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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불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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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자의 소리 - 정선애 1987년 12월 70호
부처님! 부처님의 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여(如如)하다고 합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것도 바로 이곳에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스님들을 따르는 많은 불자가 있음이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지요.
정말 그랬읍니다. 사바의 중생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무명의 중생을 복되게 하였읍니다. 부처님의 중생을 향한 자비와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었읍니다. 우리의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집착을 여의고 대명의 세계, 불국정토로 나아가게함이 부처님이 여기에 오신 뜻이고, 그게 바로 부처님의 법이 아니었는지요. 우리 역사를 통해,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고자 함께하고자 한 수많은 스님, 선지식을 봅니다. 원효대사의 그 처철한 보살행, 그리고 이름없는 스님과 보살들이 행한 삶의 모습은 부처님의 현현, 바로 그것이 아니었는지요. 가난하고 굶주린 백생들의 고통을 해결코자 압제와 수탈에 저항하지 않았는지요. 민족이 위태로울 때 이를 지키기 위한 일에 스님과 불자가 앞장서지 않았는지요‘ 이것이 바로 부처님 법의 여여함이요, 그렇기에 불교가 2,600여년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늘 불교의 현실은 불자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아무리 말법시대라고 말을 하지만, 사(邪)를 정(正)이라 하는 현실은 불자를 아득하게 합니다. 얼마전 모사찰에서 모후보의 대통령 당선 기원 법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그 후보가 불교 신자이고, 때문에 불교의 중흥을 그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읍니다. 그 후보가 불자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의해 불교 중흥의 가부가 결정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내고 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지혜롭게 중생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회향하는 실천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역사와 사회에 부끄럽지 않은 실천행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50년대 이(李)정권 때의 정화유시나, 60년대 박정권 때의 ‘불교 재산 관리법’ 제정 등이 지금까지도 불교중흥의 질곡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요. 중요한 것은 불교가 얼마나 정권의 예속에서 벗어나 종교의 역할을 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종단내의 분규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는지요.
법당에 말없이 앉아계신 부처님! 이 말을 반박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왜 말이 없느냐고요. 그렇습니다. 부처의 형상이 우두커니 앉아있다고 해서 부처님을 따른답시고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온세상에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오늘의 이 사회, 불교의 현실을 절망감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읍니다. 우리 불자 하나하나의 삶이 바로 부처님의 화현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선거에 들떠 있는 지금, 우리 불자들은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불교계의 문제가 누군가의 막대한 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수동적이고 의타적인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이 사회의 문제, 불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중생계에 끊임없이 몸을 나투는 보살이요, 중생 하나하나에 현현하는 부처님에 의해서가 아니겠읍니까!
결코, 우두커니 앉아 부처님 형상만 바라보며 누가 나를 일으켜 주기만을 기다리는 앉은뱅이가 되지는 않겠읍니다. 책상 위에 앉아 책 속에서 모든 것이 다나오리라 생각하는 책벌례가 아니라, 두 발로 일어서서 삶 속에서 힘차게 생동하는 용기있는 불자가 되겠읍니다.

“호법하는 우바새는 칼을 들고 지법(持法)하는 비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다만 오계(五戒)를 수지(受持)하고 있는 것 뿐이라면 그와 같은 사람은 대승인(大乘人)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다. 오계를 받지 않았더라도 정법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대승인이다. 정법을 지키는 사람은 칼을 들고 설법자에게 봉사해야 한다.”

열반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