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이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가? 바로 그대,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그대이다. 학인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다른데서 구하려고 하는구나.”
밑줄 친 부분의 원문은 “祗儞面前聽法底是”이다. 이것을 “그대의 앞에서 법을 듣고 있는 그놈이다”하고 읽어서는 안 된다. “그대의”가 아니라 “그대가”하고 읽어야 한다.
현실에 있는 이 몸뚱이를 제쳐 두고 초월적인 ‘그 놈’을 상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주체를 내면화시키거나 절대화시키는 순간 「임제록」의 사상과는 멀어진다.
중국어의 어법으로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하다. ‘祗儞 에서의 ‘祗’는 儞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是儞 와 뜻은 같지만 그것보다 ‘니儞를 더 강하게 부각시킨다. ‘是儞 의 경우 ‘是’는 언제나 주격이 되는 체언 앞에 놓여 이것을 강하게 드러낸다.
“수행자들이여, 바로 그대, 내 앞에서 움직이는 그 자체는 우리의 조상인 부처님과 다를 게 없건만 그대는 믿지 못하고 밖에서 부처님을 찾는구나. 아서라. 道流, 是儞目前用底, 與祖佛不別. 祗儞不信, 패갱便向外求. 莫錯.”
위에서의 ‘믿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부처와 다름이 없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다. 신흥종교의 “믿씹니다”는 아니다. 「임제록」에는 ‘信不及’ 또는 ‘自信不及’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때의 ‘信’도 앞뒤의 문맥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임제의 ‘할’, 덕산의 ‘방’이란 말이 있듯이, 임제스님 하면 고함지르는 것을 연상한다. 그렇지만 임제스님의 말투는 아주 용의 주도하다. ‘山僧見處’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산승’에서의 ‘山’은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이다. 이것은 자기 처를 ‘산처山妻’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말로는 “제 생각으로는”, “제가 보기에는”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전통적으로는 위의 문장을 “지금의 내 경계는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로 읽어 왔다. 이것은 임제스님의 말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과도 안 맞는다.
윗 구절은 참부처와 도를 묻는 상대에 대한 대답이다. “제가 보는 바로는 (부처와 도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그대는) 우리들의 조상인 부처님(祖佛)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습니다”하는 말이다.
임제선풍은 적절한 언어사용으로 이름 높다. 시인의 언어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다른 말로 대신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말을 매우 조심한다.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참마음이란 몹시 어렵고 부처님의 말씀은 아주 깊다. 그러나 꽤 상당한 정도까지 알 수 있다. 道流, 是情大難, 佛法幽玄, 解得可可地.”
임제스님은 자신이 불법을 일백 퍼센트 알았노라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불법이 어렵지만 팔십 내지 구십 퍼센트는 알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전통적인 해석처럼 “알고 나면 쉬운 일이다”하고 읽어서는 안 된다. “可可地”는 “상당히”, “꽤”라는 의미의 부사이다.
이런 오독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중국어의 어법에 대한 이해 문제보다는 선사하면 으레 모두를 싹 부정하고 ‘콱 내지른다’는 고정관념 탓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遮詮만이 선의 진수라는 잘못된 생각은 선서 해석을 그르친다. 다음 문장을 독자들은 어떻게 읽을까?
“師言下大悟云, 元來黃佛法無多子.”
이 말에는 사연이 있다. 임제는 황벽스님이 주지하는 절에서 오랫동안 살았는데, 한 번도 수행에 대해 질문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고참스님이 한 번 가서 물어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임제는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랐다. 고참스님이 시킨 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일러주십시오”하고 청한다.
임제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은 매질을 했다. 또 가서 묻고 또 묻고 하기를 세 번 거듭했지만 그때마다 매만 맞고 돌아왔다. 임제는 자신의 못남을 탓하고 떠나려고 하직 인사를 하자 황벽선사는 대우스님을 추천했다. 대우스님한테 가서 여기에 오게 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하소연했다.“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대우스님은 호통을 쳤다.
“황벽스님이 그토록 노파심이 간절하도록 지도했건만,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냐?”
이 말 끝에 임제스님은 완전히 깨닫고 내뱉는 말이 “黃佛法無多子”였다.
이 임제선사의 “黃佛法無多子”에 대해서는 옛부터 큰스님들이라면 한 번씩은 법거량을 한다. 일본 임제종의 종정을 지낸 아사히나소우겐朝此奈宗源 큰스님은 “황벽스님의 불법이 원래 별 것 아니었군”이라고 읽고, 또는 “알고 보니 고양이 똥만도 못하군!”이라고 평창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림없는 소리이다. 임제선은 결코 오만방자하지 않다. “無多子”에 대한 자세한 고증은 「구도와 열락」(入矢義高저, 신규탁 옮김, 장경각, 1993)에 미루고, 이 말을 번역하면 이렇다.
“(아하!) 황벽스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너저분한 것이 아니었구나.(분명했구나)”
서옹 종정스님이 경도에 오셔서 “일본의 임제선은 임제선이 아니라 너무나 타락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참뜻을 터득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ㄱ의 발문에 실린 김지견 박사의 회고에서)이 그저 남의 일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러면 임제선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못해 간단하다. 돈오무심頓悟無心이다. “얻으면 탁 얻는 것이지, 세월을 거듭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得者便得, 不歷時節)”라든가, “바로 지금이지 세월을 거듭해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直是現今, 更無時節)”라는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같은 곡曲이라도 연주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듯이, 많은 선사들이 돈오무심곡을 연주하지만 백이면 백 모두 다르다. 임제선의 가락은 뭐니뭐니 해도 현실에 딱 붙은 마음 씀씀이다. 이 마음은 현실의 배후에서 우리를 조정하는 근원적인 존재는 아니다. 가수 남진 씨가 “해가 저문 부둣가에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을, 갈매기도 내 마음 같아”하고 노래한 현실에서 울고 웃는 마음이다.
선사상은 일반 명제로 되는 순간 그 본질과는 멀어진다. 구체적인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을 꾸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제 마음은 버려 두고 외형적인 단계를 설정하여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도를 깨치려는 수행자들에게 임제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하는 여러분, 제가 보는 바로는, 보신불 화신불의 머리를 싹 베어야 합니다. 십지의 수행을 성취해도 노예와 같고, 등각과 묘각의 지위에 올라도 수갑에 묶인 사람이고... 道流, 取山僧見處, 座斷報化佛頭. 十地萬心, 猶如客作兒, 等妙二覺, 擔柯鎖漢.”
“取山僧見處”는 문장이 불안정하다. 이 말만으로는 임제스님이 자기의 수행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으로 잘못 읽혀질 염려가 있다. 그러나 「조당집」에는 “欲得山僧見處”라고 문장이 안정되어 있다. 즉, “제가 보는 바를 이해하려면, 보신불 화신불의 머리를 싹 베어야 합니다.”이다. 위에서 말한 ‘제가 보는 바’란, 앞에서 한 말인 “밖으로 구하려는 마음만 쉬면 여러분들은(우리 사문들의) 조상이신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입니다”하는 임제스님의 설법이다. 그러므로 10신, 10지, 등각, 묘각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부처가 된다는 생각은 사람을 얽어매는 말뚝(繫驢橛)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