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악을 버리고 선이 자리잡게 되면 선과 악 모두를 버려야 한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는 이미 많이 들어왔으니 오늘은 중도-선과 악 모두에서 벗어난 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처님의 모든 법과 가르침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올바른 이해를 하도록 가르쳤으며 그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다.
과거 많은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처음으로 역설하신 것은 두 극단, 곧, 쾌락에 빠지는 것과 고행을 택하는 무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림들은 이 두 가지 극단에 빠지기 쉬운데 감각의 즐거움이란 항상 변하는 것이므로 어느 것으로도 평안에 도달할 수 없다. 양 극단 모두 윤회의 바퀴를 따라 돌 뿐이다.
깨달은 이는 모든 존재가 이 두 극단에 집착하여 법의 중도를 알지 못함을 살펴보고 그들이 실상을 바로 보도록 이끈다. 우리가 아직 무엇엔가 집착하고 아직 무엇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거듭 두 극단 속에서 동요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일찌기 이 두 길은 유혹의 길일 뿐 수행자의 길도 평화에 이르는 길도 아님을 말씀하셨다. 향락을 추구하거나 고행을 행하는 두 길을 간단히 느슨함과 긴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길을 가는 데에서 겪는 어려움과 곤란함은 쾌락에 빠지는 것인데, 이 쾌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행복에서도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과 불행의 두 길은 모두 평안한 상태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 모두에서 떠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올바른 수행이며 이를 중도라고 한다.
‘중도’ 라는 말은 몸이나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뜻한다. 좋아하지 않는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이것이 마음에 영향을 끼쳐 혼돈이 오게 된다. 마음이 복잡하게 혼란된 상태는 올바르다 할 수 없다. 거꾸로 좋은 생각이 생기면 마음은 함빡 즐거움에 빠져버린다. 이것 또한 중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고통이 아닌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이란 고통을 보기좋게 다듬은 것에 불과하다.
보기를 들어 뱀의 머리를 불행으로, 그 꼬리를 행복으로 비교해 보자. 뱀의 머리는 극히 위험해서 건드리면 곧바로 물어 버린다. 그러나 머리를 건드리지 않고 꼬리를 밟아도 뱀은 폼을 돌려 마찬가지로 물어버릴 것이다. 머리와 꼬리가 모두 뱀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은 한 모체로 모두 욕망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행복할 때도 마음은 실로 편안하지 못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원하는 것, 곧 부(富), 명성, 칭송, 행복 따위를 얻었다하자. 즐겁기는 해도 언제 그 즐거움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여전히 편치 못하다. 바로 그 불안이 평안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얼마 뒤에 아마도 우리는 그 즐거움을 정말로 앓게 되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대가 행복하다 해도 매사에 깨어 있지 않으면 절박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마치 뱀의 꼬리를 잡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대로 뱀을 놓아 주지 않는다면 뱀에게 물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뱀의 머리든 꼬리든, 다시 말해 좋은 상황이든 아니든 그것들은 모무 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는 생존양식일 뿐이다.
부처님은 평온에 이르는 길, 곧 해탈을 얻는 방법으로 계·정·혜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을 불교의 진수라 할 수는 없다. 계·정·혜는 단지 방법일 뿐이고 부처님도 이를 ‘길’을 의미하는 ‘마가Magga’ 라고 불렀다. 불교의 진수는 평화이며 모든 사물의 성품을 온전히 앎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평안이란 행복도 불행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행복도 불행도 참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 것을 간곡히 당부하신 마음-은 마음의 작용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마음 곧 법성은 어느 것으로도 측정할 수 없으며 무엇으로도 알 수 없다. 법성은 본래로 움직이지 않으며 동요함이 없다. 행복을 느낄 때 생각이 흐트러져 동요가 일게 되고 마음이 이렇게 동요되면 행복에 대한 집착과 애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미 역설하신 중도의 수행을 우리는 아직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다고 하더라도 말뿐일 따름이다. 마음과 말이 아직 일치되지 못한 채 우리는 단지 공허한 말에 빠져 있을 뿐이다. 불교의 근본은 논의하거나 추측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불교의 진정한 근거는 현실의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이다. 실상을 바로 안다면 따로 가르침은 필요 없게 된다. 실상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정말 듣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깨달은 이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 분이 그대를 대신하여 수행해 주지는 않는다. 법이란 말로 표현되거나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가르침은 비유일 뿐이며 법을 볼 수 있게 도울 따름이다. 법을 보지 못한다면 고통스러울 뿐이다.
어느 날 아침 직장에 가는 길에 한 사나이가 거리 저편에서 그대에게 욕설과 험담을 퍼붓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험담을 듣는 순간 마음은 평상시와 달라져서 좋은 감정보다는 화가 나거나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 사내가 밤낮으로 그대를 비방하고 다닌다면 그대는 비방을 듣고 화가 날 것이고 원망하는 마음과 복수심으로 성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며칠 뒤에 한 동네 사람이 그 사나이는 몇년 전부터 미쳐서 누구에게나 욕을 하면서 다닌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대는 갑자기 긴장을 풀게 된다. 날마다 그대를 괴롭히던 노여움과 고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이 미쳤다는 것을 모르고 그대는 그를 정상인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화를 내고 고통을 당한 것이다. 사실을 잘못 이해했음을 알고 진상을 알았을 때 그대는 외적인 집착에서 떠나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몹시 화가 나 있었지만 그가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대의 감정은 점점 평온해진다.
진리를 본 이들도 위의 이야기와 유사한 경험을 겪는다. 집착과 혐오와 미혹은 마치 미친 사나이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인식할 때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버린다. “내겐 이렇게 탐욕과 혐오심이 많은데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법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나이가 처음부터 미친 사내였다는 것을 알 때 근심 걱정이 없어졌듯이 우리의 본래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릇된 이해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무도 그대가 이런 이해를 하도록 도울 수는 없다. 마음 그 자체를 바로 볼 때만 이 번뇌를 근절하고 집착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법을 이해하려 하면, 고(苦)와, 유전의 원인이 되는 여러 요소를 알아야 한다. 무엇인가에 대한 소유욕은 집착을 일으키고 집착으로 인해 유(有)가 있게 된다. 유로 인해 태어나게 되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거듭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설이라 한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무명(無明)이며 이 무명이 의식 따위를 일으킨다. 이 모든 요소들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그 근본에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무명은 의지적인 행동을 일으키고 이 행동은 의식을 일으키며 의식은 명색(名色)을, 명색은 육근(六根)을, 육근은 접촉(觸)을, 觸은 감각(受)을, 受는 갈애(愛)를, 愛는 집착(取)을, 取는 생성(有)을, 有는 출생(生)을, 生은 늙고 병들고 죽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고란 아무 원인 없는 우연의 것이 아니라, 연기법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것이다. 연기법에 의하면 “이것이 있으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 부처님은 어떤 불변의 자아가 있어서 영속적으로 연기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조건적으로 일어나는 제법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법을 수행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은 승려든지 행자듣지 세속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얼마나 세상을 바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출가해서 수계를 받았건 아니건 모든 사람에게는 법을 수행하고 명상할 기회가 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도 마찬가지로 누구나 동일한 평안을 얻는 것이며, 동일한 길, 동일한 방법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보통 사람과 승려를 구분하지 않고 모둔 이에게 연기법을 바로 볼 것을 가르치셨다. 연기법을 바로 본 자에게는 평안이 있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다.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은 똑 같으며 이익과 손실은 하나다. 이것이 바로 평정, 곧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에서 벗어난 평정이다.
삶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태어나는 고통이 없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내게는 더 이상 태어남이 없으니 이 성스런 삶을 끝내면 이것이 내 마지막 출생이리.” 부처님은 무생(無生)과 무사(無死)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역설하셨다. 이것이 올바른 수행이다. 이 수행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곧 중도에 이르지 못한다면, 끊임없는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