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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불갑사의 불교 유적 - 대웅전 용마루에 목조탑 닮은 기와가 얹혀진 불사의 으뜸 도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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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3년 08월 138호
이태호·황호균

이 사천왕은 뚝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잔뜩 치켜 올라간 검은 눈썹, 한껏 벌어진 붉은 입술 등 긴장감을 주는 얼굴에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손에는 큼직한 칼 등을 들고, 발로는 마귀를 밝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때 발 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는 형상을 취한다. 이 사천왕상은 수행자에게는 번뇌와 좌절을 털고 일어나 일심 정진하라는 든든한 보디가드로 다가오고, 기독교 사관에 학교 교육을 받은 일반인들이 절집을 무당의 소굴로 잘못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숙명적인 관계, 상사초

늦여름의 불갑사는 온통 상사초 꽃으로 덮힌다. 잎도 없이 피는 꽃, 애절하다 이름하여 상사초이다. 상사초는 봄에 잎이 나고 늦여름에 담홍자색의 꽃이 피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잎과 꽃은 보통의 경우와는 달리 함께 만나지 못하는 현상을 보여 가슴 아린 별리를 지닌 연인들의 애닮은 전설마저 생각케 한다. 어떤 스님네들은 상사초라는 이름이 불경스럽다고 하여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로 피안초라고도 부른다.

내세에서라도 우리 사랑을 맺자는 전설이 어린 참식나무

불감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가 자생한다. 이 참식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신경통에 특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애절한 사랑의 전설도 담고 있다.
옛날 신라 법홍왕때 이름 높은 경운敬雲스님이 인도에 유학하였다. 하루는 왕이 온 가족과 함께 경운스님이 계시는 절의 법회에 참석하였는데 임금을 따라온 진제수珍梯樹라는 공주가 경운스님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이들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왕은 절의 주지에게 경운스님을 본국으로 추방토록 하였다. 이별의 슬픔을 가눌 길이 없던 공주는 “내세에서라도 우리의 사랑을 맺자”고 하면서 화분에 조그마한 나무 한그루를 심어 선물로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경운스님은 정성껏 심었는데 이 나무가 바로 백담호白淡號라고도 부르는 참식나무이다. 이 전설을 굳이 고증하여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참식나무를 잘 가꾸자는 선인들의 지혜로운 입담에서 나온 이야기인 것을...

마라난타와 도선의 창건설에 대한 고증

절집에 들어서기 전에 불갑사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불갑사는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번지에 속하며 불갑산(해발 515.9미터)과 모악산이 만나 북쪽으로 골짜기를 이룬 능선 자락에 자리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이러한 불갑사에 대한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조선고적도보」를 들 수 있다. 여기에 전각 외부 사진 몇 장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지금의 모습과 대부분 유사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불갑사는 적어도 1933년 이후에는 변화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불갑사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전북 정읍 아래쪽으로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은 백제의 불적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이를테면 불갑사의 창건을 기록한 여러 문헌들이 「모악산 불갑산고적」, 「전라남도 영공군 불갑사 창설 유서」(조선사찰 자료 상), 「모악산 불갑사기」(불갑사에 현재 보관중인 필사본) 등에 따르면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호승 마라난타가 남중국 동진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수도 한성에 이르기 이전에 영광 땅에 도착하여 불법을 처음으로 편 곳이 법성포였고 가까운 모악산에 사찰을 세웠는데, “불사佛事의 으뜸된다”는 뜻으로 불갑사라 칭했다고 한다. 또한 불갑사는 통리산문 계통의 선종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이 “호남 삼갑”의 하나로 불갑사를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처럼 불갑사의 창건을 기록한 이들 문헌은 조선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를 검토해 보더라도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밝힐 만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불갑사의 창건주로 마라난타나 도선으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기는 어려우며 구체적인 관련 유물마저 없어서 더 설득력이 없다.
불갑사의 2창에 대해서는 “당 덕종 원년기유”란 기록이 참고되는데, 당의 덕종 원년은 신라 원성왕 원년 경신년(780)으로 덕종 원년에 기유년이 없어 이 연대도 자못 의심스럽다. 또 조선시대에 사찰을 중수할 때 법당의 개연시에 대들보에 “정원원년개조”라고 먹으로 쓴 글씨를 발견했다거나 「동국여지승람」에 “신라시소창”이란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통일신라 말에 창건한 사찰로 이해할 수도 있느나 이도 역시 물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고려 말기의 왕사이며 수선사 제13세 사주 각진覺眞이 불갑사에 주석하면서 불갑사는 일대 중흥기에 들어선다. 각진의 중창 불사 이후 그 규모는 크게 확대되어 오백여 칸의 사찰이 되어 승방 70여 소, 낭요 400여 주, 누 90척, 법당은 수백 명이 앉을 만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화려하고 장엄한 불갑사는 정유재란으로 왜병들에 의해 절이 모두 불에 타버리고 오직 전일암餞日庵만 남아 황폐한 지경에 이르러 선조 31년(1598) 법릉法稜이 전각을 중수하였다. 수은 강항이 「불갑사중수권시문」을 지어 이 불사를 도왔다. 이후 현종 때(1660-1674) 해릉 海稜니 모연하여 법전을 중수하였다. 채은采隱선사가 영조 23년(1743)에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영조 41년(1765)에 그 동안의 중창 불사를 마무리하고 ‘모악산불갑사중창서’란 현판에 그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중창 불사와 함께 사원 경제력도 축적되어갔다. 현재 불갑사에 보존되어 온 ‘영광군 모악산 불갑사고적’이라는 필사본에 ‘불갑사의 고적’이 수록되어 있어 일찍이 사원 경제력을 밝히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이 불갑사 양안은 영조 23년(1747) 당시 주지 채은선사의 주도로 작성되었다. 불갑사는는 승려 삼십여 명에 사찰 위전답 285필지 27걸 81부 1속을 소유한 대사찰로 성장하였다. 불갑사의 토지는 불대 18필지 3결 74부 3속을 포함한 원위전답 65필지 5결 6부 7속(18.22%)과 효종 9년(1658)부터 영조 23년(1747)까지만 90년에 걸쳐 조성해 온 조성위답 220필지 22결 74부 4속(81.78%)으로 구성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쇄락해진 사찰 건물들을 잇달아 중수하고 일제 침략기인 1937년에 명부전 이건과 개금, 개채불사를 하였다. 이후 근자에는 1978년에 수산 지종대선사의 주도로 불사가 이루어졌다. 서옹대종사. 수산대선사가 대웅전 앞뜰에 5층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불사리 6과를 봉안하였다.
번뇌와 좌절을 딛고 일심 정진하라는 든든한 보디가드 - 사천왕
굳게 닫힌 천왕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서면 안에는 사천왕상이 좌우에 각 두 분씩 모셔져 있다. 봐서 오른편에는 동방천왕과 남방천왕, 봐서 왼편에는 북방천왕과 서방천왕이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이 사천왕은 뚝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잔뜩 치켜 올라간 검은 눈썹, 한껏 벌어진 붉은 입술 등 긴장감을 주는 얼굴에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손에는 큼직한 칼 등을 들고, 발로는 마귀를 밝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때 발 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는 형상을 취한다. 이 사천왕상은 수행자에게는 번뇌와 좌절을 털고 일어나 일심 정진하라는 든든한 보디가드로 다가오고, 기독교 사관에 학교 교육을 받은 일반인들이 절집을 무당의 소굴로 잘못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사천왕상은 알려지기를 서기 540∼575년(신라 진흥왕)에 연기조사가 목조로 조각한 것으로 서기 1870년(고종 7년)에 설두선사가 불갑사를 중수하면서 폐사된 전북 무장 연기사에서 불갑사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 사천왕상을 옮기는 데는 전 군민을 동원하여 도로를 정비하였다고 한다. 위의 글은 구전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연기조사 제작설은 믿기 어려우나 설두선사가 무장 연기사에서 옮겨온 사실은 얼마쯤 타당하다. 이러한 불갑사의 사천왕상은 양산 통도사, 구례 화엄사, 여천 흥국사, 장홍 보림사, 장성 백양사의 사천왕상 등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사천왕신앙의 흐름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로 주목된다.

사자후를 토하던 법상 받침이 놓인 만세루 ­ 잃어버린 목각사자상

만세루는 「불갑사고적기」에 각진국사의 삼창시 “누고구십척”이라 하여 높은 누각을 지었다는 근거가 있는데, 그것이 만세루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해릉의 사창시에 세 칸으로 복구되어 그때부터 실질적인 정문의 역할을 하다가 의종 때는 양쪽에 한 칸씩 잇대어서 다섯 칸이 되었고, 숙종 때 또 한번 잇대어서 일곱 칸의 위용을 되찾았으나 일제 때 오른쪽 한칸이 부패하여 잘라 내어 여섯칸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고적도보」에 따르면 이 만세루 안에 이 사자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습이 당당하고 보통 성인보다 조금 컸다는 얘기를 종합해 볼 때 강진 무위사나 해남 미황사에 있는 법고(소고)용도의 사자상과는 달라 혹시 사자후를 토하던 법상의 받침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잃어버린 목각사자상 옆구리에는 발받침 같은 것이 있었다는 수산스님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만세루를 오른쪽으로 돌아 대웅전과 좌우측의 일광당, 명부전에 둘러싸인 마당에 들어서면 모악산을 배경으로 펴쳐진 절집의 소담스런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다.

불단이 측면에 모셔진 이유

불갑사 대웅전 문을 열어보니 불단의 위치가 보통 사찰의 경우와는 달라 이채롭다. 불단은 전각의 문을 열면 바로 맞은 편에 횡방향으로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불갑사에서는 오른쪽 측면에 종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불단이 정면에 위치하였으나 개와 불사 때에 해체하여 보니 네 개의 내고주와 대들보가 정면으로 위치일 때보다 좌측면에 잘 결구됨으로 해서 옛 모습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남평 죽림사 극락보전과 같은 예로서 외형적 정면과 기능적 정면이 각기 다른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까치가 된 조각가

대웅전의 여러 조각품들에 얽힌 전설이 또한 흥미롭다. 문살무늬는 눈송이 보상화 연밥 문양이다. 대들보에서 용이 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오소리를 쫓는 형국을 하고 있다. 불상 위를 덮고 있는 받침 또한 일품으로 이 대웅전의 조각은 지을 당시 이름 있는 조각가가 찾아와 스스로 일할 것을 원했다 한다. 이 조각가는 “내가 조각 이을 끝마칠 때까지 절대로 부정한 여자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 몇 달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고 일만 계속하자 밥을 해 나르던 여인이 하도 궁금해 대체 무슨 일을 하나 싶어 문틈으로 엿보았더니 조각가는 그만 피를 토하고 죽고, 그 피는 까치가 되어 멀리 날아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웅전 문살무늬는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으며, 집을 완성하고 그 조각가를 기념하기 위해 불상 뒷켠 벽에 까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도 대웅전 벽에는 재미난 까치 그림 두 폭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대웅전 문살이 일부 완성되지 못한 연유를 재미난 얘기로 설명하고 있다. 여인과 조각가의 관계, 조각가의 죽음, 피가 까치가 뭐, 이러한 전설의 소재는 상당히 사실에 기초를 둔 듯도 싶다.

이태호 선생님은 전남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황호균 선생님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