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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를 찍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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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주명덕 1987년 12월 70호
“요즘도 해인사를 다니나? 그 작업은 언제쯤 끝나나?”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물어오는 인사말을 사진하는 동료나 친우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해인사와 인연을 맺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도 어언 3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딴에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노라했는데, 필름화일을 들여다보니 아쉽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스스로 게으름을 탓하게도 되고, 내 사진의 한계성에 그저 한스러움마저 느끼게 된다고 할까…
70년대초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작업은 나의 나라, 내 조국의 의미를 반추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아의 음악가들이나 북구라파의 음악가들처럼 내가 태어난 이 땅, 나의 부모가 태어나고 자란 이 나라의 아름다움을 나의 사진으로 노래해 보겠다는 일념뿐이었다-드볼작, 스매타나, 바르톡, 시밸리우스, 이런 음악가들을 연상하고 이름을 되씹어 보는 것이 주제넘은 짓인가. 하여튼 그런 내 작업의 마무리로 우리나라 절집의 생활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면면히 이어 온 우리 민족의 거대한 뿌리가 우리 가슴속 깊이 남아있고, 그것이 불교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해인사를 나의 카메라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나보다 먼저 해인사를 표현한 여러 기록들을 가능한 대로 많이 찾아보려 애쓰기도 했다. 사진은 물론이며 옛날에 그린 그림까지 포함시켰다. 그런데 겸제의 선면(扁面) 해인사 실경 외에는 이렇다 하게 꼽을 만한 그림이 없었으며, 사진 또한 나를 감동시킬 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다. 해인사 창건 이래로 해인사를 가장 아름답게 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주문과 큰 법당에 있는 해강의 현판 명필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남을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이와 같은 다짐은 한 사람의 사진가로서 우리나라 최고의 가람과 이 곳에서 수행 정진하고 있는 승려들을 대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내 자존심과 결부되었다. 그것은 선모(羨慕)의 마음이기도 하였다.
얼마간 해인사에 머물면서 나름대로 촬영을 하고, 각 계절마다 특징적인 풍경들을 보충하면 되리라던 처음의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2년 6개월 쯤이 지난 지금에야 이제 해인사를 좀 알게 된 듯하고, 절집의 풍습에도 그나마 겨우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나의 작업은 지금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동안은 우리나라의 절들에 근접하여 확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키우는 공부를 한 셈이다. 그 공부를 해인사에서 하였고, 해인지와 해인지에 관계된 여러 스님들이 이런 내 공부를 도아준 것이다. 그분들게 고마운 마음을 내 가슴속 깊이 새겨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은 나의 되지못한 사진으로 두 번이나 해인사 달력을 만들어 주기에 주저치 않았으며, 해인지의 표지와 본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주기도 하였다.
이 글을 청탁받았을 때, 나는 해인사를 다니며 보고 느낀 많은 것을 쓰겠노라고 장담하였지만 나처럼 그저 잠깐의 인연으로 천여년 말없이 버티어온 대사찰을 어찌 무어라고 평할 수 있겠는가. 외람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해인사는 절을 찾아오는 일반 불교 신도들을 부처님의 품으로 교화시키는 곳이라기보다는 승려 여러분들이 수행하고 공부하는 곳이라는 것, 신도는 안중에 없고 스님들만이 존재하는 곳, 이런 모습을 갖고도 거대한 가람이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계속 버티어 갈 그 큰 힘은 과연 무엇인지, 아둔한 나에게는 불가사의한 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해인사를 다니면서 좀 의아스럽게 느껴진 것들이 더러 있다. 해인사는 무엇보다도, 다른 큰 절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많은 부속 암자들이 크고 작다는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그 기능에서는 결국 다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퍽 이상스럽게 생각된다. 물론 예로부터 내려오는 절집의 풍습 때문이려니 싶지만 가령 어느 암자는 선방, 또 다른 암자는 강원, 또 다른 곳은 두부와 콩나물 등 식품만 제조하는 절, 또 어느 암자는 병원의 역할만 하는 식으로 나누어 저마다
전문암자로서 구실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면서, 한편으로 종교도 시대에 따라 포교하는 방법, 수행하고 공부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 부처님 오신 날에 경상도의 한 고급관리가 축사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 그날은 비록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해인사에 와서는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야지, ‘축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는 종교에 귀의하기 마련이고, 그 종교의 힘과 믿음을 빛내기 위해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러기에 해인사도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과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작업은 오늘도 이루어져야 하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젊은 한글 세대, 또는 더 어린 컴퓨터 시대의 어린이들이 이해하고 감복할 수 있는 불교예술로 발전해나가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우리나라해서 우리의 예술을 수용할 수 있는 종교는 단연 불교밖에 없으며, 그 역할을 해인사가 해야 된다고 믿는다. 해인사는 해인사에서 기거하고 있는 스님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사는 온 국민 모두의 것이며 ‘대한민국의 해인사’인 것이다. 이 곳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속진에 묻어 사는 우리들에게는 큰 힘과 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스님들이 알아 주면 더 좋겠다.
그동안 해인사와 가야산을 많이 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길상암과 고운암은 가보지 못했다. 가을 어느 날 해인사 큰절을 떠나 유유자적 수도암, 청량사까지 등행을 해보리라던 계획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아직도 내가 많은 부분을 못보았다는 여분이 앞으로도 더 많이, 더 아름답게, 더 진실되게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해인사를 찾는 구실이 될 것이다.
방장스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내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내가 사진작업을 계속하는 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소중한 일이다.
그문 두터운 선방과 장경각 안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을 때의 감격스러움과 함께 ‘저 놈 또 뭣하러 왔어?’ 하지 않고 스님네들이 항상 나를 반겨 주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