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佛古祖와의 다정한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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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90년 03월 97호
출가(出家),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한 생각이다. 음력 2월 초여드렛날 싯달타가 성을 넘어 출가한 날이다. 온갖 부귀영화를 낡은 구두 벗어버리듯 던져버리고 새로운 각오와 자아의 완전한 추구를 위해 떠나간 달이다. 역대로 모든 조사들도 각기 언제인가는 집을 나와 구도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산이 있었다. ‘산(山)은 생동감이다. 풀죽어 늘어진 시들시들한 형태가 아니라 펄펄뛰는 생명을 부여잡고 한바탕 생(生)과의 대교섭을 벌이는 것이다.
‘산(山)’은 그러므로 ‘죽은’의 반대개념이다. 생명의 풀무간이다. 생명의 풀무간에서 새로운 생명은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번뇌로 엉겨붙은 온갖 불순물을 떨어버리고 날카롭고 산뜻한 지혜의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산은 그러기에 그대로가 도량(道場)인 샘이다. 사원(寺院)이다. 출가를 다른 말로 입산(入山)이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출가(出家)란 글자 그대로 집을 나오는 행위다. 집이란 욕망과 번뇌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불타는 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나온다’, ‘벗어난다’고 하는 말은 아주 아이러니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디 출(出)자는 산(山)이 세로로 겹쳤다기보다는 풀초(艸)자를 종적으로 포개놓은 것이다. 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해토(解土)된 지표를 뚫고 땅위로 솟아오름을 표현한 글자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싹이 위로 솟아오르는 것만큼 뿌리는 땅속으로 더욱 깊숙히 뻗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미산이 위로 솟아오른 높이만큼 향수해 아래로 잠긴 부분은 깊은 것과 같다. 빙산이 바다속에 잠긴 부분과 수면 위로 떠오른 부분은 언제나 비례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벗어난다는 의미와 떠난다는 의미를 지니 ‘출(出)’의 본뜻은 초월’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집(家)’이란 ‘돼지(家)우리(穴)’를 뜻한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그리하여 갖가지 냄새 나는 오물로 가득한 돼지우리 그것이 집〔家〕의 본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사바세계라 일컬어진다. 참고 견디는 세계〔堪忍世界〕란 뜻이다. 온갖 욕망과 번뇌, 갈등과 부조리 등을 감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계다. 이러한 세계를 공간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출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 머물면서 그러한 세계를 아름답고 깨끗한 세계로, 스스로 가꾸어 가는 주역이 되고자 노력함이 출가의 본뜻이라면 잘못된 말일까?
어쨌든 출가한 이상에는 출가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공간적 이동이든, 또는 방포원정(方布圓頂)으로 형태를 달리했든, 초월이든, 출가자의 목적이 있고 목적을 향한 어떠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종조(宗租)에 해당하는 태고보우(大古普愚:1301~1382)선사의 말씀 가운데 ‘진선인(眞禪人)에게 보인글’을 한 번 보자.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으니 장부의 뜻을 세우고 용맹심을 내어 무상(無常)의 신속함과 나고 죽음이 큰 일인 줄 깊이 믿어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았거나 눕거나간(間)에 언제나 이 일에 매(昧)하지 말고 간절히 참구하라. 마치 어떤 사람이 천 길 웅덩이에 빠지면 천 생각 만 생각이 오직 거기에서 빠져나오기만을 궁리한다. 그처럼만 한다면 머잖아 거기에 알맞는 소식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공력을 드리고도 만일 성취하지 못한다면 불법이 영험이 없다 하리라.”
공부를 하는 데는 어떠한 목적이 뚜렷해야 할 것이다. 목적이 없는 공부는 중도에서 싫증을 낼 우려가 있다. 공부를 하는 학인(學人)은 세 가지 커다란 마음을 내기를 권한다. 그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용맹심이다. 나머지 큰 의심과 큰 분심은 용맹심이 투철하다면 자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용맹심을 내어야 하는가. 그것은 덧없는 세월과 덧없는 인생이 생각보다 너무나 짧고 빠르기 때문이며 그 짧은 인생의 기간에 해결해야 할 생사문제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데 이미 인간의 몸을 받은 이상 어떻게든지 이 나고 죽음의 문제를 결판내어야 할 것이므로 용맹심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용맹심의 내용은 심일경성(心一鏡性)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옛날 향엄(香嚴)스님은 대나무에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달았으며 영운(靈雲)스님은 복사꽃을 보고 마음을 밝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는 생각해 보라. 누구나 온종일 모든 행위에서 다만 그처럼 또록또록하고 분명하여 이 일에 매하지 아니하며 잡념이 없이 순일하여 동(動)과 정(靜)에도 그러하고 어(語)와 묵(默)에도 그러하며 오(悟)와 매(말)에도 그와 같이 한결같으면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는 데서 어쩌 향엄이나 영운과 같은 스님이 없겠는가?”
조사와 부처님이 다른 이가 아니다. 본디 평범한 우리네와 같은 데서 출발하여 피나는 수행과 구도의 집념 끝에 마음의 실상(實相)을 깨달아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된 것이다. 생리적 현상이나 육체적 구조가 우리네와 같다. 이미 우리가 그 분네들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인들 못할게 뭐가 있겠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가느냐다.
은법사(恩法師)이신 고암(古庵) 큰스님을 찾아뵙고 삼배를 정중히 올린 뒤 여쭈었다. 79년 여름이었다. 당시 큰 스님께서는 조계종 종정으로 계셨다. 용탑에서다.
“불조(佛祖)와 중생은 어떠한 관계에 있습니까?”큰스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내 앞으로 걸어 오셔서 손을 덥석 잡으시었다. 나는 다시 여쭈었다. “부처나 조사와 저희들 평범한 중생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큰스님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용성노사(龍城老師)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 향 하나를 사르고 자리에 앉으셨다. 답답했다. 뭔가 말씀이 있으셔야만 했다.
“뭔가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이 때 큰스님께서는 당신께서 앉으셨던 좌복을 들어 나에게 앉으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막 앉으려는 찰나에 외마디 소리가 있으셨다.
“정휴! ” 그때 나는 엉겁결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네 ! ”하고 대답했다. 내 법명은 정휴(正休)다. 동봉(東峰)은 그 뒤에 받은 법호다. 큰스님께서는 다시 한 발짝 앞으로 오셔서 내게 악수를 청하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알겠는가? ”하셨다. 모를 일이다. 지금도 당시 큰스님께서 왜 나의 물음에 답은 하시지 않고 그러한 행동을 취하셨는가 모를 일이다. 물론 나름대로 해석은 내릴 수 있다. 다만 그 후 얼마 뒤 찾아뵌 나를 향해 “눈코를 쥐어뜯고 열심히 하게”하신 말씀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 부지런히 힘쓰는 일 외에는 없다.
태고 보우국사의 말씀을 마저 보자.
“참선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경책하고 점검해 보라. 자기의 공력(功力)이 옛사랍과 같은가 다른가 만일 부족한 점이 있으면 천만번 스스로 경책하고 다시 장부의 뜻을 가다듬어 시시각각 일체의 선악을 모두 생각지 말라. 바로 그러한 때에 ‘어떤 것이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를 잊지 말고 간절히 참구하라. 그러면 문득 마음이 더 갈데가 없어서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 급기야 날카로운 자는 여기에 다달이 무명(無明)을 쳐부술 것이니 그 뒤에는 지혜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말고 반드시 본색종사(本色宗師}를 만나보도록 하라.”
출가한 이들의 목적은 깨침에 있다. 깨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출가는 어찌 보면 사실의미가 없다. 출가는 되돌아오기 위한 준비다. 본질적 자아가 살아 숨쉬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소식, 본래면목에로 되돌아가기 위한 준비단계다. 거기에 되돌아가야(와야) 부처님과 조사들이 처한 자리에 대등하게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와 조사들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바세계에서 항상 함께 숨쉬고 있는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많은 사람과 만난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노인도 있고 젊은이도 아이들도 있다. 지위가 높은 이도 있고 평범한 이도 있다. 잘 사는 이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다. 이들은 누군가 본래로 부처의 속성을 지닌 이들이다. 어느날 문득 한생각 돌이켜 조사가 될 이들이다. 이들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산다.
그러나 진정한 손잡음이란 여러번 부정을 거쳐 거듭 태어난 뒤에 한다.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태고 보우국사의 말씀처럼 진정한 출가자의 본연의 길을 걷고 난 뒤라야 가능하다. 뿌리없는 싹도 존재하지 않거니와 싹이 없는 뿌리 역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