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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벽암(碧巖)대사와 호암(虎巖)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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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0년 03월 97호
임진왜란은 누구나 다 알다시피 조선사(朝鮮史)에서 민족의 진로와 역사 자체를 뒤흔들어 놓을 만큼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전쟁이었다.
그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참혹하고 피폐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조에 들어와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원이 헐리고 통폐합되기도 하여 없어져 버린 것이 허다했는데, 이 전쟁에서 또다시 전란의 피해로 없어진 사원이나 유물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불교사에 있어서 그 문화와 재산의 극심한 손실과 함께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동시에 부여하기도 하였다.
곧, 전쟁중의 많은 승군(僧軍)들과 의승(義僧)들의 활약은 불교에 대한 일반의 신망과 위신력을 회복하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였으니, 호국불교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심어준 표본이 되기도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분들이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사명대사와 영규(靈圭)대사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조선조 불교사의 중흥적인 서산대사의 법맥이 걸출한 여러 제지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조선조의 법맥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태고 보우(太古普愚)와 나옹 혜권(懶翁惠勸)의 법손들에 의해 적지 않게 이어졌지만 조선조의 승단에 대한 극심한 탄압은 불교 자체를 심산사암(深山寺庵)으로 제한시켰으며 따라서 면면히 이어 오던 법맥과 종통은 겨우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오던 터였다. 그러다 조선중기에 이르러 그 종통과 법맥을 다시금 확고하게 일으켜 세운 중흥조가 바로 서산대사였다.
따라서 그 실날처럼 위태로왔던 벽송 지엄(碧松智嚴)의 문하 부용 영관(笑蓉靈觀)의 법맥을 서산대사가 이었으며, 다시 흔히 사대가(四大家)로 불리우는 그의 제자들 즉 송운 유정(松雲惟政), 편양 언기(鞭羊彦機), 소요 태능(逍遙太能), 정관 일선(靜觀一禪)과 같은 걸출한 고승들이 그 법맥을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서산대사와 같이 일반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영관 부용의 법맥을 이은 부휴선수(浮休善修)대사의 법맥 또한 한국 불교사의 준봉이었다.
선수(善修, 1543-1615)대사는 서산대사처럼 그 당시 사회 참여에는 활발하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품과 철저한 두타행으로 모든 승도의 귀감이 되었으며 서산대사가 주로 묘향산에 머물렀는데 비하여 남쪽의 지리산과 덕유산에 머물러 지냈으며 글씨가 사명대사와 함께 명필이었음을 백곡집(白谷集)은 전한다.
이 부휴대사의 고제(高第)로 각성(覺性)스님이 계셨는데 각성스님께서 가야산에 머무셨다는 흔적이 나타난다.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스님의 자(字)는 징원(澄圓)이었으며 호는 벽암(碧巖)이다. 속성은 김씨이며 보은(報恩) 사람이었다.
일찌기 열네살의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부휴대사를 만나 사사(師事)하였다. 그뒤 줄곧 부휴스님을 따라 속리산 덕원, 가야산, 금강산 등을 다니며 정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사명스님께서 부휴스님을 천거하여 진두(陳頭)에 나서게 하였을 때 벽암스님은 스승 대신 싸움터에 나가서 명장(明將) 이종성과 함께 해전(海戰)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 때는 무고한 고발로 스승 부휴대사와 함께 경옥(京獄)에 갇혔다가 나오기도 했으며 그 후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總攝)이 되어 봉은사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인조 2년(1624)에는 조정이 승려들에게 남한산성을 축조하도록 하였을 때 스님을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에 임명하였으며 3년만에 축성을 완성하자 인조는 스님에게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와 함께 의발을 내렸다.
그 뒤 지리산 화엄사를 수리하고 중생제도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만났다.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승(義僧)을 모았다. 그 의승의 숫자가 삼천명이나 되었는데 그 이름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하고 스스로 의승대장이 되어 북상(北上)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進軍)을 중지하였다.
그후 송광사와 해인사 등지에서 교화를 펼치다가 화엄사로 돌아가 현종 원년인 서기 1660년에 입적하였다.
그의 문하(門下)에는 취미수초(翠微守初)와 백곡처능(白谷處能)을 비롯한 쟁쟁한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는 서산대사의 문하를 방불케 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체정 호암(體淨虎巖 1687-1748)스님은 법명이 체정이며 호암은 호이다. 스님은 홍양인(興陽人)으로 서산대사 이래 편양언기, 풍담 세찰(楓潭世察), 월담설셜제(月潭雪齊), 환성지안(喚醒志安)의 법맥을 이었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이고 숙종 13년인 서기 1687년에 태어나 영조 24년인 1748년에 입적하였다.
그의 스승 환성 지안대사도 화엄사상의 대가이었듯이 스님도 화엄학에 대가였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스님의 뒤를 잇는 설파(雪坡 1710-1791)나 유일(有一 1720-1799)도 대단한 화엄의 종장이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주로 해인사와 통도사에 오랫동안 주석하였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학승들이 항상 그를 따랐으며 언제나 그의 강석에는 100여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스님에게는 신이한 행적들이 많았는데 집에 불이나 온통 집이 불타고 있었는데 스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앓았는데도 아무데도 다친 곳이나 상한 곳이 없었는가 하면 또 큰 강을 건널 때에도 물에 빠져죽지 않고 살아났으며 그밖에도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나 바위 사이에 폼을 피하여 살아난 일도 있는 등 스님에게는 늘 신이한 일이 뒤따랐다.
스님은 만년(晩年)에 이르러 대중의 번거로움을 떠나서 오로지 선정에만 몰두하여 관심(觀心)만을 닦았는데 금강산 표훈사의 내원통암(內圓通암(庵))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은 별로 전하는 것이 없고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앞에서 잠깐 언급한 설파 상언(雪坡尙彦)과 연담 유일(蓮潭有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