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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佛家)의 폭력성, 과연 근절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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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87년 12월 70호
11월 6일, 개운사에서는 ‘매종(罵宗) · 폭력승 규탄 및 정법 수호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는 10월 31일 서울의 모사찰 주최의, 특정 대통령 후보 지지 기원법회를 반대하던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폭력 경찰과 폭력승에 의해 무차별 구타, 연행된 사태에 대한 규탄대회였다.
불공위는 결의문을 통해 “반 불교적 반민족적 매종승 옆에는 항상 깡패승들이 기생하여 왔다”고 전제하고, “매종승OOO의 사주를 받은 깡패승들은 오랫동안 그 사찰에 거주해 오던 몇몇 스님들을, 기원법회에 반대했다는 명목으로 무참히 구타하여 그 중 한 스님은 현재 입원치료 중”이며 “불제자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의 행위와 더불어 차제에 종단 및 교단내에 폭력으로써 해악을 끼쳐온 모든 폭력승은 일체 척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법회의 배경을 총무원장을 미끼로 한 공작정치와 일부 매종 승려의 충성 표현의 합작품이라고 덧불이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제기된 폭력승(暴力僧) 문제는 불교 내 종권이나 재산상 이해 관계의 대립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것으로, 종단의 고치기 힘든 고질병 중의 하나이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이럴 때는 폭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귀절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폭력을 쓰지 말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상황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된다’ ‘안된다’ 라는 속된 표현이 가능치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부처님이 깨달음을 증득하시고 49년의 유행(遊行)기간중 어떠한 고난과 위험에 처해 있어도 폭력적 힘의 대결을 통해서 뜻을 펼친 일은 없었던 그분의 행동을 우리는 귀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한편 열반경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 있거든 정법의 칼로 물리쳐라”는 귀절이 나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위한 적극적 행동(다각도로 해석이 가능하다)을 고취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도적떼 등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술을 익혀 위험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또한 임란 당시 승군의 구국애가 있었고, 승단에서 전해오는 풍습 중 ‘이불공양’은 대중의 원성을 사는 사람을 흠씬 혼내 주는 제도였다.
이렇듯 불가에서 인정되는 폭력(?)의 공통점은 악(惡)을 물리치는 방어형이었고 그것은 또한 공동체 성원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재 문제되고 있는 폭력과 폭력승의 문제는 이러한 유의 논의와는 질을 달리한다. 그것들은 철저히 개인의 욕심과 이익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폭력’이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결합에 승(僧)까지 가세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불교 나름의 왜곡된 역사가 반영된 것이기에, 이를 외면할 수만은 없는 불교의 아픔이 여기에 있다.

폭력승의 기원
일인(日人)들의 승(僧)이란 것은 가정을 얻어 속인(俗人)들과 같이 사는 것으로, 이것을 한인들에게 시행케 하여 한국의 고상한 불도를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따라서 대처승들은 모조리 사찰에서 나가 살 것이며, 우리의 불도를 숭상하는 승들에 대해서는 사찰에 속한 토지를 경작케 하여 생계를 보유케 하고 시찰을 지켜갈 수 있게 하라. 만일 그 수가 모자라면 신도가 절을 지켜도 좋다.

1954년 5월 이 승만 대통령의 유시는 비구승과 대처승간의 분규양상을 급전시켰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비구승측은 이 승만의 유시를 등에 업고 대처승을 공격해 들어갔고 기득권을 쥔 대처측은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러한 과정에서 쌍방은 모두 폭력배를 끌어들여 머리를 깎아 승복을 입혔다.
어느 쪽에서 먼저 폭력배를 끌어들였느냐를 판가름할 필요는 없다. 나아가 그런식의 정화가 옳은 것이었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도 일단 차치하자. 어찌 되었든 현재는 비구 · 대처 간의 사찰 쟁탈전 및 정통성의 시비는 극히 일부(선암사등)를 제외하면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규는 한국불교에 재산상의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폭력사태와 폭력승을 배출하는 오류와, 그것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비구·대처 간의 사찰 쟁탈전은 일단락 되었으나 싸움에서 이긴 조계종의 내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내분은 폭력을 수반하였다. 70년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불가의 폭력 사태를 몇 가지 들어보자.
1973년 3월 특별분담금에 대한 시비로 총무원의 감찰부장이 경남 보리암의 주지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주지 임명을 둘러싸고 돈을 거둬들였던 종단의 부패가 노출된 것이었으며 경찰의 수사가 개시되었다.
1974년 종회와 총무원간의 대립으로 오 녹원 스님과 손 경산 스님의 상좌스님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1975년 12월 말썽많던 조계종 총무원에 김 대심 일당이 침입하여 서옹 종정 이하 총무원 간부들을 감금하고 칼로 위협하여 종권을 인수하려 했던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종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대표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77년이후 조계사파와 개운사파 간의 치열했던 싸움은 불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80년대에 들어서서는 불국사와 월정사 주지쟁탈전이 있었고, 살인이라는 극단적 사태까지 몰고 왔었던 신흥사 사태는 사회를 발각 뒤집어 놓았다.
이러한 폭력사태의 공통점은 종단의 종권이나 재산상의 이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폭력승의 재생산
일명 해결사라고 불리우는 폭력승의 재생산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분규 당시에는 폭력배로 동원되었다가 그대로 승려로 남아 있는 예가 있으나, 그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폭력배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봉은사 사태를 계기로 일반 불자들까지 OO회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 또한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하며 가(家)를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다.
힘(力)을 가진 그들 폭력배를 이용하려는 곳은 많고, 그들 또한 이용자의 금력(金力)에 따라 옮겨다니면서 일명 해결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동원된 폭력배들만이 폭력승은 아니다. 나의 이해, 은사의 이해, 문중의 이해에 따라 폭력도 서슴지 않는 승려들 또한 폭력승이 아닐 수 없다. 어느 특정인을 폭력승이라 지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따라서 폭력승의 재생산은 어느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아닌, 폭력을 필요로하는 상황에 의해서이며, 이것을 인정하는 교계의 풍토가 주범인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해결이 가능하지 않으며 순리(順理)가 통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흥사 사건 당시 전(前) 주지를 모시고 있던 어느 거사는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이가 든 스님들은 절을 떠날 경우 살길이 막막한 형편이고 종단에서 어떠한 보장도 없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처지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개인의 잘못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개인과 집단은 상호 영향을 받고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에 악순환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다.
새삼스럽게 해방 이후 한국불교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함이 없이 무엇을 해 왔는지, 안타깝게 느껴진다.

해결방안
언젠가 교계의 한 원로 중진스님께서는 “이른바 폭력승려를 교화시키려면 전국 6개 도시에 교육원을 만들어 일정 기간 교육시켜 새출발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참으로 이상적인 발상이나, 그것은 폭력 사태의 발발을 지극히 피상적이고 개인적으로 바라본 데서 오는 것이다. 그렇게 승려의 자질을 문제삼을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개선이 없이는 폭력의 근절은 불가능하다.
종단이 분규를 종식하고 제 기능을 찾아가며, 체계적인 승려 교육과 여타의 산재된 문제들이 해결되어 깨끗한 교단이 이루어지면 폭력승은 자연히 근절된다. 폭력배들은 스스로 존재이유의 불필요성을 절감하며 물러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독채권력의 퇴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어도, 결국 한국의 민주화가 국민의 힘이 축적됨에 따라 서서히 서광이 비치듯이, 불가의 민주화도 불자들의 노력에서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된 불교에 폭력은 발붙일 자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