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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찌 소리 요란한 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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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남난희 1993년 08월 138호
이 땅 어느 산에나 산자락 아니면 산 깊숙한 곳에 절이 있다. 산이 깊으면 골이 깊듯 큰산이면 큰절이 있고 작은 산이면 작은 절이 있다. 산과 절은 마치 이와 잇몸처럼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닌 하나의 의미로 자리한다. 절의 역사가 곧, 산의 역사요 산의 살림이 절의 살림과 다르지 않다. 산을 즐겨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산과 절에 얽힌 추억 한두 가지씩은 있을 법하다. 십 수년 동안 이 땅의 산을 오르내렸던 나로서는 산사와 깊은 인연도 많고 추억도 많다.
한여름 온몸이 오그라들 듯 바람 한 점 없는 설악의 용아장성에서 물에 굶주린 채 꼬박 이틀을 등반하고 완전 탈진하기 직전에야 봉정암에 도착한 적이 있다. 그 때 그 살아 있는 시원한 물로 각자 배에 물주머니 하나씩 만들어서 더는 움직이기조차 싫은 포만감에 절 마당 옆에서 노숙을 했다. 너무나 힘들었던 등반과 더위를 먹은 탓에 설악의 공기와 별을 만날 수 있음에 깊은 잠도 못 들고 뒤척이는데 몇 시나 되었을까. 어느 한순간 귀청을 때리는 그 청아한, 그 아름다운, 그 신비한, 그 신선한 소리 하나, 어느 스님의 새벽 예불 드리는 소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서 비몽사몽 하던 잠조차 달아나 버리고 잿빛 도시에서 찌든 나의 육신과 정신조차도 맑아져 옮을 느낀 기억은 스님의 그 청아한 예볼 소리와 함께 두고두고 새롭다.
나의 산사에 대한 기억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길고 긴 겨울 태백산맥을 쓰러질 질 듯 허우적거리며 걷고 걷다가 가끔 만나는 산사는 그렇게 편안한 안식처일 수가 없었다.
1989년 여름 어느 날. 그 동안 나의 발로만 누빈 산을 정리하고자 나 혼자 지니고 있기만은 너무나 벅찬 긴 태백산맥 단독 종주기를 정리하고자,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의 조그마한 암자를 소개받아 들어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산천에 도로가 펑펑 뚫리고 어느 산골에나 도로가 포장이 되어 있는 요즘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게도 이 절의 도로 사정은 엉망이었다. 경기도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며 도착한 그 곳은 조용한 비구니 스님 한 분만 계시는 오두막 절인데, 요즘 보기 드문 가난한 암자였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조차 했고 동네와도 제법 떨어져 있어서 세상과는 완전히 고립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분위기는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즈음의 나로서는 참으로 괜찮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외로움을 태워서 하나의 또 다른 열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절이 너무나 가난한 탓인지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절 같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법당 앞의 몇 백 년 아니 한 천 년은 묵었음직한 사철나무가 그 절의 연륜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 사철나무의 품이 얼마나 너른지 한낮의 작은 마당을 응달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지금은 그 절의 유래가 모두 생각나지는 않지만, 서신 지방의 홍씨 가문 처녀가 무슨 연유인지 중국 왕의 후처로 간택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이 땅을 떠나면서 물 한 말, 대추 한 말, 모래 한 말을 가지고 가서 식사는 대추로 목은 그 물로 축이며 자신이 밟아야 하는 땅은 그 모래를 뿌려서 발을 옮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자 왕이 뗏목에 태워서 고국에 보냈는데, 어느 날 서신 앞 바다에 그 뗏목이 도착했고 그 위에는 돌부처님이 처녀 대신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홍법사를 짓고 부처님을 모셨다는 것이다. 어쨌든 전설이 그래서 그런지 여느 부처님과는 모습이 많이 다른 부처님이 초라한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그 부처님은 영험하다는 소문이 많이 났었다고 한다.
실제 내가 갔을 때 계셨던 스님께서는 자신이 처음 절에 와서 기도를 드리니까 부처님 얼굴에 땀이 그득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에 제를 올리면서 수각의 제를 잊어버렸는데 절에서 한 오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이 말라 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급히 수각에 제를 올리자 다시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을 부처님의 귀한 은혜를 받아 보지 못한 중생으로서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지만, 직접 보셨다는 스님의 말씀만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곳에서 며칠이 될지 모르지만 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저녁에 방에 군불을 때면 온통 연기를 다 뒤집어 써야 했으며 천장에서는 쥐들이 밤새워 운동회 연습이라도 하는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찍찍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생의 극치를 맛보고자 태어난 불나방과 하루살이는 불빛을 따라 들어오고 싶어 차단된 창호지와 밤새 박치기하는 소리, 소리들. 그런 환경에서도 나의 마음은 편안했다. 낮에 가끔 채마밭에 나가서 스님과 함께 감자도 캐고 콩도 심고 했던 것은 행복하기조차 했다. 무엇보다 겨울 태백산맥 이천 리를 등반했던 것을 다시 정리하며 나는 다시 태백산맥을 등반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한여름에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으시시한 추위를 느껴야 했고 가끔은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나오는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께서는 하룻밤을 주무시고 오신다며 절을 잘 지키라고 당부하고는 뒷모습만 남기고 고개를 넘으셨다. 나는 오래도록 스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혼자 절에 남겨진 나는 어떤 상황에서나 뒷모습은 슬프다는 것을 다시 곱씹으며...
혼자라는 홀가분함과 외로움과 무섬증 등 어쨌든 참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나른하게 엄습하는 외로움 하나, 발끝, 손끝에서 시작해서 온몸을 휘젓고 다니며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까지 번지는 그 바람같은, 그 불같은, 그 바늘같은 이름 알 수 없는 한 덩이의... 그런데 바람을 동반한 비가 엉성한 양철지붕을 두드리고, 바람이 떨구는 버찌가 따발총처럼 양철지붕을 때리고, 바람은 문짝을 흔들고, 깊은 산중 폐사같은 암자에서 혼자라는 생각에 약간의
불안감으로 자꾸만 귀는 지붕과 흔들리는 문짝으로만 기울고, 작은 불안감은 큰 무서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니... 태백산맥을 동반할 때 칠십육 일 동안이나 혼자서 산능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낸 내가 비어 있은 지 십년은 지났을 것 같은 폐가에서 자기로 한 내가, 부처님이 계시는 절에서 무서워하다니. 물론 상황이 절박하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법당으로 들어가서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얼마나 했을까. 땀범벅이 되어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날이 훤히 밝아오도록 절을 하고 또 했다. 절을 거듭할수록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 오로지 절을 위한 움직임만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절에서 절을 하는 의식은 참으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한 듯하다.
지금도 여름이 오면, 그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그 양철지붕을 때리던 버찌 소리와 그 밤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