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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등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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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0년 03월 97호
선재는 이제 고백을 해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데이트를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이상 그녀를 속일 수가 없었다. 모델 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가 불쌍했다. 그녀는 선재와 결혼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선재는 화려한 생활을 꿈꾸고 있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선재 자신이 대책없이 게으르고 무능력했다.

선재는 육개월 전에 그녀를 만났다. 친구 녀석이 장난 삼아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장소를 알려왔다. 선재 역시 별 생각없이 그곳으로 나갔다. 그러나 친구 녀석이 나오지 않은 것은 걱정했던 바대로였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다방 안에서 미지근한 엽차를 반쯤 마시고 있을 때였다. 늘씬한 여자가 선재 앞으로 다가와 눈을 반짝거렸다.
“저어, 선재 씨 아니세요?”
“그런데요? ”
선재는 대수롭지 않게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까지도 친구가 소개해 주겠다던 여자애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어리둥절해 있는 선재를, 그녀는 여전히 눈을 반짝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불굉동에서 오셨죠?”
“아 그러세요.”
그제야 선재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선재보다 키가 한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이런 인연으로 만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만났다 헤어지곤 하였다.

데이트 때마다 돈은 선재가 쓰는 편이었다. 그녀는 모델도 하고 나중에는 영화배우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모델들보다 연기력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모델 출연을 하더라도 주연이나 조연급이 못 되고 배경으로 깔려 스쳐지나가는 배역만 맡았다. 그래서 그녀의 모델 출연료는 밀린 점심값이나 계산하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일류 모델이 될 수는 없지 ! ’ 선재는 그녀가 성공할 때까지 되도록이면 잘 참자고 스스로 다짐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사소한 지출쯤은 감수해야 된다고 믿었다. 택시비와 차값은 대부분 선재가 부담했다. 또한 선재는 그녀의 생활태도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부자집 딸답지 않게 검소했다.
“전 아빠 엄마의 재산에 관심없어요. 자가용 사준다고 한 아빠의 제의를 거절했어요. 자립하겠다는 제 생활신조에 어긋나거든요. 드라이브 같은 것에 신경쓰기도 싫구요.”
이런 말을 그녀가 할 때마다 선재는 부끄러웠다. 선재는 스스로 자신의 솔직하지 못한 마음을 나무랬다. 그녀는 아직도 선재의 말을 믿고 있을 것이었다. 선재는 언제나 그녀 앞에서 엄청나게 큰 목장 주인의 아들로 행세해 왔던 것이다.
“목장 안에 우유생산공장만도 두개나 있지.”
“젖소가 500마리쯤 될 거야”
“찝차로 소떼를 모는 엄청난 목장이라구 !”
이처럼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는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선재에 대한 믿음을 갖는 듯했다.

그런데 선재는 그녀와 입맞춤을 한 다음주부터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단 의심의 눈으로 그녀를 보기 시작하자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왜 그녀 집으로 초대하지 않는 것일까?’
‘가끔씩 복통을 호소하면서도 왜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왜 친구가 없을까?’
그렇다고 해서 선재는 직접 그녀에게 물어보기는 싫었다. 그녀를 의심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를 만나도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쓰는 돈도 아까왔다. 그녀가 투정을 부려도 마음이 동하지를 않았다.

“선재 씨, 다른 여자 생겼나 봐.”
그날도 그들은 밤 늦은 시각에 저녁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물론 선재는 그녀가 저녁값을 지불하도록 신발끈을 매만지면서 뭉기적거렸다. 그러고는 중국집을 나와서 등을 돌렸다.
“잘가 오늘 집에 친구들이 오기로 했어.”
“안녕.”
그녀는 별 생각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때부터 선재는 그녀의 뒤를 미행했다. 다행이었다. 그녀는 버스를 타지 않고 시내를 벗어나 변두리 쪽으로 걸어갔다. 선재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달동네 골목 입구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보였다. 선재는 꺾어진 골목 부근에서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디멀었다. 바로 그때였다. 외등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노파가 일어섰다.
“작은 애야…”
노파는 그녀의 어머니가 분명했다. 그녀를 부르면서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선재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외등 밑에서 딸을 기다리고 있던 노파의 모습은 선재의 어머님 모습과 너무도 비슷했다. 형제들의 귀가 시간이 늦어질 때마다 외등에 불빛이 내려앉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곤 하던 그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래,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그녀에게 사실대로 고백해야지. 그러는 것이 그녀 어머니한테 죄 짓지 않는 길인지도 모르지.’
‘자식의 거짓말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지식의 편이 되어주는 보살 같은 분을 위해서
거짓사랑을 고백해야지.’
선재는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휘적휘적 골목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외등이나 다름없었다. 골목의 어둠을 몰아내는, 선재의 마음속에 깃든 악귀를 쫓아내는 밝은 빛살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