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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연극 연재 단상(斷想) - 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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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김미미 1987년 12월 70호
‘불교 연극’이란 주제로 일년을 보냈다. 매월 빨리도 다가오던 원고 마감일과 씨름하느라 일년을 쫓기며 보내 버린 느낌이다. “불교에도 연극이 있읍니까?” “자료 구하기 힘들 텐데요.” “그렇게 오랫동안 연재할 만한 게 있나 보죠?” 이런 이야기를 웃어넘기며 참으로 용케 버텨 왔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복사한 자료만도 천여매를 웃돌고, 또 많은 사람과도 만났다. 개중에는 불교 연극의 존립에 대해 회의를 품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 주시는 분이 다행히 더 많았다.
한줌어치도 못 되는 얄팍한 불교 상식만으로 이 긴 여정에 뛰어들었음을 뒤늦게 절감하고, 무모했던 호기에 때늦은 후회도 여러 차례 했었다. 더우기 막 원고를 넘기고 난 후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새로운 자료들은 차라리 책을 덮고 싶을만치 자책감에 휩싸이게 했다. 그 예가 8월호에 실린 ‘한국 근대 불교 희곡 소고’ 상편으로, 개화기에서 해방까지의 불교 희곡을 총 22편 입수했노라며 의기양양하게 원고를 넘겼는데, 며칠 후 동국대학 불교학 자료실 구석에서 새로이 8편을 더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일은 오랫동안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대본도 구할 길 없는, 연극 제목만 적힌 공연 기록을 들고, 그것의 불교 연극 여부를 가리기 위해 백방으로 작가와 연출가를 수소문하느라 며칠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아뭏든 많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엉성하나마 여기 작은 지도를 한장 만들어 놓았다. 이제 앞으로 누구든 이 길을 갈 때 이 지도가 웬만큼은 여행자의 노고와 시간을 덜어주리라고 자긍심을 가져 보면서, 근 한해 동안 연재하는 동안에 나름대로 느낀 몇 가지 제언을 추려 적어본다.

첫째로, 불교 연극의 다양한 호칭에서 오는 명확치 못한 개념의 정비가 필요하다. 불교 연극은 부르는 사람의 구미에 따라 ‘법극(法劇)’, ‘성극(聖劇)’, ‘종교극(宗敎劇)’, ‘불교극(佛敎劇)’, ‘불교 연극(佛敎演劇)’ 등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중 ‘법극’ 이나 ‘불교극’ 등은 그나마 불교의 처지에서 명명한 것이라 하더라도, ‘성극’, ‘종교극’은 서구 기독교 연극의 이명(異名)을 비판없이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필자의 논고에서 통일시킨 ‘불교 연극’ 역시 ‘불교’라는 근대적 명칭에 일인(日人)들이 번역한 ‘연극’ 이란 단어를 붙인 합성어에 불과하다.
어쨌든 이 모든 시비를 떠나서, ‘공(空)의 연극론’에서도 언급한 바, 보편적인 연극개념과 동떨어진 ‘법, 성, 종교’ 등의 단어로 불교 연극을 신성화 내지 신비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미흡한 대로 비교적 일상적인 느낌을 주는 ‘불교 연극’으로 명칭의 통일을 기할 것을 권해 본다.
다음으로 불교 연극은 다양한 쟝르의 확산을 꾀해야 할 것이다. 근자에 와서 불교적 소재로 엮어내는 창극이나 뮤지컬, 마당굿, 판소리 등의 시도가 그 좋은 예로, 이러한 움직임은 종합 예술로서 불교 제예술 분야의 조화로운 활용과 함께 적극 장려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위한 인형극이나 가면극 등도 전통 연극과 그 맥을 같이해 온 우리의 불교 연극이 결코 소홀히넘길 수 없는 소중한 부분이라 하겠다.
세째로, 불교 희곡은 좀더 풍부하고 새로운 소재의 발굴이 이루어져야 한다. 불교는 타종교와는 달리, 무진장한 이야기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경전과 설화문학을 갖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서 거의가 완벽한 극적 구성을 갖춘 불교 희곡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순히 이들을 지루한 교리 강좌나, 혹은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야기들 이변에 깔려 있는 존재와 세계와 삶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력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을 숨쉬는 우리들의 이야기, 좀더 우리의 삶에 근접한 살아 있는 이야기로 슬기롭게 바꾸어 희곡화하여야 할 것이다.
그밖에 통상 ‘선문답’이라 여기는 벽암록, 전등록 등 선종어록에 등장하는 선사들의 직관적인 대화와 행동 등의 수행 일화도 그것이 바로 그들이 고뇌했던 삶의 치열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의 구현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여기에서도 우리는 무진장한 극적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더우기 경전의 교리적 설명을 위한 비유나 설화에 비하면 선종의 어록들은 한층 더 동양적인 사유 형태와 현실적 휴머니즘에 근거해 있다. 특히 극도의 긴장감 속에 전개되는 세련되고 살아 있는 대화와 행동양식은 그 자체가 바로 연극의 한 장면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정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요하기에 족하다.
네째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교 연극의 활성화를 위해 불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연극론과 미학 이론의 정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연극계는 많은 문제점에 봉착해 있다.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따르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저항할 틈도 없이 파고드는 서구 문화의 공략은 실로 위기를 느낄 만큼 심각하다. 여기에 매카니즘 문화의 물량 공세는 더욱더 연극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줄을 서서 매표해야 하는 비좁고 먼 극장보다는 안방에서 콜라를 마시며 아무렇게나 누워 리모콘 하나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즐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처한 특수한 현실은 통제와 심의라는 이름 하에 오랜 기간 연극을 비롯한 제예술 분야의 발전에 제동을 걸어 왔다.
마땅한 우리의 연극론, 미화 이론이 부족한 오늘의 연극계는 더욱 사회적 현실과 미학적 문제 간의 갈등을 겪고 있다. 불교 연극계의 상황도 우리 연극계가 겪고 있는 현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이에 ‘공의 연극론’ 같은 전통사상에 근거한 우리들의 연극론, 미학론의 활발한 제기만이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갈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한다.

다음은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불교 종단적인 차원에서 불교 연극 활성화에 관심을 갖고 지원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요약해 본다.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불교극단의 창단이다. 한 번의 공연을 위해 모였다 해체되는 종래의 그러한 극단이 아니라 각 사찰 중심의, 그리고 종단 지원하의 불교 전문 극단의 설립이 절실히 요구된다. 마치 국립극단처럼 체계적인 훈련과, 정기적 공연 스케줄을 가질 이들 엄선된 단원들은 수준 높은 공연을 통해 일반 연극계에 신선하고도 새로운 기여를 할 것이며, 동시에 불교 예술의 진작을 통한 포교적 성과에도 크게 한 몫을 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는 불교연극 전용 상설 극장의 설립이다. 마치 매주 일요일 ‘서울 놀이마당’에 가면 어김없이 전통연회를 볼 수 있듯이, 상설 극장에서도 여러 개의 레퍼토리를 갖고 순환적인 공연을 해야 한다. 굳이 새로운 시설의 호화로운 극장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기존의 사찰건물 내의 회관이나 빈터를 정비해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훌륭한 시설이 아니라, 언제나 그 시간에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불교 연극이 공연된다는 점이 될 것이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첫번째의 문제가 해결된 연후에 가능한 사항이다.
그 다음으로 각 불교지를 통한 적극적인 불교 희곡의 공모가 권장되어야 한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몇몇의 불교지에도 ‘신춘문예’니, ‘△△문학상’이니 하는 작가 발굴란이 있고 또 굳이 희곡에 차별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이 시나 소설 일색의 잔치이기 쉬운 이러한 공모에 구색 갖추기 격으로 끼워만 놓을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액(?)의 상금을 걸고 참신하고 수준높은 불교 회곡을 생산하도록 격려, 지원해 주어야 할 것이다.
네번째로는 매년 불탄일이나 불교행사일을 기해 ‘불교연극제’를 개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역량있는 신인과 극단의 발굴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활동과 행사를 권장, 지원하는 전문 부서를 종단 산하에 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불교연극을 비롯해 영화, TV 등 모든 불교 관계 드라마 제작시 요구되는 고증 및 자료 제공 등의 완벽한 협조 체제를 갖추게 됨은 물론, 제반 불교 문화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불교 연극에 대한 관심은 전체 연극의 한 부분으로서의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연극 자체에 대한 관심을 뜻한다. 모쪼록 불교 연극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이 연극을 아끼고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관심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여기서 본고를 맺는다.

마지막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