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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개정안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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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자의 소리 - 이연성 1987년 11월 69호
요즘 길을 다니다 보면 골목골목마다 벽 공간의 빈틈을 비집고 허옇게 붙어 있는 헌법개정안이 눈에 뜨인다. 또한 전보대나 가로등에서는 ‘헌법개정’, ‘민주헌법’, ‘국민화합’의 글이 적힌 현수막이 요즘의 세상만큼이나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 정말이지 민주사회가 이루어지기라도 했는가? 진정한 민주헌법이 만들어졌는가?
’87년 6월은 민중의 위대함을 보여준 계절이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이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등지에서 울려퍼졌으며, 그것은 이 땅의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직접 눈으로 보고자 하는 염원의 함성이었다. 그러자 절대 호헌을 외치던 자들은, 6월 29일, 마침내 개헌의 백기를 내걸었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민주화를 위한 끈질긴 싸움의 성과였다.
그러나 6.29선언으로 일단 국민의 외침을 무마한 그들은 민주화8개 항목을 말로만 떠들고 하나도 실천하지 않았으니, 결국 6.29선언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기만한, 그들의 야누스 같은 양면성의 한 얼굴일 뿐이었다. 민주주의를 보장해야 할 헌법은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양당의 8인이 모여 앉아 국민의 권리 보장은 허위법으로 남겨놓은 채, 쑥덕공론의 흥정으로 슬그머니 타협을 보고 말았다.
해방 후 독재자의 내규(內規)로 전락해온 우리의 헌정사는 이 승만 정권의 ‘발훼개헌’, ‘사사오입개헌’, 제4공화국의 악명높은 ‘유신헌법’, 그리고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한 80년 봄의 제5공화국의 헌법 개정 등 치욕의 길을 걸어왔다. 결국 1947년 이래의 숱한 개정 헌법의 과정은 권력이 국민을 탄압하고 지배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무법성(無法性)으로 귀결된다.
’80년에만 보아도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을 짓밟고 비상입법회의에서 제 5공화국헌법을 만들었다. 물리력을 동원하여 국민에게 침묵과 방편을 강요하여 만든 그 헌법이 이제 또 바뀌려고 한다. 헌법의 자귀나 몇 군데 고친다고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이제 없다. ‘고문 금지 규정’이 없어서 박 종철 군을 비롯한 허다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고통받은 것은 아니다. 또 ‘군(軍)의 정치적 중립’ 규정이 없어서 이 나라의 정권이 군부의 총칼에 탈취 당한 것도 아니다. 결코 법이 없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법은 있되 법의 진정한 효력, 즉 정통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헌법개정안은 어떠한가? ‘합의개헌만이 살길이라’며 일부 정당의 8인이 모여 만들어낸 이 개헌안은 민주 헌법이랄 수 있는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무색하게 일부정당의 타협으로 이루어졌기에 이번 헌법개정은 그 출발부터 비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결과도 뻔한 것이다. 헌법 전문에 ‘국민저항권’을 명시한 것 외에는 허울의 말바꿈에 지나지 않는다. 제21조 1항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말하나 4항에서 모호한 유보 조항을 달아놓았으며, 노동 3권보장 등 이 땅의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조항은 하위법의 차원에 맡겨놓고 있다.
해방 뒤 반세기 동안에 아홉번째로 맞는 이 개정헌법은, 역사상 유래 없는 여야간 합의 개헌이라지만, 주권자인 국민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킨 채 소수 정치인의 손에서 이루어진, 역사상 유래 없는 국민 기만의 개헌인 것이다. 그뿐인가. 개헌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구속되었고 민주 운동은 화경, 용공으로 매도되어 탄압되었다. 언론 자유를 말하면서 잡지의 인쇄를 중단시켰는가 하면, 구속자 석방을 떠들면서 여전히 많은 양심수들을 차가운 감방에 묶어두고 있다.
이렇게 헌법개정안이 확정 공고되고, 이제 우리 앞에는 대통령선거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과제가 남아 있다. 헌법의 내용보다도 그 법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해나갈 국가 권력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의 국민들이 참된 생존권과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정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외세로부터의 자주, 민생을 보장하는 자립경제, 평화적인 민족통일 따위를 추진할 수 있는 정책 대안을 갖춘 정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번 12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해방 이후 43년만에 처음으로 자주적이고도 민주적인 민간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그동안 억압과 굴종의 암울한 역사를 보아온 한국 국민 앞에 던져진 역사적 과제이며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