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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들의 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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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지견 1987년 12월 70호
잡지가 저널리즘 Journalism의 한부분을 담당하여 일반 민중의 사고나 행동을 좌우하는 힘이 지대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힘은 사회나 국가 정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서 때로는 잡지 출판이 권력에 의해 제한 또는 통제를 받아 온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본래 언론이 갖고 있는 기능과 사명 때문일 것이다.
언론은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물론 나라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까지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뉴스로서, 사회 현상의 문제점을 규명하기 위한 해설이나 논평으로서, 또는 상품이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정보수단으로서 날마다 우리의 생활과 함께 한다. 또한, 언론은 일반 대중의 공공 복리 촉진과,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한 여론 환기와 운동 전개는 물론, 정보 제공자이자 권리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 언론이 진정한 공공복리를 위해 헌신해 왔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로 처지에 따라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우리나라 언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불교계에도 언론이라는 것이 있다면, 불교 언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불교를 두고 ‘특수 사회’ 라고 한다. 그 말은 특수 사회일수록 올바른 비평의식이 없다는 숨은 뜻을 그 속에 담고 있다. 비평의식이 없는 사회일수록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행상의 윤리, 예컨대 ‘남의 잘못은 보지도 말고 잘한 점만 본받아라’고 하신 부처님이나 큰스님의 인격적 카리스마가 갖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정당한 주장과 올바른 비평의식을 갖는 사람은 말많고 시비 좋아하는 사람쯤으로 낙인 찍히기 딱 알맞다는 것이다.
물론 ‘남의 잘못은 보지도 말고 잘한 점만 본받아라’는 말이 결코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정당한 주장이나 건전한 비평의식마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일 따름이다. 비평의식이 없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물이 오래 고이면 썩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비평 기능이 없는 사회는 무능과 부정이 용납되어 부패되기 쉽다.
따라서 불교가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방향의 키를 잡기 위해서는 불교계 안에서 언론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오늘날처럼 다양화된 사회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매스커뮤니케이션 포교에 하루 빨리 눈을 돌려 그에 대해 부지런히 대처해나가야 하리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월간해인지 같은 경우는 내용이 알차고 편집도 깔끔하여 많은 불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만큼 언론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밖의 불교 잡지들, 이른바 ‘불교 언론’이라는 것은 전반적으로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그에 대해 필자는, 좀 엉뚱하지만, 어려서 읽은 동화 한편을 떠올리게 된다.

개구리 한 마리가 팔짝팔짝 뛰어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원래 그 개구리는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은 듯 가는 곳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 개구리는 높은 산에도, 바닷가에도 가 보았고, 캄캄한 밤에 들쥐의 공격을 받거나 뱀에게 쫓기기도 했다.
개구리는 신을 넘고 강을 건너 드디어 앞이 확 트인 평야에 이르렀다.
“여기야말로 내가 찾던 평화로운 곳이군…”
개구리는 평야를 내려다보면서 흡족해 하였다.
평야에는 여러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그 곳의 개구리들은 우물 안에서만 살면서 우물물이 바닥이 드러날 만큼 말라 가고 있어도 아무도 밖으로 나올 줄을 몰랐다.

평야를 달려온 개구리는 그 중 제일 깊고 커서, 먹을 것도 많아 보이는 우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마침 그 때 우물 안에서는 개구리의 왕이 심복 부하들을 데리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이 졸을 이렇게 움직이면 저쪽은 꼼짝도 못하겠지?”
개구리 왕이 졸 하나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네, 네, 그러믄요. 아주 잘 하셨읍니다.”
한 부하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다른 신하가 또 거들었다.
“임금님! 더 좋은 수가 있읍니다. 저쪽 졸을 이쪽으로 밀면 이쪽 말이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은 처음부터 적수가 있을 수 없는 장기판이었다.
어쨌든 그 개구리는 그 우물 안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 개구리는 동그란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날 일기를 관찰해서 보고했다.
“오늘은 날씨가 참 맑습니다.”
외지에서 뛰어들어온 개구리는 그날 일기를 사실대로 개구리 왕의 수석 부하에게 꼬박꼬박 보고했다. 그런데 왕의 수석 부하는 달랐다. 하루 종일 햇빛이 쨍쨍난 맑은 날씨였는데도 개구리 왕의 기분에 따라 날씨는 얼마든지 흐려질 수도 있었다.
“어허, 왜 오늘은 이렇게 몸이 무거운고? 비가 오려고 그러나?”
왕이 이렇게 얘기하면 그날 온종일 날씨가 맑아도 수석 부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햇빛이 쨍쨍한 날씨가 왕 앞에서 비가 내리는 날씨로 바뀌어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것을 바로잡을 개구리가 없었다. 만일 조금만 잘난 척을 했다가 왕에게 찍히게 되면 그 다음 날로 우물에서 추방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개구리 왕은 회의를 좋아했다. 여러 마리의 개구리들을 빙 둘러앉혀 놓고, 더러는 이웃 마을에 사는 개구리들도 초청해다가 각자 의견을 묻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산한 가을바람에 코스모스 꽃잎이 흩날려 우물 안으로 떨어져 들어왔다. 그러자 개구리 왕은 코스모스 꽃잎을 들고 회의를 시작했다.
“이게 과연 무엇인지 누구 아는 개구리 없느냐?”
그러자 패기만만한 부하가 나섰다.
“임금님, 그것은 깊은 모래 속에서 살고 있는 비단조개의 속옷입니다”
“아닙니다, 임금님. 그것은 여름 내내 이 우물에서 자란 잠자리의 날개올시다.”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 우물에서 사는 금붕어의 비늘옷입니다.”
그러자 개구리 왕이 말했다.
“하여튼 이것은 참으로 귀중한 거야. 금붕어의 비늘은 금빛 찬란하니까 이건 아마 금붕어의 비늘옷일 거야.”
그 때 외지에서 들어온 개구리가 나섰다.
“임금님, 그것은 꽃잎입니다.”
“이것이 꽃잎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코스모스라는 꽃잎이지요. 지금우물 밖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읍니다.”
“자네 말은 그럴듯하네만, 이건 꽃잎이 아닐세.”
개구리 왕이 이렇게 말하자 한 개구리가 외지에서 들어온 개구리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나서 왕에 게 공손히 말했다.
“임금님, 저도 어느 날 우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코스모스라는 걸 보았읍니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원래 꽃이 피지 않는 커다란 나무올습니다.”
“그래, 잘 봤어. 아마 그럴 거야.”
이렇게 되어 우물 안으로 떨어진 코스모스 꽃잎은 개구리들에 의해 금붕어가 달고 다니다 내버린 비늘로 바뀌고 말았다.

불교 언론이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언론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영과 제작의 기본적인 규범은 조금이라도 지켜져야 불교 언론이 활성화되리라 본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불교의 영세성과 함께 전문 인력 부재라는 요인에서, 다시 말해 제직에 재질있는 사람은 불교를 잘 모르고 불교를 잘 아는 사람은 제작에 재질이 없다는 요인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언제까지나 마냥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불교 언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무거운 사명 의식을 갖고,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참다운 불교 언론을 꽃피우는 데 전력 투구해야 하리라고 본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 불교 언론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