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윤리와 도덕의 치장을 조롱하며 운수처럼 떠도는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마치 아지랑이를 좇는 기분이다. 서울 어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서면 이미 스님의 그림자는 부산으로 통도사로 사라지고 없다. 먼 듯 가깝고 가까운 듯 멀기만 하다.
스님의 뒤를 좇는 길섶에서 오히려 스님의 참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된다. 스님이 남기고 간 달마를 보고 저마다 달리 말하는 소감-유치하다, 파격적이다, 깨끗하다, 해학적이다, 자유혼의 비상이 있다, 달마스님의 푸른 눈빛이 인상적이다, 암수의 영원한 모순과 질기고 긴 싸움이다,
인간과 자연 세속과 탈속의 합일이다, 지상의 온갖 굴레를 벗어 던진 우주적 정열이다. 하는 따위-이 그것이다. 그리고 중광스님을 찾는 길에 스님의 그림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때마다 이런 대답을 했다. “그거야 각자 보기 나름이지요. 맑은 눈으로 보면 동심이 보이고, 자신을 한꺼풀 벗기고 나서 감상하면 스님의 자유자재가 나타나지요.“ 스님의 그림 가운데에 특히 달마도는 선화의 고준함을 세속적인 우리의 삶 가운데로 가져와 좀더 우리들과 친숙하게 해 주었다. 보통 우리가 보아왔던 면벽 달마와 호엽 달마에서 보는 엄숙함이 없고 달마스님의 어릴 때 모습인 것처럼 천진무구한 동자 그림이 우리를 한없는 동심의 세계에 머물게 한다.
스님의 그림이 처음 지상에 공개되기 시작한 게 국립박물관 신문에 네 번 연재되면서부터이지 싶다. 종래의 달마가 전혀 새로운 얼굴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마치 정교하게 짜여진 게임의 룰을 도통 무시하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무법자의 전격적인 도전과 같은 셈이다. 말하자면 중광식 무법자의 달마이다. 전통적인 화법이나 상식을 벗어난 화풍은 우리의 미의식 세계를 흔들어 놓을 만하다. 오직 스님의 무화법의 화도 행각이 빚어 낸 자유혼의 용감한 표현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스님의 그림 세계는 그의 삶의 진폭만큼이나 다양하다. 그것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끝임없이 새로워지고자 하는 스님의 창조적 열정의 소산이지 싶다. 스님의 다양한 선화를 대강 분류해 보면 선화의 기본 모티브인 달마도와 닭과 학, 소 들의 동물을 소재로 한 동물화와 어린이의 천진한 동심세계를 그린 동화 같은 그림과 그리고 천진무구한 동자의 얼굴을 그린 선화 들이다.
스님의 달마도는 절망의 한 표현이다. 불교적 해탈이 본원적 존재의 새로움을 획득하는 것이고 삶의 진폭 또 한 그러한 자유로움이 제약되지 않는 유연함이어야만 한다면, 중광스님의 파격과 무애의 화풍은 이러한 자유를 제약하는 규범과 제도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며,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전통에 대한 조롱이며, 스스로에 보내는 해학이기도 하다. 엄격하고 긴장되어야할 달마그림에 느닷없이 성기를 머리에 그려 넣는 행위는 달마상을 비도덕적으로 몰고 가서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과 허탈감을 갖게 하는 절망의 표현이기 도하다. 그리고 이렇게 기성의 관습어에는 조롱의 똥바가지를 보내고 스스로는 절망하면서도 동물화를 그리는 태도는 해학이라고 해야 좋을 듯하다. 암탉과 수탉이 커다란 성기를 내놓고 서로 애무하는 모습은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지배와 사육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중생의 반열에 놓고 사색하는 표현인 셈이다. 숙명적으로 타고난 윤회의 동업은 사람과 동물이 한치도 차이가 없다는 불교적 윤회의 단면을 화폭에 담고 있다하겠다.
유치찬란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노라면 우리는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마치 유치원에서 처음 그림을 배우는 아이들이 서툴고 어색한 손짓으로 그냥 내려갈긴 듯이 그린 그림처럼 무구하고 천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중광의 천진성과 천재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마음은 하얗지 않더라는 말과도 같이. 이처럼 중광스님은 자연과 동심과 선적인 세계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무구의 빈 마음으로 돌아가면 본질적으로 같은 세계임을 화풍에 담아 웅변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그는 특유의 재기와 천진성으로 기성권위에는 조롱을 보내고 자연과 동심에는 끝없는 해학을 주고 마침내는 스스로의 절망의 한 표현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중광의 그림 세계를 누구보다 일찍 이해하고 따뜻한 눈길을 보낸 시인 구상의 그림 평은 귀에 새겨 볼 만하다.
“본질적으로 예술가에게는 원초적인 야성과 고도로 발달된 지성이 한 사람 속에 있으며, 진실과 허황이 한 자리에 있게 마련이요, 이 모순과 대립이 심각할수록 그리고 이것을 통어해 낼수록 그의 예술은 정채를 발한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이란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광은 저러한 예술의 모순적 양면을 천성적으로 너무나도 강렬하게 지니고 있으며, 더구나 또한 그것이 구도적인 견성 실험 속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다.“
스님의 그림 앞에 서면 번뇌망상이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벗겨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막힌 숨통을 터주고 알지 못할 경직을 이완시켜 주는 청량제처럼 시원함을 맛보게 된다. 기계처럼 정밀하게 조직되고 오차없이 진행되는 비정한 현대 사회에 불현 듯 나타나 자유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깨우치는 스님의 기행과 그림은 시원한 새로운 공기이다. 그의 무애하고 무소유한 삶처럼 걸레지만 때 묻지 않은 걸레로 늘 우리 곁에 남아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죽비가 되어야 하리라. 자신이 일구어 낸 무애왕국의 왕으로 걸레 속에 흰 손수건 같은 얼굴을 하고 어디서 어떤 창조를 하고 있을까. 입고 있는 걸레로 이 세상의 먼지를 닦아내려 하는가. 스님의 자작시 가운데에 한수를 옮겨 본다.
나는 걸레에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 세계는 산산히 부셔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