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에 온조가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내려와 한강 남쪽에 터를 잡으니, 백제의 역사는 그렇게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비롯됨의 터전이 되었던 위례성은 아직도 명쾌히 밝혀지지 않고 달빛 속에 묻혀 있다. 이마도 이 언저리 어딘가에 있었을 위례성이 달빛 속에서 걸어 나와 역사가 될 날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광주의 남한산성 자락에는 유난히 장승이 많다.
전국에서 고루 발견되는 돌장승이 아니라, 두세 해 만에 한번씩 새로 깎아 세우는 나무 장승이다. 그것들은 풍년을 기원하고 액맥이를 바라기에는 하찮아 보인다. 그러나 목숨이 일정한 것들이 그것에 기대어 연년히 세롭게 담아보는 안쓰러운 소망까지 하찮을 수는 없을터였다
혜담스님, 이 장송골에다 중생의 그런 소망들을 그러모으는 참한 기도도량 하나 마련해서 부처님께 바치고 싶어 한다.
찻길에서 마을을 지나 절까지는 걸어서 한 이십 분. 시멘트로 덮인 것이 못내 아쉽도록 참한 길이다. 마주 오는 차가 교행하기에는 어림없을 만큼 좁은 길 주위로 펼쳐지는 산은 그러나 세가 만만치 않아서 강에 붙어 낮게 달려오던 마음을 한 호흡 올려 놓는다. 시월도 마지막이었다. 잡목숲은 성글어 보이고 사이사이 박힌 소나무는 뭉치어 보이는 가운데, 서로 어울리어 이루는 조화가 꿈 같은 곳이었다.
신라 때 지어진 절이었으나 임란 때 폐사가 된 곳으로 짐작된다 했다. 요사채 앞에 본디 자리를 잃고 뜻 없이 쌓인 석등대, 주춧돌은 예사롭지 않으나 이 절터의 비롯됨을 알리는 다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전에 살던 스님에게서 스무 해쯤 전에 이 곳에서 찬란한 옥불이 발견되었으나 인천 어느 곳으로 팔려 갔다는 말도 들었다 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끌리는 마음이 하도 간절하기로, 그 옛날에 이 절의 대중으로서 절의 폐사를 막지 못한 대죄를 지었다가 이 곳에 다시 보내졌다고 그는 믿는다. 그러나 그 때에 “귀중한 무엇”을 훼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한 데에 숨겨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곳에 와서 실제로 나름대로 애써 찾아보기도 했으나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귀중한 것은 무엇일까. 혜담스님은 궁금하다.
혜담스님은 출가본사인 범어사에서 사교를 보다 말고 광덕 은사 스님의 독려로 동국대학 승가학과 1기생으로 입학했다. 수행자도 여건만 주어지면 대학 과정은 마쳐야 한다는 것이 은사스님의 믿음이었다. “쟁쟁한”승가학과 1기 동기생들과 함께 “참 소중한” 네 해 동안의 수학기를 거치는 동안 은사 스님의 믿음은 곧 자신의 믿음이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까지만 해도, 자신이 궁구할 바 본래 면목 밝히는 길이 참선 이외의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두어 본 적이 없었으니, 12월 25일 졸업식 다음날로 걸망을 싸서 내려갈 만큼 급하고 간절한 것이었다. 지리산 칠불암에서 한 철을 살고, 뒤이어 해인사 퇴설당에서 한해 동안 가행 정진을 했다. 그 때에 함께 포단에 앉았던 스님들은 공부에의 뜻과 수행의 태도가 한결같이 참신하고도 짬졌으니, 피차 공부의 큰 스승으로 삼을 만한 도반들이었다.
그러나 해병대 대위 계급으로 군 법사노릇을 하던 중에, 제대를 두 달 앞두고 맞닥뜨린 10·27법난은 그의 개인사에서도 큰 사건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선방으로 갈 마음에 제대까지 서두르던 그의 발길은그 자리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그 큰일 앞에서 산중의 큰스님들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참선으로 이룬 바, 생사는 벗어났을지 모르나 승단을 위험에서 구할 힘을 내는 것은 아니로구나. 그가 품어 본 그림은 소박한 것이었다. 그 어른들 중 어느 한 분만이라도 조계사 큰나무 아래 곡기 끊고 좌중하고 앉으시는 것이었다. “투쟁” 이란 말 쓸 것 뭐 있는가. 그저 이 곳에서 나 수행중이네. 이 한 말씀만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무리한 청이었겠는가. 아닐 터였다. 그저 그렇게 앉아 계시기만 해도 그 뜻이 천파만파로 퍼져 나가 법난에 처한 스님들은 하나로 뭉칠 수 있을 터였다.
아쉽고 아쉬웠다. 그 생각은 오늘에까지 변함이 없어서, 참선이란 스님들이 두세 해는 수행의 과정으로꼭 거쳐야 할 것이기는 하나, 스무 해고 서른 해고 그것에만 매달릴 것은 아니라 여긴다.
그는 92년 7월에 「대품마하반야바라밀다경」을 번역해 상하 두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것이다. 대승 불교 운동의 선구 경전인 반야경은 모두 육백 권으로 된 반야 사상 관계 경전을 통칭하는 말인데, 스물일곱 권찌리 (대품반야경, 열 권짜리 구마라집의 소품반야경)가 있는가 하면, 금강경, 반야심경 등으로 분량이 극도로 줄어진 것도 있다.
반야심경은 글자수효가 삼백에도 못미치면서 반야사상의 요체를 담은 것으로 봄직한 것이어서 승속을 막론하고 두루 사랑받는다. 반야경이 중요하다 함은 그것이 대승불교의 선구 경전일 뿐만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기본 교학이자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계종이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인데도 우리나라 불교 학계에서 반야사상을 전공한 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 그가 86년에 일본불교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불교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부터 “반야심경 공부하러 유학까지 왔느냐” 는 질책성 물음까지 받아야 했다. 자금은 사정이 조금 달려졌으리라 믿고 싶지만, 아직 연구 논문 한편 제대로 된 게 없는 형편이니, 말로만 소의경전일 뿐 실제 대접은 소홀하기 짝이 없음이 안타까워 대품반야경을 번역할 마음을 낸 것이다. 수지, 독송하기에 좋으면서도 대반야경이 펼쳐보이는 사상을부족함없이 설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번역의 변이다.
82년부터 머물기 시작한 서울의 불광사에서 십 년 가까이 법사 노릇을 하며 살았다. 기도할때에도 반야심경을 외게 하는 곳이었다. 그것이 설하는 바 핵심이 될 공空 사상은 광덕 은사 스님의 곡진한 법문으로 단란한 씨앗 하나가 되어 그의 가슴에 심어졌다. 그렇게 해서 떠난 유학이었다.
돌아와 세 해 가까이 양평의 토굴에서 혼자 밥지어 먹어가며 「대품반야경」을 번역해 낸 뒤로도, 반야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행법을 살펴보는 「반야불교 신행론」(97년)과 법보신문에 연재한 글들을 묶은 「산新 반야심경 강의」(97년)를 펴냈다.
“반야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정불국토爭佛國土, 성취중생成就樂生” 이란 것입니다. 불국토는 다시 맑힐 필요가 없는 것이니. ‘사바를 불국토처럼 맑힌다’ 는 뜻으로 풀 만합니다. 그것은 ‘주변에 대한 정화’ 죠. 그러나 그 일의 주체가 되려면 모든 헐떡거림이 멈춰지고, 성숙된 자아를 갖춘 뒤에라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취중생이라 한 것입니다. 저마다 미혹에서 벗어나 진리의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신성한 인격을 완성하게 되면 사회는 저절로 맑아지게 됩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을 만큼” 한 십 년 참 바삐 살았다고 했다. 십 년을 되짚어 보니 그가 유학길에 올랐을때부터가 되었다. ‘대품반야경에 있어서의 반야바라밀 연구’ 라는 논문으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 강단 설염은 없었으나 박사 과정으로 연구 생활을 이어 갈 뜻은 애초에 없었다. 저자에 몸을 나투되 공부하는 스님으로서 자신의 뜻을 전하리라. 포교에서 중생과 만나는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현장이 이 나라에 산재해 있는 개개 사찰일 터인즉, 공부하는 스님의 면모가 가장 절실한 곳이 바로 절을 지키는 주지 소임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귀국한 뒤에 양평 토굴에서 혼자 엎디어 역경을 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 따위를 책으로 펴낸 것은 그런 의미로 풀어야 할 듯하다.
제대를 하고 난뒤 부산의 포교당을 맡아 나갔다가 석 달 만에 줄행랑을 쳤었다. 서른서너 살 될 무렵, 신도들이 그의 글공부를 방해하는 무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였다. 경전공부 욕심은 나이 한 마흔이면 없어지려니 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쉰이 다 된 지금, 그 마음도 함께 붙이고 살아가기로 했다.
“어딜 가나 거기가 내 자리요, 내가 선 자리마다 진리의 자리”일 터이니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몸 사리지 않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려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개혁 불사 이후로 총무원에서 호법부장 소임을 맡으면 맡는 대로, 주 2회의 횟수로 따져서 오년째가 되어 가는, 불교 방송에서 신행과 교리를 상당해 오는 불자들과 만나는 자리인 “자비의 전화”진행자로서, 법보신문과 불교신문의 경전 강의 연재 몇 논설 위원으로서, 지금 맡고 있는 불교방송후원회 회장으로서, 그리고 적잖은 횟수의 법회 자리에서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삶의 순간’이라는 믿음을 몸으로 실천해 온 것이다.
그의 이력이 그러하거니와, 판단 내린 바 마음 먹은 바를 일로 추어 나가기에 주저함이 없고 거침이라고는 없어 보여 외람되이 여쭈어 본다.
성취중생하는 일 거들자면 기본적으로 갖출 바가 중생에 대해 동체대비하는 따뜻한 마음일 터였다. 스스로 판단컨대 과연 그러하신가. 불순한 뜻이 담긴 말이니 불손하기 찍어 없을 이 딴지걸기에 하릴 없이 넘어지시나 싶을만큼 즉답이 나온다. 아니라 했다.
자비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큰일이라 했다. 따뜻하고 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성 쪽에 서 있는 편이라 했다. 그러나 자비심 기르고 난 먼 뒷날에 새롭게 이룰 삶에 대한 기대보다는, 기르기 위해 부지런히 애쓰는 오늘의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했다.
그는 함께 살고 있는 상좌 스님과 함께 다섯시에 아침 예불을, 저녁 예불은 사월부터 삼십 분을 당기어 저녁 여섯시 번에 올린다. 급성 간염에 걸린 줄도 모르고 때를 놓쳐 만성 간염에 이른 몸을 회복시키느라 대여섯 달 운기조섭할 때 말고는, 출가한 뒤로 그 의식만큼은 삼가지키어 걸러 본 적이 없다. 누구나 해야 할 일이나 모두 다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출가한 몸이라면 예불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것은 부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의 태도이자, 나날의 삶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일 터였다.
오늘 그에게 전화해 보라. 불교 방송국에 갔다가 두시까지는 돌아오겠으니…
수요일과 목요일이면 이런 내용이 응답 전화기에 녹음되어 있을 것이다. 달리 ? 밝히지 못할 따위의 -갈 데란 없애 두고 살고 있으니 행처를 밝힘에도 주저함에 없다. 견처가 분명하지 않고서는 그 또한 힘든 일일 터였다.
각화사가 등 대고 있는 산은 용마산, 시간 반이면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 혜담스님은 일쑤 그 산에 오른다. 컴퓨터 자판기 앞에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어 굳어진 몸과 마음을 풀러 간다. 그러나 때로는 하남시가 주산으로 삼고 있는 검단산에까지 다녀온다. 백제 때 남한산내 장경사에 머물던 검단스님이 이 산으로 들어와 도를 깨쳤다는 산, 하남 위례성의 위치가 학자마다 분분한 가운데, 온조 임금이 하늘을향해 제를 올리던 단으로 짐작되는 것이 발견되기도 한 산이다. 이름의 연원이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혜담스님, 그 산에 올라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있는 것 다시금 확인한다. 그것은 제를 올리며 하늘의 감응을 빌던 백제 사량들의 정성일 수도, 부처일 수도, 저마다 지니고 있는 본래 면목일 수도 있을 터였다.
“지금 목욕 갑니다. 아홉시까지는 돌아올 터이니….”
제가 밥을 먹습니다. 제가 길을 떠납니다… . 제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늘 심고心告 한다는 동학교도처럼, 출타 전 전화기에다 제 행방 알린다. 아마도 스스로의 마음에 일러두는 말일 것이다.
향아설위向我說位의 뜻이 그러하다. 그가 찾으려 애쓰는 것, 각화사 절터 어딘가에 깊이 묻혀 있을 “귀중한 무엇”은 아마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