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과경(沙門果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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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9년 09월 91호
이 세상에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걸까요?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꽃과 새와 스치는 바람과 숲과 돌, 하늘의 별과 달 바람 구름, 자연의 숨결 소리를 관통하는 것들은 어느것 하나라도 서로 연관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불과 물, 땅과 하늘,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친밀하게 관계지워져 있습니다. 그림자는 형상과 함께, 물은 대지와 함께, 불은 연료와 함께 오랫동안 서로 접근하여 교제하면서 썩 잘 어울려 왔습니다. 그림자가 땅에 누워도 흙이 묻지 않듯이 물 안에서 젖지 않고 불에 들어 타지 않으면서 결코 형상에서 떼어낼 수 없듯이 마음 밭에 영원한 것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사문은 마음 안에 고독을 키우며 눈물의 골짜기에 슬픔의 피가 흘러 넘쳐도 위로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헤어질 때 좋은 이야기거나 만났을 때 언짢은 말이라도 담아두어야 상관이 있을 듯하지만 기실 모이고 헤어지는 일에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는 격렬한 의식의 저 밑바닥후미진 곳에까지 기억되는 사유의 대상은 물살에 무늬지는 그리움처럼 커져가는 정근과 전념하여 잊지 않는 한정(閑靜)일 뿐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나열기(羅閱祇)성의 기구(耆舊) 동자의 암바라(菴婆羅) 동산에 계실 때 큰 비구 무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때 위제희(韋提希) 부인의 아들인 아사세(阿闍世) 왕은 보름날 달이 찾을 때 부인에게 무엇을 해야 할까를 물었습니다. 부인은 오욕락을 즐기기를 권했습니다. 다음 제일 태자인 우야바타(優耶婆陀)에게 물으니 사병(四兵)을 모아 국경을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습니다. 또 왕은 우사(雨舍) 바라문, 전작(典作)대신, 수문장(守門將) 가라(伽羅), 우타이만제자(優陀夷漫提子) 등에게 물으니 모두 바라문들을 만나 보는 것이 좋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왕은 수명동자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은 청명하여 낮과 다름이 없다. 마땅히 어떤 사문∙바라문에게 나아가 내 마음이 열리게 할까. 수명동자는 사뢰었습니다. “불세존(佛世尊)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 암바동산에 계십니다. 대왕은 마땅히 그에게 물으소서. 왕이 만일 보시면 마음은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고 권했습니다. 왕은 보배 코끼리를 타고 위엄을 보이면서 횃불을 들고 위엄을 보이면서 나열기성을 나갔습니다.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가면서 천이백오십여 명의 스님들이 있으면서도 숨소리 하나 크게 들리지 아니하므로 조금 가다가 수명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속이고 나를 함정에 빠뜨려 우리 대중을 원수에게 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세 번이나 다짐을 했습니다.그 때마다 수명은 “왕이여, 다만 앞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경사스러움과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저 사문의 법은 항상 한정 (閑靜)을 즐기므로 소리가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아사세 왕은 동산의 문에 이르러 코끼리에서 내려 칼을 풀고 일산을 치우고 다섯 가지 위의를 버리고 걸어서 강당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밖에서 발을 씻고 당(堂)에 올라잠자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환희심을 내어 입으로 말을 내었습니다. “지금 모든 사문은 아주 고요하고 고요해 지관(止觀)을 구족했다. 원컨대 내 태자 우바야(優婆耶)도 지관을 성취하기 이와 다륨이 없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세존은 아사세왕을 앞에 앉게 하니 왕은 앞으로 나아가 머리로 부처님 발에 절하고 한 쪽에 앉아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사람들은 코끼리와 말과 수레를 타고 칼, 창, 큰칼, 활, 화살, 병장, 전투의 법을 익히는 것처럼 왕자 역사(力士), 대역사 동사(童使), 피사(皮師), 체발사(制髮師), 직만사(織鬘師), 차사(車師), 와사(瓦師), 죽사(竹師), 위사(韋師) 들도 다 갖가지 기술로써 스스로 생활하면서 스스로 마음껏 오락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의 부모, 처자, 노복(奴僕), 동사(童使) 들도 함께 오락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생(生)을 경영하여 현재에 과보(果報)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 모든 사문의 현재에 닦는 것은 현재에 그 과보를 얻습니까.” 부처님은 왕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은 일찍 모든 사문 바라문에게 가서 이러한 뜻을 물은 일이 있는가, 없는가?” 왕은 부처님께 말했습니다. “나는 일찍 부란 가섭에게 물었습니다. 저 부란 가섭은 왕이 스스로 짓거나 남을 시켜 살생, 도둑질, 음탕, 거짓말, 불 놓아 태우기 따위를 짓더라도 이것은 악이 아니다. 또 한 보시를 일체의 무리에게 베풀어도 복의 갚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때 말가리구사리에게 가서 물으니 말가리구사리는 선악의 갚음도 없고 금생도 후생도 없으며 내지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 이 허망한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없다는 것으로 대답했습니다.” “어느 때 아기다시사홈바라에게 가서 물으니 아기다시사홈바라는 사대(四大)를 받은 사람은 목숨을 마치면 지대(地大)는 땅으로, 수대(水大)는 물론 화대 (火大)는 불로, 풍대(風大}는 바람으로 각각 돌아가 목숨이 마치면 모두 무너지고 부서져 공(空)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단멸법(斷滅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어느 때 바부타가전연에게 가서 물으니 바부타가전연은 힘이 없고 정신이 없는 사람은 힘도 없고 방편도 없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이 염착(染着)하고 청정하다고 하여 무력 (無力)으로써 대답했습니다.” “어느 때 산야비라리자에게 가서 물으니 산야비라리자는 이 일은 이와 같다 이 일은 사실이다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다고 하여 이론(異論)으로써 대답했습니다.” “어느 때 니건자에게 가서 물으니 니건자는 나는 일체 지(知)와 일체 견(見)을 가진 사람으로 모든 것을 알아 남김 없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언제나 깨달아 남김 없어 지혜는 항상 앞에 있다고 하여 일체의 지혜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들을 죽이거나 쫓아 버릴 수 없어 그들을 버리고 떠나왔기에 이제 여기 와서 이런 뜻을 묻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아사세 왕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왕에게 도로 물으리라. 마음대로 대답하라. 어떤가 대왕이여, 왕의 집의 종이나 안팎의 하면들은 왕이 오락하는 것을 보고 행(行)의 과보로 갚음이 이에까지 이르르는가 생각하다가 뒷날 왕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포를 닦아 평등법을 행할 때, 멀리 종이 오면 ‘저 사람은 내 종이다’고 하겠는가.” 왕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가 오는 것을 보면 마땅히 일어나 맞이하여 앉기를 청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문이 현재에 얻는 갚음이 아니겠는가.” 왕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폰이시여, 이것은 사문이 현재에 받는 갚음입니다. “다시 대왕이여, 여래 지진 등정각이 이 세상에 나타나면 내 법에 들어오는 자는 내지 삼명(三明)으로써 모든 어두움을 멸하고 지혜의 광명을 내나니 누진지증(源盡智證)이 그것이다. 그것은 정근하고 전념하여 잊지 않으며 홀로 즐기고 한정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가 대왕이여, 이것이 사문이 현재에 얻는 과보가 아닌가.” 여기에 나오는 논자(論者)는 부란 가섭, 말가리구사리, 아기다시사홈바라, 바부타가전연, 산야비라지자, 니건자 등 여섯 명의 외도로 불교에서는 육사외도(六邪外道)라 부르는 이들의 이름과 사상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현재에 도를 닦아 현재에 갚음을 얻는가” 하는 물음에 각기 자기들의 주장을 폈지만 질문의 핵심에서 벗어난 답들이었습니다. 이사세 왕은 부처님께도 그와 같이 물었고, 부처님은 변화를 추구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속에 언제나 갚음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에 얻는 사문의 과보는 커다란 이상(理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 나타나는 조그마한 것으로부터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리하여 출가한 왕 앞에 나타난 신하나 종일지라도 예전의 왕이 아닌 현재의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아 평등의 법을 행한 자는 그들을 평등하게 보아 일어나 맞이하여 예경하고 인사한 뒤 앉기를 청할 것이라는 왕의 대답으로 사문이 현재 얻는 과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평등법을 닦는 데는 정근하고 전념하여 잊지 않으며 홀로를 즐기고 한정하여 방일하지 않아야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필경에 하나로 존재하면서도 그 하나인 존재에서 이탈해서 둘 혹은 여럿이기를 원합니다. 홀로이면서도 홀로가 아니듯이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혼자는 두렵고 혼자는 외롭고 또한 혼자서는 날카롭고 뾰족한 분위기를 갖기 때문인지, 긴장의 불안에서 벗어나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속에는 그리움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사문은 혼자인 외로움의 하나인 두려움과 긴장에서 오는 날카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근하고 전념하면서 홀로를 즐기고 한정(閑靜)하여 방일하자 않습니다. 내가 한자리에서 한마음이 되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은 꿈이 아닙니다. 현실이며, 어디서나 언제나 홀로이면서도 여럿이 함께 하듯이 외로움과 두려움이 없는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참다운 우리의 삶이 나의 목숨처럼 탄생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