격을 변화하려 무진 애썼다. 힘들고도 보람찼던 기숙사 생활 덕에 후일 스님은 그 어려운 일본땅의 유학도 제대로 견뎌낼 수 있었다.
법혜스님은 종단에서 거액을 투자해 종비생을 키우면서도 이들을 옳게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맘에 걸린다. 물론 환속하는 일도 더는 없어야겠지만 적재적소에서 이들이 활용될 수 있게끔 제도화 되어야 올바른 회향이 뒤따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재주 없이 책보고 공부하고 남에게 전달하는 일이 성격에 꼭 맞아’ 석사과정을 밟았다. 교단사에 관심이 있어 「고려시대 선종 청규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청규란 선종에서 만든 제 2의 율장이죠. 선종을 그 맥으로 자부하는 우리는 불문율로 남기기만 할 뿐 계율을 제도화하려 하질 않습니다. 종헌종법엔 엄연히 모든 의식을 절내의 백장청규에 준한다고 되어있지만 정작 청규책을 찾으면 없는 실정입니다. 성문화해서 청규를 살려야지, 사회법 적용해서 시비를 가리면 아마도 대법원 항소가 그칠 날이 없을 겁니다.”
절마다 다른 예불의식에서부터 공양은 어떻게 해야 할 지까지, 현대화∙간소화하며 성문화되어야 문화 또한 계승발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가 있는데 이는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항상 답보상태인 강원교육에 관한 것이다.
강원교육이 승려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스님은 하루바삐 탈바꿈돼야 할 강원교육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강사 한 사람이 여러 명을 가르침으로써 전공에 충실을 기하기도 어렵고 교육 내용도 단조롭습니다. 강원교육이란 단순히 글공부가 아니라 신앙심을 굳건히 다지는 가운데 학문을 배우는 일이므로 강사가 다양해야 합니다. 또, 강원교육을 마친 뒤 일반대학에 진학하는 이중 부담을 없애도록 대학원 과정을 신설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일반대학과는 달리 강원은 사찰 내에 자리하고 있어 승려들에게 무궁무진한 교육현장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대학원 시절 한 일년, 해인사에 내려와 교무소임도 보았다. 이 당시에 해인사사적비 글씨를 썼다. 글 잘 쓰는 명필이 많고 많지만 잘 쓰든 못 쓰든 ‘내 집 사람이 써야 한다’는 논리에 밀려 몇 달씩 걸려 완성했다. 그것도 비석에 직접 글씨를 써달라는 석공의 주문에 차디찬 돌 위에 올라앉아 오랫동안 글을 쓴 통에 오른쪽 다리에 신경통을 얻었다.
당시 스님과 함께 글을 쓰던 후배들이 이젠 한수 위에서 스님이 붓을 면 뒷전에서 ‘자알 쓰십니다 그려’하며 껄껄 웃어 스님을 무안하게 만들곤 한다.
대학원을 마친 뒤 치료를 겸해 대구에 대각사를 지어 쉬고 있었다. 종단에 퇴락한 사찰도 많거늘 개인 절 짓느라 무리하느냐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유도 없는 성격으로선 주저임명 받고 옮겨다닐 처지가 아니어서’ 북구 서변동에 터를 잡아 절을 짓고 해인사 말사로 등록시켰다. 작은 암자 세 개동으로 이뤄진 이곳 대각사는 삼백 세대가 넘는 신도들이 등록돼 있고 매월 초하루 법회와 학생법회가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곱해를 대각사에서 머물었다. 하루는 후배들이 와서 ‘이곳에서 썩지 말고 공부하라’ 등 떠밀며 일본유학 수속을 밟아 주었다. 그래서 스님은 일본 대정대학으로 교환학생 일기생이 되어 홀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 당시 칠십만엔이라는 비싼 등록금조차 변제한 유학생활이었다.
불교학 코스에서 천태학교를 전공했다. 일상회화는 결코 어렵지 않았는데 책을 보면 쉬운 내용도 원천을 곧바로 얘기하는 강의시간에는 도무지 알아들을 길이 없어 애를 태우기도 했다.
한국 스님이 경영하는 절에서 숙식을 하다가 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하였다. 밥하고 빨래하는 일이 스님들에겐 ‘기본’인 까닭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지만 습도 높은 기후 때문에 법혜스님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렵고 힘들수록,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익진 교수의 ‘스님들은 눈이 붉어질 정도로 책을 봐도 따라갈둥 말둥한데 딴 생각 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따가운 질타가 항시 머리 속에 맴돌았다. 고익전 교수가 일본에 와 보여준 모습을 스님은 끝내 잊을 수 없다.
“남들은 일본에 오면 가고픈 곳을 적어 와 구경시켜 달라기도 하는데 그분은 각 불교대학 도서관 주소록을 들고 오셨지요. 전철에서 내려 층계를 오를 즈음이면 나도 심장이 약해서 천천히 걷는 편인데 그분은 저만치 밑에서 허연 얼굴이 되어 ‘스님 같이 가요!’ 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도서관에만 들어가면 희색이 도는 겁니다. 자료 찾고 복사하고, 시간이 아까워 구내식당에서 급하게 식사하시곤 했지요. 그런 선생님을 뵈면서 날 채근했어요.”
법혜스님은 가끔, 우리자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거늘 왜 일본에 가서 불교공부를 하고 왔느냐한 질문을 받는다. 그렇지만 스님은 퍽 잘 다녀왔다고 판단한다.
지금의 학문은 분류이고 정리의 과정일 뿐 위대함을 비교하러 유학간 게 아닌 까닭에 분화되고 체계잡힌 일본에서 제대로 공부하고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님이 제일 부러웠던 일은 범어로 반야심경을 욀 만큼 산스크리트어가 제대로 연구되었다는 점이다. 제도며 복지시설 등이 한참을 앞서가는 일본불교를 보고 ‘각성’이 필요함을 새삼 느낀다는 스님은 박사과정만을 이수한 채 세해 동안의 일본생활을 챙겨 귀국하였다. 그리곤 곧바로 교단에 섰다.

스님은 사는 동안 참으로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생각한다. 제일로 큰 은혜야 부처님의 가피력이겠지만 다른 스님네들에 반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학문에 정진하고 포교에 열성일 수 있었던 것들을 되돌아보면서 종단이라는 거대한 구조물 속에서 벽돌 하나의 역할이라도 충실히 해내겠다는 원을 세웠다. 그래서 그간 몸담아 온 대구지역에서 지역포교를 위해 땀흘려 회향하고 싶어한다.
대각사에서 한 시간이 넘는 학교로 출퇴근을 하고, 강의가 없는 날이면 대구 시내 한복판에 세운 대구불교 교육원에서 불교교육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원에서는 ‘맨날 경주까지 다니니 몸 아픈거’라 하고 경주에선 ‘교육원 일을 정리해야 아른 것도 나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정작 스님은 ‘아프지 말라’는 얘기 소리가 ‘일 좀 많이 하다가 가소’처럼 들려, 투병 열심히 해내면서 벌여 놓은 지금의 일들을 제대로 갈무리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