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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잡지의 나아갈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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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재천 1987년 12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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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의 향수’는 종교심의 발로이다. 죽음이 인간을 갈라놓을 때 인간은 필사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종교는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신성한 특권이다. 종교가 종교다운 매력을 지니는 것은 그 지고의 순수함에 있다. 그 순수함이 퇴색하여 현실과 영합할 때 종교는 제 빛깔과 향기를 잃게 되고,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자세를 겸비할 때 비로소 그 순수함은 유지된다. 불교가 상구보리(깨달음을 얻으려 함)의 자세를 도외시하고 하화중생(중생을 돕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사회개혁운동으로 탈바꿈한 꼴이 된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 사회를 조여매던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셨지만 그것이 단지 사회제도의 모순을 척결하기 위해서만 가르침을 편 것이라면, 불교는 불교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적은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회혁명 운동으로만 기록되었을 것이다. 또 하화중생은 무시하고 상구보리만을 추구한다면 사회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 각자의 고(苦)를 해결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고통의 문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초적으로 갖는, 사회 이전의 문제이며 아무리 좋은 제도로서도 풀어줄 수 없는 인간본연의 문제이다.
한편, 종교는 ‘가정(假定)’이다. 그 누구도 그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오로지 그에 대한 각자의 신념과 주관적 체험이 존재할 뿐이다. 신념이 흔들리거나 주관적 체험이 미약할 때 종교는 설 자리를 잃는다. 종교는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일 수도, 강요받아서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이러하다는 가르침을 알려 주고 믿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필요하다. 불교 잡지는 바로 여기에 존재 이유를 갖는다. 신념을 불어넣어 주고 많은 사람의 체험을 알려 주어 스스로의 것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불법(佛法)에 근거하여 복잡한 사회현상에 대해 진실을 파헤쳐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파사현정의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없이는 올바른 신념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 흘러다니는 말들을 주워담는 그릇 구실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이변에 있는 진실을 규명하고 불법에 비추어 판단하여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불교 잡지는 포교의 역할과 함께, 항상 독자와 함께 하는 겸허한 자세로 현실을 직시하고 제사하는 역할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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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는 종교가 종교이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바이다. 불법을 알리는 것은 불교 잡지가 반드시 행해야 할 책임이요 의무이다. 그것을 도외시하고 사회개혁에만 촛점을 둔다는 것은 총을 들지 않고 전장에 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부처님은 붇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바라문족, 왕족, 자본가, 상인에서 부녀자, 천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45년 동안 맨발로 걸으면서 교화했다. 그 넓은 지역을 교화하는 것이 처절한 고난의 연속이었듯이, 오늘의 불교 잡지도 결코 순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불교잡지는 재정적인 고충과 독자층의 빈곤, 참가자의 관심 부족 등으로 인하여 커다란 곤란을 받고 있다. 사찰에서 하는 외형적인 불사(佛事)에는 너도 나도 다투어 시주를 하면서도 정작 마음을 살찌워 줄 책보시에는 인색하다. 책을 통한 포교에 대한 이해 부족에 책읽기를 소홀히 하는 풍토가 가세하여, 불교 잡지는 구석에 내팽겨진 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법이 있기에 자포자기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위없는 깨달음에 들 수 있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들이 빨리 부처의 몸을 이룰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삼계가 모두 나의 것이요, 고통받는 중생들이 나의 아들이네’ 하는 한없는 자비의 마음이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불교잡지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여래가 만족하도록, 내 전신을 바쳐 봉사하는 심부름꾼이 되리라’ 하는, 부처님과 부모, 나라, 모든 중생에 대한 보은의 자세를 갖는 것이 포교를 담당하는 불교 잡지가 지녀야 할 태도이다. ‘평범한 벗은 친구가 도움을 청한 다음에 그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도움을 청한 일이 없지만 늘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는 말씀대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되돌려 주려는 회향의 정신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 잡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처님의 말씀을 자각하여 일상 생활 속에서 보살행을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남을 깨우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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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사회 속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과 같다. 살아 숨쉬는 그 자체가 이미 현실과 유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언제나 현실 사회를 꿰뚫어보는 예지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 잡지가 현실의 여여한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왜곡되고 편협된 질곡에서 중생들이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흔히 불교인은 현실감각이 무디다고 한다. 그것은 중도(中道), 공(空)에 대한 그릇된 인식, 즉 어중간하게 산술적인 사고, 현실은 헛된 것이라는 타협적, 염세적인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이럴 때 파사현정의 무서운 칼날은 어디서 녹슬고 있는가. 중도(中道)는 정도(正道)요, 공(空)은 반야지이다. 옳고 그름에 중간은 있을 수 없고 바른 지혜에 삿된 것은 끼어들지 못한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무사안일에 침잠해 있을 때 불교는 서서히 소멸해 가고 불법은 이땅에서 멀어져 갈 것이다. 불교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종교의 절대성과 이데올로기의 상대성을 분간 못하고 목청껏 소리를 높이는 것도 그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소치이다. 현실 세계는 상대적이므로, 출세간적(出世間的) 이상을 추구하는 불교는 정법에 비추어 현실을 나무라는 의연하고 당당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정법의 회초리를 휘둘러야 한다.
불교 잡지는 포교와 더불어 현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러자면 세론(世論)의 어느 한편에 가담하거나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지나치게 세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너희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강압을 해서도 곤란하다. 주입식 사고는 단기간으로는 효율적이고 능률적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러한 효과가 역기능을 할 수 있다. 자율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할 인간의 사고가 타율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치를 얻지 못한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선도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4
오늘의 불교 잡지가 제구실을 다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적당한 지면 채우기로 연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
우선 불교 잡지가 포교의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현대와 같이 고도로 분업화된 대량 산업 사회에서 그 다양한 계층을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있는 잡지를 만든다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다. 연령, 학식 정도, 성별, 지위, 환경 등에 따라 관심의 대상도 천차만별이다. 그러한 것을 일시에 수용하여 소화해낼 수는 없다 유치원생에게는 유치원생에 맞는 포교를 해야 하고, 군인에게는 군인에게 알맞은 포교를 해야 한다. 그렇게 대상을 세분화하여 그에 걸맞는 포교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불교잡지의 능력을 벗어날 때는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종단 차원의 지원과 각성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각 불교 잡지마다 일정한 대상을 상대로 하는 전문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상당한 포교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필진의 개발이 시급하다. 불교인에게만 집필을 하도록 함으로써 불교 잡지는 스스로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있다. 우물안 개구리식의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과감한 시도를 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발간되는 10여종의 불교 잡지가 현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규정할 수는 없으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맑은 거울은 티끌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실 그대로를 보여준다. 거울은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적당히 냉동하여 포장한 것으로 만족하면 속으로 썩어들어가 다시는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 파사현정의 칼날을 다시 잘 갈아서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옳은 부분은 발현시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드러내는 용기와 각성,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