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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7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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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구효서 1990년 03월 97호
결국 세상은 이렇게 되어가게 돼 있었던 거야. 내 생각이 딱 맞았어. 세상은 파멸의 종국을 향해, 시간이 갈수록 맹렬한 빠르기로 치닫고 있는 거라구. 그 처참한 최후를 내 눈으로 보기 전에 난 차라리 내 의지로 내 목숨을 끊는 게 낫겠어. 수면제? 그래. 아무런 고통이 없이 잠자듯 그렇게 죽어버리는 게 아무래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장광설 씨는 요즈음 죽음에의 유혹과 연일 가열한 싸움을 벌이느라 몰라보게 몸이 수척해 있었다. 그는 죽고 싶었다. 서른일곱에 정년퇴직이라니. 그가 태어나던 1990년에도 직장인의
정년은 65세나, 적어도 55세는 됐었다지 아마 서른일곱에 퇴물로 나앉아 그 많고 많은 시간을 어떻게 지내란 말인가. 알지 않는가. 사람은 일이 없으면 못 산다는 것을. 인간이 해야할 일을 모두 기계에다 빼앗기고 매일 할 일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울분을 푸는 것도 이젠 지쳐 버렸던 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기계파괴정년퇴직자협의회(기파협)에서는 해머와 드릴을 들고 들어가 어느 자동차부품 생산업체를 박살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연행되어 구속되거나 구류를 살게 되었고, 당국에서는 앞으로 기파협의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폭동진압용 로보트를 증원배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을 장광설 씨는 이미 그가 국민학생 때인 2천년대 초반에 예상했었다. 아주 오래된 흑백영화‘혹성탈출’을 보면서 그는 결코 그것을 먼 미래의 지구운명으로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주차시설이 없어서 모든 차량들은 끝없이 노상 위를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얼마 안 있어 지구의 석유는 바닥이 날 것이며 석유 대체 에너지 또한 조만간 다떨어져 버릴 것이라는 걸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동차 생산을 줄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동차 회사에 밥줄을 달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은 어쨌든 자동차가 생산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 기업이 업종을 바꾸거나 노동자가 직종을 바꾼다고 해서 그 전체적인 과잉생산의 속도를 줄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줄이기로만 맘먹는다면 줄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줄이는데 필요한 사업은 더욱 엄청난 규모의 기계조직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오히려 종말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그냥 내버려두니만도 못했다. 누구의 말마따나, 사람은 살아야하며, 그 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1년에 3백 마리의 송어가 있어야 하고, 3백 마리의 송어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9만 마리의 개구리는 2천7백만 마리의 메뚜기를, 2천7백반 마리의 메뚜기는 1천 톤의 풀을 먹어야한다는 격이었다.
인력이 기계와 로보트로 대체되면서 이미 한해에 수백만의 인간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있으며 인간실업율은 더욱 무섭게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장광설 씨는 이러한 인류의 절박한 운명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모두가 기계를 버리고 원시사회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들이 자신의 문명적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고 그들을 설득시키고 홍보하고 교육한다고 치더라도 거기에 드는 예산과 에너지는 또 얼마나 엄청날 것인가. 역시 그냥 내버려두느니만 못한 일이었다.
장광설 씨에게 남은 문제는 이제 그 끔찍한 인류의 최후를 두 눈으로 보고 죽느냐, 아니면 스스로 안락한 죽음을 택하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새로 개발된 IBM 7084 컴퓨터 관리요원으로 회사에 남아 있을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컴퓨터에 아부 잘하기로 이름난 정이사한테 그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정이사는 근무고과평점 컴퓨터에게 장광설 씨가 변통없고 아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은밀하게 먼저 입력시켜 놓았던 것이다. 매사에 요령만 피우고 이기적이며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정이사에게 당한 게 장광설 씨는 무엇보다도 억울했다. 기계가 인간의 수보다 많아짐으로써 결국 세상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사람들이란 정이사와 같은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양심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서로 모함하고, 헐뜯고, 매도하는 것이 점점 미래의 바람직한 가치관인 양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루는 장광설 씨가 기파협 회원들과 함께 해머와 드릴로 무장하고 키메라 제과점을 습격했다. 키메라 제과점은 바로 장광설 씨가 정년퇴직할 때까지 몸담고 있던 회사였다. 폭동진압 로보트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어렵게 회사 마당까지 진입한 장광설 씨는 중앙전산관리실에 접근하기 직전에 우람한 경비 로보트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들 경비 로보트는 정이사가 직접 조종하는 중앙전산관리실 특별경호초병이었다. 초병은 장광설 씨를 정이사한테로 연행해 갔다.
“이봐요, 장광설 씨. 그따위 망치로 컴퓨터와 로보트 몇개 때려부순다고 당신들이 말하는 인간성회복혁명이 달성될 거라고 믿소?”
정이사는 연민스런 눈빛으로 장광설 씨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장광설 씨, 기계화 시대는 필연적인 역사발전법칙이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열역학 법칙이고 에너지 변형의 법칙이란 말이오… 그런데 장광설씨. 왜 그리 몸이 수척해졌소?”
왜 몸이 수척해졌는지 뻔히 알면서도 묻는 정이사가 괘씸했으나 정광설씨는 체념한 듯 고통스럽게 말했다.
“죽고 싶을 뿐이오.”
“죽고 싶다고요?”
“그렇소. 죽고 싶소. 나도 기계화 시대가 필연적이라는 걸 잘 알고는 있소. 당선도 결국은 그 기계의 희생물이 될 거라는 것까지도… 그래서 스스로 죽는 것에 대해 난 이미 2주 전부
터 밤낮으로 고민해 왔소.”
그러자 정이사는 온 얼굴을 부수며 홍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2주 동안이나? 으하하하하… 죽는 걸 가지고 2주일 동안이나 생각했단 말이죠? IBM 7084 같으면 그런 문제 따위는 1천만분의 14초만에 처리하는데… 역시 아둔하긴 아둔하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