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환속(還俗)을 하자.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 민중(民衆)으로 돌아가자. 인류사 이래 이제까지의 모든 종교집단의 일체의 허위의식에 반(反)하여 그들의 집단 이기심에 등을 돌리고 순수한 한 사람의 속인(俗人)으로, 민중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이제까지 멸시하고 속인(俗人)이라고 내려다봤던, 성직자연하는 계급의식에서 탈피하여 한 사람의 속인으로 돌아가자.
우리 성직자·수행자라는 무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도록 파렴치한 족속들이다. 소위 속인들이 갖다바치는 재물 위에 우리의 의식주의 기본이 걸려 있으니, 우리 성직자·수행자 무리의 삶은 그대로 기생적 삶이다. 그대로 착취적 삶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생적·착취적 삶이 그대로 반(反)민중적 삶인 것은 그 어떤 논리로도 부정할 수 없다. 호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리가 중생제도를, 민중해방을 어쩌고저쩌고 함은 참으로 파렴치한 적반하장이다.
우리 착취·기생적 집단은, 다시 말해서 민중을 등쳐먹고 사는 무리들은 민중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성직자·수행자 집단의 순수 회복의 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자신들의 허울인 성직자·수행자 집단의 일원임을 그만두는 일이다. 말하자면 환속(還俗)하는 일이다. 환민중(還民衆)하는 일이다. 법의(法衣)를 벗고 민중의 옷을 걸치는 일이다.
오직 이 일로써만이 순수 회복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착취·기생적 삶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만둘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제 아무리 부처님을 찜쪄먹고 예수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있을지라도(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지만), 그런 그의 삶의 바탕이 민중을 등쳐먹는 착취적 삶, 기생적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따라서 처음부터
반(反)부처님이요,
반(反)예수님이요,
반(反)하나님이다.
마찬가지로 반(反)민중적, 반민족적이다. 반역사적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부당한 삶일 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종교집단의 성직자·수행자의 삶은 제 아무리 그럴싸하게 눈가리고 아웅할지라도 착취·기생적 삶이다. 다만 우리의 오랜 켸켸묵은 인류문화의 고질적 악습으로 해서 이런 현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양 눈감아 주고 용인하고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탐욕을 밑천으로 한, 서로가 서로를 속임이다. 진실한 삶에의 용기 부족이다
진작부터 세상 사람을 속인이라고 내려다봤던(그렇게 함으로써만이 그들의 절망과 희망을 조작·조종 내지는 통제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그런 속인으로부터 시주다, 현금이 다, 복전(福田)이다, 십일조다 하여, 성전건축헌금, 감사헌금, 약정현금, 무슨무슨 헌금, 무슨무슨 시주다 하여 부처님 팔고, 하나님 팔아 별의 별 명목의 종교세를 받아먹어 왔으니,
우리 성직자·수행자는 그 재물로 얼마나 호의호식하고
막행막식하고
유유자적하고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산산물물(山山水水)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하고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두두물물하고
수수방관하고
안면몰수하고
중상모략하고
없는 걸 있는 것처럼
있는 걸 없는 것처럼
부처님을 지어내고
하나님을 지어내고
온갖 구름잡는 소리로
세상을 날조하여 오지 않았던가.
또한
극락정토(極樂淨土)하고
안심유락(安心遊樂)하고
선정삼매(禪定三昧)하고
회두타파(話頭打破)하고
기도염불하고
지옥 천당하고
죄인심판하고
업장소멸(業障燒滅)하고
사주팔자하고
간증설교하고
고백성사하고
수계세례하고
기성신진, 세력다툼하고
산산물물, 아전인수하여 그 얼마나 민중의 고통에 불참하여 왔던가.
하긴 불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서로의 상대적 생활공간이 다르고 성직(聖職)과 속인(俗人)의 계급이 다르고, 소위 성(聖)과 속(俗)의 차원이 다르고, 그 생활방편이 다르다. 따라서 의식주에 아무런 걱정없이 이처럼… 잘 아시는 바와같이 그냥… 천당극락 걱정없이… 그러니까, 지옥도 걱정없이, 어쨌거나 그냥… 거시기… 그렇다! 실로 살찐 돼지가 부럽지 않았다 -누구 있어 할 말 없겠는가. 그러나 양심으로 살자. 인간으로 살자. 뮛한 말로 좆도 아니다. 〈아니다〉. 정말 진짜로 결코 〈아니다〉. 터럭끝만큼도 용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일찌기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직자·수행자라는 자가 천문학적인 재물과조직으로 자기 아성을 공고히 쌓아 카리스마적 권위와 권력에 너나없이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보다 더한 종교인의 허울을 쓴 허위의식인 탐욕적 괴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우리 성직자·수행자가 밖으로 사회에 참여하라, 민중에 동참하라, 분단이 어떻고 통일이 어떻고 있는 대로 떠벌리지만, 우리 집단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독소를 감추고 끊임없이 민중을 착취하는 기생적 삶을 그만두지 못하면서, 그 무슨, 민중의 고통에 동참이란 뻔뻔스런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모습으로는 천년만년 지나도 민중도 통일도,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깨어 있는 민중성으로 이러한 독소 조항을 척결하는 일이 급선무인 것은 오직 민중적 삶만이 진실한 삶이자 민족통일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자신 민중이 아니고 민중을 등쳐먹으면서 민중에 동참하라는 말은 사기다. 그리고 민중이 아니라면 민중을 착취하는 무리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우리 종교집단의 생활방편은 가난한 민중을 등쳐먹고 부유한 착취계급의 복전(福田)에 아부한다. 그들의 탐욕에 부채질한다. 그들의 봉사·희생·희사의 마음에, 그리고 사행심(射倖心)에 미끼를 던진다. 그래서 어쨌거나 울궈낸다. 좌우지간에 울궈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당한 삶의 터전에 쌓아올린 인류사의 종교문명은 그대로 부정부패의 온상이다. 온갖 탐욕적 요소의 은둔처이다. 비밀 지하 요정이다.
종교, 그것은 한갖 민중 착취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잘 이는 바와 같이 제아무리 좋은 사상이나 제도일지라도 일단 이데올로기화되면, 그것은 착취·수탈·억압 개념이 되고 만다. 그 어떤 종교나 자유민주든 사회주의든지간에.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생각이나 욕망을 냉철하게 살피지 않으면 그놈에게 붙잡혀 먹히우고 만다.
일찌기 종교의 발단은 무엇이었던가. 인간의 내면에 관념이 들어앉자 종교적 관념도 함께 들어앉게 되었다. 인간이 이를 소유의 양식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은 조직화되고 집단화되고, 조직의 관리요 정신의 관리인, 그리고 그 통제인 도그마와 카리스마적 권위가 창출된다. 소위 도(道)가 창출된다. 부처님과 하나님이 창출되고, 천당 극함이 창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좋든 싫든 이데올로기화된다. 따라서 자신과 사회와 민중과 진실을 옭아맨다.
따라서 종교집단이 내거는 이름이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깨달음이든 그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을 이룸은, 성취함은 그대로 삶의 진실에 반(反)한다. 자비가 부처님이고 사랑이 곧 하나님일지라도 종교가 내거는 이름을 통한 그것은 가짜다. 위선이다.
따라서 내가 부처님이라든지, 내가 하나님이라든지, 내가 깨달았다든지 하는 등등의 수작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삶의 진실에 반(反)함이며, 한낱 자의식(自意識)에 지나지 않는 주관적 세계를 보편타당한 세계로 못박고자 하는 환상적 염원이자 또하나의 교활한 탐욕의 눈뜸이다.
보라, 지난날의 유물인 수많은 성인 성자 교조들을. 그들을 둘러싼 세력 다툼을. 성인·성자라나 그것은 한낱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성인·성자가 추종자를 허락한다면, 조직을 허락한다면, 그는 단연코 가짜다. 사기다. 추종은 세력을 부르고 카리스마적 권위와 권력을, 굴종과 노예를 부르고, 마침내 싸움을, 죽임을 부른다. 우리, 부처님과 하나님의 추종자들이여, 언제나 싸움과〈죽임〉 부름을 그만둘 것인가.
보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적 갈등의 싸움을. 죽임을. 무엇보다도 한반도 손바닥만한 땅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온갖 잡동사니 종교집단들의 해괴망측한 작태를. 음모와 술수를. 집단 세력화의 광분을. 그 집단을, 그 종교를 위한 인간수단화의 파렴치를. 무엇보다도 그 구성원 낱낱의 탐욕을 다지기 위한 집단에의 끈끈한 집착과 똘똘뭉친 이해타산을.
도대체 무엇이 깨달음이며, 무엇이 부처님이며, 하나님이며, 천당지옥 극락인가. 참으로 가당찮은 수작이다. 터럭끝만치도 가치가 없다. 나는 이를 단연코 부정한다.
이제 우리 모두 환속을 하자. 한사람의 민중으로 돌아가자. 하나도 남지 말고 몽땅 다 속인이 되자. 민중이 되자.
그대가 불교집단의 성직자·수행자이든, 기독교집단의 성직자·수행자이든, 그 어떤 종교 종파의 그것이든지간에, 그대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양심적인 일은, 그대들 종교 집단의 해체와 조직의 해산에 있다. 반(反)종교에 있다.
도대체 성직자가 무엇이며 선자가 무엇이란 말인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이에 다시 없다.
우리의 양심, 우리의 순수는 오직 민중적 삶에 있다.
그러므로 일체의 종교적 집단이 해산되면, 일체의 종교라는 허울의 착취구조가 해체되면, 그러면 그때 가서야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바대로, 진실로 민중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이 열린다. 요컨대, 참된 삶의 길은, 진실로 민중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은 그 어떤 종교적 집단의 의식이나, 신앙이나, 수행이나, 운동에 있지 않다.
한마디로 삶의 진실은 종교적인 데 있지 않다.
삶은 종교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아아, 한 생각도 붙들린 바 없는
열림
자유
해방의 날이여!
나는 속인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