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해인사의 산내암자 - 한 점 돌로 남은 벽암의 푸른 숨결, 국일암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가람의 향기 - 시명 1993년 08월 138호
7월의 장마는 지루하다. 먹구름이 한바탕 소낙비라도 쏟을 것 같은 날 숲으로 들어가면 음습하고 땅거미가 진 것처럼 어두컴컴하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연신 하늘을 불안스레 쳐다보며 국일암을 찾은 시간은 늦은 오후.
좁은 마당을 사이로 몇 송이 장미가 주위 어둠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선연하고 댓돌 위에 흰 고무신이 얌전하게 놓여 있었지만 문은 열어 보지 않았다. 국일암의 산 역사인 정인貞仁 노비구니 스님을 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당초의 내 마음은 알루미늄 샷시 문을 보는 순간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리고 뒷뜰로 가서 새로 짓는 콘크리트 신축 법당을 보는 순간, ‘오! 여기마저도 불사 경쟁에 휘말리다니... 죽은 참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은 그 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차라리 오지 말고 옛 국일암을 맘속에 그리고 글을 쓸걸’하는 후회가 앞섰다.
국일암의 초창연대는 언제쯤인지 알 수 없고 1642년 임오년에 벽암각성碧岩覺性 대사가 이곳에 주석하였으므로 그 뒤로 이 암자를 국일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국일國一이란 벽암각성 대사가 인조에게 받은 호이다. ‘해인사의 인물열전’에서도 밝혔듯이 벽암대사는 진묵도인의 제자로 1624년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팔도총섭으로서 승군을 독려하여 삼 년만에 성을 완공한 공으로 인조에게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는데, 흔히 그를 국일대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찍이 그는 보은사 주지를 역임하였고 쌍계사와 송광사 주지도 역임했던 고승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승 삼천 명을 규합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북상하였으나 그 때 강화가 성립되었으므로 지리산으로 올라갔다. 따라서 그의 행적으로 보아 각성대사는 선과 교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출중한 남아대장부로 사명대사의 뒤를 잇는 애국자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국일대사가 이곳에 주석한 이후 삼백 년 동안의 사적은 알 수 없고, 최근 1942년에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던 경하景霞화상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 1948년부터 정인 비구니 스님이 감원이 되어 산신각을 신축하는 등 가람 수호에 전념해 왔다.
국일암은 해인사의 어느 암자보다도 호젓하다. 비록 약수암과 이웃하고 있기는 하지만 암자답게 다소곳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결코 크거나 화려하지도 않기 때문에 암자다운 정감을 느낄 수 있고 산에 피어나는 산꽃처럼 소박하고 그윽하다. 대개 큰 절들은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압도당하기는 하지만 국일암처럼 정겹지는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국일암과 같은 절을 한 채씩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유행가 가사처럼 산모퉁이 돌아가면 몇 그루 고목에 에워싸여 정적과 평화 그 자체인 고향의 암자들. 그런 암자들이 차츰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는 국일암도 그런 암자였다. 국일암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66년도쯤에 백련암으로 출가했다가 눈빛이 호랑이 같았던 방장스님에게 퇴짜를 맞고 돌아가는 길에 쓸쓸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던 것인데, 이 기억은 곧 잊혀졌다. 그 뒤로 국일암이 내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출가 전 내가 잘 아는 여학생이 국일암에 출가하겠다고 말한 뒤였다. 그 때부터 국일암은 전혀 엉뚱하게도 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 뒤 내가 출가해서 해인사에 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도 국일암이었다. 그냥 아는 사이였지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혹시 삭발한 그 학생을 만나면 무엇이라고 말할까하는 생각으로 그곳으로 갔지만, 그녀가 출가하지 않았음을 확인했을 때의 안도감과 쓸쓸함을 높푸른 잣나무가지에 걸어 놓고 왔던 기억이 새롭다.
국일암으로 가는 길목에는 옛 스님들의 부도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선수 부휴대사와 고한대사와 각성대사의 부도는 바로 국일암 근처 숲 속에 방치되어 있다. 그러던 것을 일타스님께서 자신이 꼭 전생의 부휴대사 같다는 생각을 내시고는 선사들의 부도들을 잘 손보시고 주변 축대를 정리하고 담장을 새로 고쳐 놓았다. 선수 부휴대사는 서산의 법손으로 부용 영관대사의 법을 이은 대선사였으며, 각성대사가 가장 존경하여 금강산, 속리산, 가야산 등지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함께 해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고한대선사는 명천 사람으로 열두 살에 칠보산 운주사에 출가하고, 가야산에 초암을 짓고 수도하였으며, 벽암대사와는 가장 친한 도반이었다. 평소에 친근했던 세 사람은 죽어서도 가장 친근하게 나란히 부도로 살아있었다. 몇 백년을.
나는 그 선사들의 부도를 어루만지면서 그들의 삶과 그들의 열반이 이토록 정답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 생각하면서 한참을 감격해 하였다. 둘레에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호위병처럼 서 있고 저만치 그들의 순결한 혼인 양 환한 달맞이꽃이랑 까치수염 같은 들꽃들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차가운 돌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따뜻하게 느껴져 왔다. 부도가 놓인 연좌에서는 푸른 숨결인 양 이끼가 장마 비에 물을 머금어 한껏 푸르렀다.
부도들을 충분히 돌아보면서 콘크리트 신축 법당에서 놀란 가슴을 삭히고 돌아올 수 있었다. 사원의 공간은 문화재이니 무엇이니 하기 이전에 사람이 살아야 하는 현실 공간임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전통이 살아있는 현장은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불가피할 때에는 재료만이라도 목재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스님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만.
국일암을 나와 가야산을 올려다보니 가야산도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 장마의 우울과 안개와 어둠 속에서 숲이 깨어나도록 노래라도 목청껏 한바탕 부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