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방자치-부정과 복원의 정치과정
식민지시기에 과도하게 팽창되었던 중앙의 행정 집행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은 채 40년대의 정치적 대립과 한국전쟁을 경과한 한국사회에 있어 국가권력은 가히 무소불위의 권능으로서 사회 각 부면을 일방적으로 장악, 주도해왔다. 특히 일제말기의 전시체제와 한국전쟁을 통해 대폭 강화된 동원체제는 지방정치 및 행정의 자치적 운용을 허용할 어떠한 여지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모든 절차와 원칙이 유보된 상황에서 52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는 중앙행정기구의 편의적 집행을 위한 허위체계로서만 가능했을 뿐이었다.
4월혁명은 40년대, 50년대의 이러한 정치상황을 일변시킨 정치적 계기였다. 4월혁명은 그것의 민주적 지향을 법·제도적으로 정착할 시간적 여유와 유효한 수단을 거의 갖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5.16쿠데타로 좌절되까지 사회, 정치의 각 부면에서 나름대로의 민주개혁의 단초를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지방자치는 그 본래의 정치적 의미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 정도는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4월혁명의 시기에 지방자치의 실시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지방자치적 차원의 민주개혁이 주요하게 부각될 수 없을 만큼 사회 전 부면에서의 개혁의 기운이 충일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월혁명 기간 중 실시, 복원되었던 지방자치의 민주개혁적 성격은 역설적으로 5·16쿠데타로 인한 지방자치가 원천봉쇄된 60년대 이래의 정치부재의 상황에서보다 전면적으로 부각되었다고 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87년 대통령선거시의 대국민공약으로 제시되었던 지방자치제 실시가 그간의 여소야대 4당정국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표류하다가 89년말 5공, 광주문제의 타협적 정리의 정치적 보상물로서 전격 결정, 발표된 저간의 정치상황을 보면서 현단계 지방자치의 실사가 갖는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민주개혁적 성격에 주목하는 것도 지난 30년 간의 지방자치 부재의 시기가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 지난 지방자치의 민주개혁적성격의 복원에 대한 기피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의 지방자치제는 그 본래의 민주개혁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발현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미봉적으로 실시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번의 지방자치실시 결정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정치구도를 계속 유지 확대시키려는 제도정치권의 이해타산을 극복하여 지방자치 본령의 민주적 성격을 실현한 국민대중의 정치역량이 미성숙되어 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위에서 정리한 한국정치사에서의 지방자치의 역사적 경로를 살펴보면서 그것이 현상태로서 실시되는 현시기 지방자치의 정치적 성격과 그 한계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만 채 발현되지 못한 지방자치의 개혁적 성격을 이후의 정치과정을 통해 온전하게 실현시킬 최소한의 논리적 근거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지방자치 실시의 정치적 의미와 그 발전전망
정치권력의 장악(집권)을 자신들의 궁극적인 과제로 상정하는 제도정치권의 각 정치세력에게 있어 지방자치가 그것을 향해 가는 하나의 정치적 결절점이자 매개로서 처리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하여 4당구조하에서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갖는 여당과 제1야당에 있어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또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방정치의 수준에서 확대, 고착시킬 수 있는 정치적 매개로서 상정되었던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제2야당, 제3야당의 경우 지방자치제의 실시가 대권으로부터 멀어지는 정치적 계기로 받어들여지게 된 것 역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민주당 공화당이 지방자치 실시 이전의 정계개편을 역설했던 것도 그리하여 실제로 민정·민주·공화의 3당합당을 지방자치의 실시 이전에 완료한 것도 적어도 지방자치와의 관련에서 보면 그들의 합리적 타산의 결과로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지배세력 일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지방자치의 실시는 행정적 손실을 보전할 정치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지방자치가 이미 역사적 대세로, 그리고 그것의 실시가 구체적인 정치일정의 하나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자치의 연기 자체는 그 자체로서 그만큼의 정치적 부담을 지배세력 일반에게 부과하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여기에 더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지방자치의 원천적 부재라는 정치적 부담보다는 약간의 행정적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지방자치의 실시를 통한 지방차원의 정치적 지배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유리한 선택으로 타산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지배세력 일반에게 지방자치는 지방정치의 장을 통해 중앙권력의 행정적 지배구조를 정치적 지배구조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정치적 계기로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세력 일반의 이러한 구조가 과연 온전하게 실현될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지방정치의 장에서 역동적으로 운동할 국민대중의 정치력과 민주화운동세력의 대응 정도가 고려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3당합당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형성된 양당체제 하에서 유일야당으로서의 선명성과 상대적 선진성을 내세운 평민당의 정치 공세 역시 지방자치의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게 하는 하나의 변수이다.
그러므로 지방자치의 본래적 개혁성의 발현 정도는 전적으로 제도 정치권 내 여·야간의 공방 및 정치력의 수준과 민주화운동세력의 대응 정도 및 국민대중의 정치동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특히 92년의 대권경쟁과 관련하여 볼 때 지방자치의 실시는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몇 지역에서의 정치공방을 대단히 역동적인 것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서울지역의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서울지역 지방의회 구성의 경우 그것이 갖는 상징적 중요성과 실질적 비중 때문에 그 정치적 공방의 수준은 매우 높은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또한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마산 창원, 부산, 울산, 전남 농촌지역 등의 선거과정과 결과 역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층대중의 정치동향이 기층민주주의(Grassroot Democracy)의 직접적인 장인 지방자치제에서 어떻게 외화될 것인지는 이후의 예정된 정치일정 및 제도화된 정권교체 국면에서의 대중적 역할을 가늠하는 데 상당 정도의 시사를 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지역적 특수성이나 정치적 비중과 관련된 몇몇 지역만이 아니라 지방자치가 실시될 전 지역에 있어 국민대중의 역동적 정치참여와 동향은 지방자치의 향후 전망을 가늠하는 궁극적 변수이자 요인으로 사고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어 언급했듯이 정치변동의 기본능력은 국민대중의 정치실천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명백하게 확인된 바와 같이 6월항쟁의 전국적 전개과정 등 80년대 국민대중의 정치적 진출이 지방자치의 실시까지를 판단하는 80년대 한국사회 정치발전의 기본 동력이었다는 역사적 현실로부터 엄중하게 증명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