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에서 상강으로 접어드는 무렵, 아직은 이슬로 맺혀 곤충의 마른 목을 축여 주는 수증기가 곧 서릿발져 그 곤충들을 위협하려 히는 즈음. 볕은 아직 따스하지만 바람결에선 어느새 금속의 차가운 기운이, 살아 있는 것들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냉기가 만져진다.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몸을 뉜 억새는 볕을 받아치며 쟁강쟁강 빛나고 한해 동안 움퇴우고 꽃피워 열매 맺던 과목들은 헐벗은 채 맞을 겨울을 예감하며 잎 끝이 누렇게 말라간다. 멀리 바라보면 한유로운 산과 들에서, 숨탄 것들은 저마다 지난 겨울의 기억을 되살리며 겨우살이 채비에 분주하다.
목숨을 내어 놓고 거둬들이는 사계의 순환은 어김없지만, 그러나 시간은 황룡사지를 안고 있는 도시 경주에 들어서면 한결 무디게 느껴진다. 잡담속에서 내몰듯 거칠던 시간은 한결 겸허해져 깊고 고요한 물살로 흐른다. 시간의 숨결을 가라앉게 만드는 건 경주에 머무르는 침묵이다. 남산어귀의 솔숲에도, 옛동산처럼 포근해 보이는 무덤에도, 이따금 솟은 고층아파트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집들이 나지막한 거리에도,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침묵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하늘은 땅을 짓누르지 않고 땅은 사람을 압도하지 않으며 사람은 히늘과 땅 사이에 또 그만하게 머무르는 존재라는 걸 환기시킨다.
하늘과 땅사이의 여백이 넉넉한 도시, 경주 월성 동쪽에 황룡사터는 또 다른 여백으로 남아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벌판 저 끝에 나무들이 다복다복 모여 있다. 분황사이다. 그 분황사를 바라보며 가다 보면 오른편에 조립식 건물 몇 동이 눈에 띄고 빙 둘러싼 낮은 담장이 보인다. 담장 바깥에는 황룡사터에서 발굴한 주춧돌어며 기와 조각, 전들이 발굴 장소대로 분류된 채 쌓여 있다. 황룡사터의 발굴은 1983년에 끝났지만, 주변의 민가터는 아직 발굴중이다. 모자위에 수건을 덮어써 가을볕을 가린 아주머니들이 풀을 벤다. 흙 속에 묻힌 과거를 현재로 이끌어들이는 작업중이다.
신라 최대의 절 황룡사는 진흥왕으로부터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4대 왕 93년에 걸쳐 이루어진 호국사찰이다. 황룡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많이 남아 있다.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쪽에 신궁을 짓는데 황룡이 나타난다. 왕은 이에 궁궐 대신 절을 짓게 하고 황룡사라는 이름을 내린다. 처음부터 절을 지으려 했으나 흥륜사를 중창하고 스스로 주지가 된 진흥왕이 구 년 만에 다시 절을 짓는 데 대한 반발을 우려해 궁궐을 짓는 걸로 가장했다는 추측도 있다. 담장을 쌓는데에만 십칠 년이 걸렸고,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으나 최종적으로 발굴된 황룡사는, 이만여 평의 터에 장륙존상이 있는 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 탑이, 북쪽에 강당이, 금당 좌우로 동금당과 서금당이 있고, 남쪽동서에 경루와 종루가 자리하고, 회랑이 이를 빙 둘러싼 것으로 드러났다. 회랑은 죽 이어진 여느 회랑과 달리 모서리와건물 사이가 떨어진 독특한 형태이다.
주춧돌만 여실한 빈터, 정면 한가운데는 목탑지이다. 사방 일 미터쯤 되는 장방형 주춧돌이 가로세로 여덟 줄, 도합 예순 네 개가 가지런하다. 그 한가운데, 탑의 무게중심을 떠받치는 심초석만 지상에 도드라진다. 신라땅에 와서 신라의 국력 신장을 기원하는 탑을 세웠던 백제 장인 아비지의 갈등이 어렸던 심초석이다.
황룡사탑은 선덕여왕 때,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지장의 건의에 따라 세워진다. 지장이 중국에 머물때, 태화못가를 지나는데 신인이 나타나 말한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한다.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큰아들이요, 범왕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절 안에 구층 탑을 세우라. 그러면 이웃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왕업을 길이 보존할 것이니라.” 목탑 건축 기술이 발달했던 이웃 나라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빙해 오고 이백여 명의 인부가 이 년 동안 탑을 세우게 된다. 심초석 위에 중심 기둥을 세우던 밤, 아비지는 꿈에 고국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본다.
불국이라는 큰 나라를 위한 일이긴 하지만, 유사시에 적국이 되어 버리는 신라를 위해 탑을 쌓던 아비지는 기연가미연가 하면서 일손을 멈추어 버린다. 그러자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願門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 사라지고, 아비지는 일손 멈추었던 걸 후회하고 탑을 짓는다. 상륜부까지 합하면 높이 팔십 미터에 이르는 9층 목탑의 각 층은 각각 일본, 중화, 탐라, 말갈, 여진, 예맥 등의 나라를 상징한다. 지장은 탑 안에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온 부처의 진신사리 가운데 일부를 봉안향다. 탑이 완성된 지 이십삼년 만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해, 신인의 예언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절이 별같이 가득하고 탑이 기러기 떼처럼 이어지던’ 도시 , 경주 어느 곳에서든, 하늘을 향한 염원으로 치솟은 황룡사 탑은 한눈에 들어와 신라 사람의 마음에 경건함이 떠나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귀신의 힘으로 한 듯이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채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라고 일연이 찬한 탑은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며 다섯 차례 벼락을 맞고 중수를 거듭했으나 고려 고종때인 1238년에 몽고의 난으로 불타고 주춧돌만 남는다. 십여 년 전, 아비지를 기념하는 비 하나가 목탑지 곁에 세워져, 사람이 세운 인위적인 국경을 넘어 탑을 세운 공덕을 기린다.
목탑지 북쪽은 정면 아홉 칸, 측면 네 칸의 금당이다. 역시 주춧돌만 남은 금당 한가운데, 금동장륙상의대좌가 세 개 남아 있다. 장륙상은 부처의 키인 1장 6척에 맞춘 불상이니 요즘 수치로 치면 높이가 4 .8미터에 이른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밟아 넘어지는 걸 막느라 지면석을 다듬은 뒤 불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서 넘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대좌의 동그스름한 홈 뒤편, 광배를 꽂았던 네모진 구멍에 물이 고여 있다. 진흥왕이 세상을 뜨기 한해 전, 가뭄이 심하던 그 해, 가뭄에 배배 마르는 목숨들이 안타까워선지 이니면 기록이 전하는대로 진흥왕이 세상을 떠날 것을 예지해서 인지 장륙상이 흘린 눈물이 발꿈치까지 내려왔다는데, 그 눈물도 어쩌면 홈을 타고 흘러 저 구멍에 고였을지도 모른다. 개구리밥인지 좁개구리밥인지 모를 물풀이 그 좁다란 구멍에 고인 물에 뿌리내리고 무심히 떠 있다. 부평초, 천사백 년 전에 돌에 판 구멍 안에서 연둣빛으로 파릇하다.
장륙상을 조성한 금동은 바다 건너에서 왔다. 진흥왕때, 울산 근처의 바다에 배 한척이 다다른다. 그 배에는 ‘서축 아육왕이 누른 쇠 오만칠천 근과 횡금섬 반푼을 모아 석가존상 셋을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빌기를, 부디 인연 있는국토로 가서 장륙존상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 는 기록과 부처 모형 하나, 보살상 모형 둘이 실려 있다. 이 쇠와 금을 부어 불상을 조성한다.
아육왕은 부처 열반뒤 백 년 만에 태어났으니, 기록대로라면, 아육왕이 바다에 띄운 배는 인연닿는 땅을 찾아 천 삼백 년 동안 떠돈 것이다. 그토록 지중한 인연이 경주에 닿은 까닭은 뒷날 자장이 중국 오대산에서 만난 문수보살의 회신에 의해 밝혀진다. “황룡사는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육왕이 바다에 띄운 철이 천삼백 년이 지나서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이루어지니 이는 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인연 따라 조성된 장륙상은 몽고난의 화를 피해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기록은 전하나, 언제 없어졌는지 자취없다.
황룡사종은 경덕왕 때인 754년에 만들어졌으니 절을 세우기 시작한 때로부터 이백 년 뒤의 일이다. 높이가 3미터가 넘고 무게가 오십여만근에 이르는 큰 종으로, 성덕대왕 신종의 무게가 십이만근이니, 황룡사종은 이의 네 배가 된다. 9층탑을 잿더미로 만들고 절을 모두 불태워, 새가 날아와 앉으려 했다던 솔거의 벽화까지 없애버린 몽고란때 종도 없어진다. 몽고군이 종을 바다로 실어 내가려다 실패, 대왕암부근에 가라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올해 초, 이 종을 찾기 위한 탐사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당패에 이루어지는 걸 보겠다는 욕심 없이 담장 하나를 쌓는 데 십칠 년 동안 공력을 들이는 끈기, 인연 닿는 곳에서 불상이 조성되기를 기원하며 언제 어디에 닿을지 모르는 배에 철을 실어 띄우는 간절함, 나라의 번창을 기원하는 탑을 남의 나라 장인의 기술에 의탁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짓는 열린 마음, 새가날아와 앉을수 있도록 기심 없는 솜씨로 그린 벽화…. 황룡사를 이룬 마음에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만도 없고, 눈 앞에서 이루어지는 걸 보겠다는 조급함도 없다. 때가 되면 목숨들을 표면으로 떠올렸다가 다시 때가 되면 가라앉혀 거두어들이는 시간의 깊고 유장한 흐름에 대한 믿음, 잠깐 떠올랐다 다시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며 세상을 일구고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이 모여 이루려 부처의 나라가 있을 뿐이다.
불상도 탑도 종도 당우도 다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은 빈터. 한편에 남은 우물 안에는 철망이 쳐져 있고 그 아래 물이 고였다. 천 몇백 년 전에도 그 물길 따라 흐르고 고였을 물이다. 사람의 공력으로 이룬 모든 것들을 역시 사람의 손길로 태워 없앤 불길, 돌조차 달궈서 그 안에 든 광물질이 발갛게 배어 나오면 거센 불길조차 말리지 못한 불길 타고 온 물은 철망으로 조각난 하늘을 담는다. 우물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눈에 지금 보이는 저 물은, 땅과 하늘을 오가며 수증기로 이슬로 서리로, 더러는 비와 얼음으로 얼마나 여러 번 바뀌었는지. 그렇게 몸 바꾸면서도 변치 않는 성질로,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내 지금 저 우물에 이르렀는지 .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