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출가일을 맞으며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시론 - 지현 1990년 03월 97호
겨울 내내 찬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안으로 안으로 향기를 모아 왔던 매화가지 끝에 작고 예쁜 꽃들이 피어나 진한 향기를 뿜는다. 진하고 맑은 향기를 뿜을 수 있는 힘은 겨울의 그 매서운 추위를 견디면서 언젠가 올 봄을 기다리며 향기를 모았기 때문일 것이다.
매화가 피면서 봄은 시작된다. 작년에는 2월 말쯤 피던 매화가 금년에는 2월 10일에 꽃을 피웠다. 봄이 그만큼 빨리 온다는 소식이다. 새 봄에는 우리들 주변에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하고 발원해 본다.
시절인연이 성숙하면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며칠 있으면 부처님 출가일을 맞게 된다. 부처님은 사문유관을 통하여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분명히 보셨고 결연한 의지로 유성출가의 길을 걸으셨다. 출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방법도 고뇌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었기에 궁실(宮室)의 부귀와 왕자의 권위를 다 버리고 출가의 길을 찾아나섰던 것이다.
그 길은 우리들의 상상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다. 6년 동안 뼈를 깍아내는 극한의 고행이었다. 이 세상 누구도 감당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주림과 아픔과 어려움을 참아내며 오직 바른 진리, 밝은 법을 깨닫기 위하여 고통을 극복해 나갔던 것이다.
가장 힘든 고통을 극복하셨기에 부처님의 깨달음은 가장 높고 깊고 미묘하여 그 어떤 수행자들의 깨달음보다 수승하여 견줄 수 없으며 그러한 깨달음을 설파하셨기에 당시 바라문교도들의 잘못된 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바른 법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물론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에도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세계 각국으로 전하여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이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고 고뇌를 해결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 되어 이 가르침에 의해 안락과 평안을 얻었고 진리의 세계에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래세가 다하도록 인류의 등불이 되어 고통에서 헤매이는 중생들을 안락의 세계로 안내하는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뿐일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고행의 과정을 통하여 진리를 체험한 것은 아니다.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모두 젊은 한 때 뼈를 깎는 고행을 통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경험하였으며 그 깨달음을 이웃으로 이웃으로 전하였던 것이다. 오직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원력이 고행을 이기게 했고 갖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법하는 힘이 되었을 뿐이다.
출가란 처음에는 뼈에 사무치는 고행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아집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진리를 찾는 일이고 다음에는 진리를 실천하면서 고뇌하는 이웃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를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서산스님의 선가귀감 중에 나오는 말이다. 정말 금쪽 같은 말씀이다. 이러한 옛어른들의 거울에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일상을 자주 비춰보고 부족한 면들을 부끄러워하고 고쳐 나기야 한다. 이것이 출가자들의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요즘 우리들 승가에도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시내에 포교당이 점점 늘어가고 불교 유치원이 생겨나고 법회가 거의 매일같이 열린다. 수많은 사림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고통을 해결하고 생활에 활기를 찾고 희망을 가지게 되며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지난 연초 통도사에서 실시한 불교 어린이 지도자 연수교육 때에는 지원자가 너무 많아 잠자는 일, 밥먹는 일들이 무척이나 어려웠는데도 이틀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면서도 한 마디라도 진리를 들으려는 원력으로 진지하게 교육에 임했던 젊은이들을 보았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환희스러운 장면이었던가?
이러한 추세는 출판계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불교관계 서적들이 연간 수백권씩 출판되어 의식있는 독자들에게 인기있게 읽히고 있으며 언론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잡지 신문들도 많이 발행되고 많은 절에서 사보도 발행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진리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 작년에는 우리 불자들의 숙원사업이었던 불교방송국이 당국의 허가를 얻어 착실하게 개국 준비를 하고 있고 대구 부산 광주 등에도 지방분국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니 백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의 진리를 방안에서 듣고 볼 수 있는 날이 우리들의 세대에 펼쳐
진 것이다. 수희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려 교육의 숙원이었던 승가대학도 당국의 설립허가를 받아 금년부터 신입생을 받는다 하니 이 봄에 우리 불교계는 새로운 의미를 느낀다. 천육백년 불교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이렇게 불자들이 각 분야에서 제각기 힘을 따라서 열심히 배우고 정진하며 법을 전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영산회상이 재현한 듯 하고 미륵불의 용화세계가 다가온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기회에 우리 모두가 수희 찬탄하며 불국토 건설을 위하여 더 한층 분발하여야겠
다.

한편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외면과는 달리 내면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고불고조(古佛古祖)의 뜻과 중생들의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구도(求道)와 구세(求世)의 원력(願力)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 불교계의 현실이다.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야 한다는 막연하고 경박한 생각에 들뜬 채 진정 귀하게 여겨야 할 수행자로서의 삶의 가치관이 전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불교의 현대화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직 구체적인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 시점에서 문제의 핵심을 망각하고 책임의식이 결여된 주의주장을 난립하여 불교의 교리 체계는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다.
불교의 대중화란 미명 아래 전통적 신앙과 수행 분위기도 철저히 부서져 버린 것이 오늘 날 한국불교의 내면은 아닐까?
현재보다 훨씬 더 암울했던 시대를 지혜롭게 살다 가신 고인들의 숭고한 정법(正法)의 실천력은 책장 속에서 얻어낸 지식의 축적에서가 아니라 불교의 바른 이론체계에 입각한 철저한 신앙과 뼈에 사무치는 수행의 실천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지식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굳이 세속을 등지고 삭발염의의 길을 갈 필요가 없다. 출가 수행의 길은 시험의 굴레에 끌려다니는 식의 교육이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로 신행의 청정함 속에서 창조적인 삶의 길을 개척해 가는 활발한 행원과 전인적인 인격자로 다듬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 승단이라는 공동체는 순수한 양심의 집단이다. 그 승단을 청정하게 지켜가고 아름답게 가꾸어 갈 때 이 세상 최후의 양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승가가 언제부터인가 안일과 무기력과 무책임의 병으로 괴로워하고 허탈해하고 있다. 이 허탈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기만의 아집과 독선적인 권위의식을 삭발염의한 자비의 모습 속에 감추고 있지는 않는가?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해부하여 병들어 썩어가는 부분은 수술해 내야 한다. 고름이 살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출가란 스스로 찾아나선 길인 만큼 우리는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부단히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지극히 냉소적이고 독선적인 승가가의 현상을 끝없이 서원과 관용정신으로 무기력한 교단을 신념에 찬 신앙과 수행의 장으로 불어넣는 일에 앞장서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승단의 미래를 젊어져야하는 결정적 역할의 담당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확신하고 부디 누군가가 해 주기를 바리는 안일함에 빠지거나 아니면 불평이나 하는 못난이가 되지는 말아야겠다.
일상의 신앙과 수행생활을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어려운 일마다 앞장서서 책임지는 자가 되어 살아갈 때 보다 참되게 진리에 가까와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 완성을 실현하려는 신앙과 구도의 수행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자 절대적 의미를 갖는 참된 길임을 받고 자부심을 가지고 불국토를 이 시대 이 자리에 건설하는 주역이 되어야한다.
바람결에 스치는 매화의 향기가 더욱 진하고 새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