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숙은 사파혜촌 사람들과 같이 시사파숲에 가서 가섭에게 나아가 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물었다.
저는 다른 세상도 없고 또다시 남도 없으며 죄와 복의 갚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뜻은 어떠합니까?
가섭이 대답해 말했다.
지금 이 위에 있는 해와 달은 이 세상인가, 다른 세상인가? 사람인가, 하늘인가?
해와 달은 다른 세상이요, 이 세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이요, 사람은 아닙니다.
이것으로써 알 수 있다. 반드시 다른 세상이 있고 또 다시 태어남도 있고 선악의 갚음도 있다.
저는 다음 여섯 가지 이유로, 다른 세상이 없고 다시 태어남도 없으며 선악의 갚음도 없는 줄 압니다.
첫째, 지금까지 죽은 자는 많지만 아무도 다시 돌아와 그가 태어난 곳을 말해 주는 자는 없었읍니다.
둘째, 십선업(十善業)을 닦아 천상에 태어날 만한 사람도 기별해 준 적은 없었읍니다.
세째, 죄 지은 사람을 가죽부대에 넣고 진흙을 덮어 굳게 봉하여 새지 않게 하였으나 죽을 때 정신의 오가는 것을 보
지 못하였읍니다.
네째, 죄가 무거운 자의 몸을 묶고 그 가죽을 벗겨내고 뼈를 쪼개어도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식신을 찾을 수가 없었읍
니다.
다섯째, 죽은 자의 시체는 산사람보다 무거워서 식신이 육체를 떠난 것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여섯째, 병이 극심한 사람은 일으키고 눕힐 때는 말을 하다가도, 방금 죽은 뒤에는 팔다리는 구부릴 수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하니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압니다.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도 이제 그대를 위해 비유로써 그것을 깨닫게 하리라. 첫째, 무거운 죄 지은 사람이 관청에 붙들려 갔을 때 친족에게 사정을 말하고 오겠다고 해도 허락을 받을 수 없듯이, 지옥에서도 죽은 자를 인간세상에 보내 줄 이치가 없다.
둘째, 천상에 태어난 사람이 마치 똥물을 뒤집어썼던 몸을 씻고 좋은 비단옷을 입고 난후에는 우리가 사는 오탁악세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세째, 꿈속에서 산과 강을 보지만 육체 속에 식신이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죽은 사람의 식신을 볼 수 있겠는가.
네째, 불로 나무를 태워서 재를 만들고 나서, 나무가 탈때 불이 있었다고 하여 나무를 쪼개어 가루를 내더라도 불을 찾지 못하듯이, 아무리 육체를 쪼개더라도 식신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섯째, 쇳덩이는 뜨겁게 달았을 때는 광택이 나고 부드럽고 가볍지만 식으면 무겁듯이, 사람도 살아있을 때는 광택이 나고 가벼운 것이다.
여섯째, 옛날 고동을 부는 사람이 고동을 불고 땅에 놓아 두었다. 모르는 사람이 고동은 저절로 소리가 나는 줄 알고 “너, 소리를 내어라”고 소리쳤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손이 있고 입이 있고 기운이 있어 고동을 분 뒤에야 비로소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사람도 목숨이 있고 식(識)이 있고 숨의 출입이 있어야 능히 말하는 것이다.
바라문이여, 눈앞의 현재 일로써 중생을 관찰해서는 안된다. 잠자지 않고 정진을 부지런히 하여 도품(道品)을 구족한 뒤 삼매의 힘으로 하늘눈(天眼)을 얻어 중생을 관찰하면 반드시 다른 세상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마땅히 이 사악한 소견을 버리고 영원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 고뇌를 더하지 말라.
그러나 저는 버릴 수 없읍니다.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외고 익혀서 이미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섭은 다시 비유로써 말했다.
오랜 옛날 어떤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그 때 두 사람이 있어 서로 짝이 되어 재물을 구하러 떠났다.
얼마를 가다가 길가에 삼(麻)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지혜로운 자가 말하여 함께 나누어 짊어지고 떠났다. 다시 한 마을을 지나다가 이번에는 삼실을 발견하여, 지혜 있는 자는 삼실로 바꾸어 가졌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말했다. “나는 이미 삼을 가졌고 단단히 짊어졌다. 이것을 버릴 수 없다.” 다시 얼마를 더 가다가 황금을 만났다. 지혜로운 자는 삼실을 다시 황금으로 바꾸어 소중히 간직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어리석은 자는 이번에도 “나는 이미 삼을 가져 단단히 묶었고 또 가지고 오느라고 먼길을 걸었다. 나는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바라문이여, 이제 그 악한 습관과 비뚤어진 소견으로 영원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 고뇌를 더하도록 하지 말라. 그것은 마치 저 삼을 짊어진 사람이 고집이 세어, 부질없이 스스로를 피로하게 만들고 친척들도 기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빈궁하여 스스로 걱정과 고통을 더 하는 것과 같다.
당신 말대로 만일 선을 행하면 하늘에 태어난다면, 당신들은 마땅히 칼로 스스로 목을 찌르거나 독약을 마시거나 혹은 몸을 다섯 가지로 묶어 스스로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재 삶을 탐하여 죽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곧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옛날 사파혜촌에 120세 되는 늙은 바라문이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본처는 이미 한 아들을 낳았고, 다른 아내는 처음으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얼마 후 바라문이 죽자 본처의 아들은 작은 어머니에게 ‘가진 재산을 모두 내게 달라. 네가 가질 몫은 없다”며 괴롭혔다. 여인은 “조금 기다려라. 시내아이가 태어나면 재물을 반씩 갈라 갖고, 계집아이라면 네 아내로 삼기로 하자”고 타일렀다. 그러나 본처의 아들이 자꾸 채근을 하자, 여인은 뱃속의 아이가 사내아이인지 계집애인지를 알려고 날카로운 칼로 스스로 배를 갈랐다. 그리하여 자신도, 어린 태아도 죽이고 말았다.
바라문이여, 그대도 또한 그와 같아서 자신을 죽이고 또 남을 죽이려 한다.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이 꾸준히 힘써 착함을 닦고 계덕(戒德)을 두루 갖추면 이 세상에 살면서 이익됨이 많아, 천상과 인간은 안락을 얻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신의 주장과 관념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여기 나오는 바라문 폐숙은 내세가 없으며 선악의 과보도 없다는 단멸론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그들의 관념에 비추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내세를 부정하고 인연법을 믿지 않으려 한다.
처음의 비유는 내세를 부정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며 다음은 명예와 이기심 때문에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고, 마지막의 비유는 죽음을 찬미하며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사견에 떨어진 것을 풍자한 것이다.
불교는 인연을 믿지만 단멸(斷滅)을 믿지 아니하며, 그렇다고 항상(恒常)하다는 집착은 더우기 하지 않는다. 현실로 주어진 지금을 가장 아끼고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계율과 덕행을 가섭은 찬탄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사물의 근원을 살펴서 그것의 일어나고 사라짐이 오직 연기(緣起)에 의한 것임을 알고 또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므로 삶에 탐착하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사회와 인류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