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대의 지역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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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백낙청
1987년 12월 70호
실로 열여섯 해 만에 보는 대통령 선거전이 달아오르면서 ‘양국적 지역감정’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게 된다. 또 그런 말이 나옴직한 현상도 거듭만나게 된다. 이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느낌을 적음으로써 글빚을 갚을까 생각하던 참인데 이번에는 어느 야당 후보가 다른 야당후보의 출신 지역에 갔다가 연설조차 못하고 말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역감정을 개탄하는 소리는 바야흐로 더욱 높아질 게 분명하다.
드러나는 현상들 자체가 개탄스럽기도 하거니와 개탄의 음성 가운데는 반드시 싫지만도 않은 가락이 끼여들어 더욱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망국적 지역감정’을 한참 규탄하는 어떤 이의 얼굴에는 그러니까 애초에 직선제 개헌이 나쁘다고 했던 게 아니냐는 회심의 미소가 역력한가 하면, 충돌의 현장을 열심히 보도하는 외국언론과 내국언론 모두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근심 못지 않게 한 걱정 덜었다는 안심을 풍기는 것 같다.
이 ‘망국적’ 병폐를 시정할 방안으로 제출되는 것도 갖가지다. 각종 서류에서 본적란을 아예 없애자거니, 사람을 대할 때 출신지를 묻지 말자거니, 국민학교에서부터 지방색 타파를 가르쳐야 한다느니, 영남사람과 호남사람 간의 결혼이 많아져야 한다느니, 그야말로 묘안백출이다. 게다가 지역감정 극복을 위한 합동 궐기대회도 물론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방안들이 대개는 실효성이 의심스럽고 그 중에는 건성으로 개탄하며 넘어가는 행위에 불과한 것도 많다. 예컨대 이력서에 본적을 안 쓴다고 해서(또는 호적등본 뗄 때마다 시골가기가 귀찮아서 본적을 서울로 이미 옮겨 놓았다고 해서) 해당자의 출신 지역을 알 길이 없을 것인가? 사람을 만나고 사귀면서 고향과 지난날에 대해 서로 묻고 아는 일조차 금기가 되어야 옳단 말인가? 영 ·호남인의 결혼이란 이야기도, 당자끼리 좋아서 짝을 짓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지만, 두 지역의 화합이 상호결혼에 의존해야 할 정도라면 부지하세월이다. 아마 미국의 흑백인종 문제가 완전한 혼혈로써 해결되고 모든 국제 분쟁이 국제 결혼으로 해소되기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장기적인 교육이라는 것도, 이 판에 너무 장기적인 이야기만 한다는 것 자체가 당장의 묘방에만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짓이기도 하려니와, 무작정 지역 감정극복을 어릴 때부터 주입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역감정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가 나쁜지-또는 좋은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바탕을 둔 교육이라야 실효도 있고 인간교육·민족교육의 이름에 값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역감정에 대해 무엇보다 먼저 분명히 해둘 점은, 자기 고장에 대한 다소 맹목적인 사랑을 포함한 긍지와 애착은 인간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감정의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소나마 맹목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사대육신을 지난 중생의 사령에서 맹목성을 아주 빼버리면 사랑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흔히 제시되는 처방대로 ‘건전한 애향심’과 ‘맹목적 지역감정’을 구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지역감정 자체를 원칙적으로 긍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가령 국민학교에서도 애국교육은 반드시 구체적인 애향심의 교육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관념적 민족주의 내지 국수주의의 폐단을 피할 수 있으리라본다. 어린이에게 처음부터 지방색 타파 따위나 설교하는 것은 어리둥절한 관념론자들을 양산하기 십상이다.
민족주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지역감정과 민족감정이 상반되는 듯하면서도 비슷한 점 또한 많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라 밖 세상에서는 민족주의 ·민족감정이야말로 인류평화를 해치는 암적 요소라는 개탄의 소리가 드높고, 실제로 수많은 전쟁과 분규에서 민족감정이라는 일종의 대단위 지역감정이 한몫을 톡톡히하고 있음을 본다. 동시에 바로 그런 개탄의 소리가 남의 민족을 억압하여 민족감정을 건드려 놓은 사람들쪽에서 가장 드높다는 사실에서 많은 암시를 얻는다. 민족감정이 설령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물건이라 치더라도 가진 민족과 못 가진 민족의 지역감정을 똑같이 탓할 수 없으려니와, 민족감정을 소리높여 매도하는 그 사람들이 과연 인류의 먼 장래를 위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말해줄 자격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민족주의 ·민족감정이 그렇듯이 지역감정도 모든 지역의 것이 똑같이 나쁘거나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자기 고장, 자기 이웃붙이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은 일단 누구에게 있어서나 평등하게 귀하고 평등하게 버려야 할 미혹(迷惑)이지만, 그것이 자기가 몸소 접하지 않은 좀더 넓은 지역에 대한 애착으로 발전하는 경우에는 각 지역의 과거 및 현재의 역사적 성격에따라 그 감정의 진가도 달라지는 것이다. 즉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지방의 지역감정을 그렇지 않은 경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까놓고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전라도의 지역감정은 타도의 그것과 달리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본다고 무조건 긍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전라도민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우리 역사의 해묵은 치부의 하나임을 직시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박정희 집권 이후 ‘경상도정권에 의한 호남 푸대접’이 호남인의 지역감정을 크게 자극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제 5공화국에 와서도 그대로 연장됨으로써, 특히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한 책임이 물어지지 않음으로써, 오늘날 사태는 걷잡기 힘들 정도로 심각해져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군사독재에 대한 비난으로 끝내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멀리는 백제나 후백제의 멸망 이후로, 가까이는 조선왕조에서의 호남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종속국의 민족 감정이 단순히 자기 방어에 필요할 뿐더러 인간 해방에 좀더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근거는, 그것이 소박한 피해 의식·저항 의식에서 출발하더라도 단순한 민족감정·민족주의의 차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이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민족해방의 과업을 성취시키려는 실천운동일 경우 그러한 차원적 비약을 성취 안하고는 못 견딘다는 것이 현대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지역감정도 마찬가지다. 부당하게 대접받은 지역민의 저항 의식이 반독재 정신, 나아가서는 좀더 적극적인 민족의식·민중 의식으로 발전하는 현상은 70년대의 유신독재와 80년대의 군부독재에 대한 싸움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지난 6월의 범국민적 항쟁이 있기까지 호남인의 지역감정이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동력을 제공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6·29 이후의 새 국면에서도 우리는 지역감정을 무조건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싸움에서 얼마만큼이 소박한 저항감이었고 얼마만큼이 성숙한 정치의식이었는지, 어디까지가 단순한 지역감정 또는 민족감정이었고 어디까지가 각성된 민중의식이었는지, 각자가 찬찬히 따져보면서 새로운 비약의 계기를 구해야 한다. 이때에 국면이 선거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나름의 특별한 기회와 특별한 위험을 가져온다. 전에 없던 활발한 토론의 공간이 허용된다는 점과, 너무나 오래 무시되어 왔고 선거 뒤에 다시 무시될 가능성이 많은 대중들에게 상당한 권력이 주어진다는 점이 선거국면 나름의 기회이다.
다른 한편 민중세력에게 선거국면이 치명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음은 수많은 사회운동의 역사가 증명해 준다. 지속적인 생존투쟁이나 변혁활동보다 몇년마다 한번씩 치르는 단기전(戰)에 너무 많은 것을 걺으로써 원칙의 희생과 조직의 훼손을 가져오기 일쑤이고, 더구나 대통령 선거의 경우 특정 1인의 당락이 싸움의 촛점이 될 수밖에 없는 만큼 민중의식의 후퇴가 일어날 위험은 더욱 커진다. 물론 이 경우에도 특정인에의 집착이 지역감정을 자극하되 그것이 좀더 차원높은 민족통일·민중해방의 이념으로 승화하느냐 못하느냐는 것은, 수많은 객관적 여건에 달렸고 해당 후보자의 인품과 역량에도 크게 좌우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선거국면에서 뜻있는 사람일수록 지역감정에 대한 염려가 깊어지고 기성체제에 안주하는 논자일수록 ‘망국적’ 운운하면서 또 득의의 웃음을 참기 힘들어 하는 까닭은, 지역감정의 민중적 잠재력보다 그 소시민성이 크게 우세해져서 지역을 달리하는 동지적 경쟁자에 대한 적개심이 원칙을 달리하는 후보에 대한 반발을 오히려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이 사회의 지역감정이 어디까지나 분단시대의 지역감정이라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흔히, ‘남북으로 갈라진 것만도 서러운데 동서로까지 나뉘어서 싸워야 하다니”라는 탄식을 듣다. 생각할수록 정말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바로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이기 때문에 동서의 분열도 이처럼 심각해지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분단이 오래갈수록 앞으로 경상도·전라도는 다시 남북으로 갈라지고 나머지 지역들은 그들대로, 또 지역말고도 종교·혈연·직종 등 온갖 이유로 집안 싸움이 격화될 것이다. 무릇 어느 때 어느 곳의 지배자든지 분할통치의 수법을 애용하는 터이지만, 분단체제의 지배세력은 그것이 통일된 민족국가의 정당성을 본원적으로 결하고 있기 때문에 분단사회를 다시 이리저리 갈라놓지 않고는 권력유지가 힘들다. 박정권이래 영·호남의 분화는 여러 가지 상승작용도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70년대와 80년대의 정권이 국민을 고루 잘 살게 해줄 수도 없고 통일에의 길을 열어줄 처지도 못 되는 정권으로서 한국의 민중계층을 우선 전라도와 경상도로라도 갈라 놓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자본주의사회로서의 한국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대체로 자본주의가 새롭게 발흥할 무렵에는 전국적인 경제권이 형성되면서 지역감정도 새로운 국민의식 ·민족의식과 무리없이 양립하게 된다. 반대로 융성기를 넘긴 자본주의는 비록 양적 성장을 거듭할지라도 지역감정을 포함한 건전한 국민정서를 왜곡하지 않고는 유지되지 못한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과연 어느 단계의 것인지는 여기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상적인 통일국가의 지역감정 ·국민의식은 불가능해진 상태이다. 건전한 지역감정을 되찾기 위해서도 우리는 민족통일·민중해방의 큰길을 흔들림없이 걸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