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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인간을 구원하는 방편의 하나인데, 그곳으로부터 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신이 나온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를 지나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뒤, ‘더러운 정치’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곳은 역시 종교밖에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해 왔다.
돌이켜보면, 일제하에 용기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모두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내에 남은 사람들이란 대개 전래의 지주(地主)이거나 아니면 무지랭이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 그나마 민중을 이끄는 사람들은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다. 3·1민족항쟁의 주체세력은 민중이지만 그들에게 불을 붙인 전위대는 역시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 신념이 뒷받침되어서도 그랬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을 믿었다는 데 있다. 최소한 겨레붙이에 대한 믿음, 연대성에는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확실한 통계를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3·1민족항쟁 후에 우리 사회는 종교인구의 증가를 가져왔을 것이 분명하다. 마치 70년대 이후 특정 종교단체의 민주화투쟁이 역으로 종교 신자의 확충을 가져온 것처럼, 사실 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외래 종교는 차지하더라도 민족의 고유한 종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것이 이를 반증해 주는 좋은 자료라고 하겠다.
정치적 아노미현상을 가져온 종교에의 인간귀의는 그런 점에서 예나 이제나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종교란 무엇인가. 정치로부터 인간이 불신을 배웠다면, 종교로부터는 그것을 치유해야 할 것 아닌가.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이 파멸 직전에 있는 오늘, 과연 종교는 그 병의 치유지로서 제 구실을 다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의 종교현상을 살펴봐야 한다.
웬만한 도시에는 밤마다 북은 십자가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빌딩가에는 월급쟁이를 위해 ‘먹자빌딩’이 있듯이, 어떤 지역에는 한 건물내에 십여개의 종파가 다른 종교단체들이 모여 있다.
불교의 경우에도 도심 포교를 위해 지방 본사의 말사, 혹은 포교당이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전국 주요 명산에는 소그룹 단위의 새 종파가 자고나면 생겨났다. 1인 교주의 종교가 있는가 하면, 10여명도 채 안 되는 신자를 두고 ‘거대왕국’꿈꾸는 종교인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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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뭐길래, 사회에서 잃어버린 믿음을 찾으라고 이처럼 많은 종교들이 흥청거리고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과연 사람과 절대자[神]와의 관계를 성립될 수 있을까.
어떤 힘이 한 연약한 인간의 염원을 들어주었다고 하자. 그 염원이 선한 것이든 욕심에서 나온 것이든 절대자가 들어주었다고 하자. 정말 그렇게 되었을 때, 이 사회에는 더 이상의 가난도 더 이상의 낙방자도, 죄인도 없어야 하지 않을까. 혹자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려면 이 세상에 무신론자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종교란 결코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숱하게 널려 있는 종교단체는 그야말로 이익단체 중의 하나일 뿐, 진정한 의미의 종교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그것은 특정 종교를 일으킨 교조(敎祖)의 가르침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어떤 성인(聖人)이 헌금을, 보시를 강요했는가. 어떤 절대자가 그를 위한 호화로운 건물〔교회당이나 사찰〕을 요구했는가.
인간의 타고난 운명인 생과 노와 병과 사의 극복을 가르친 석가모니도, 십자가 위에서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친 예수도 오늘날과 같은 교회당이나 사원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사(佛事}를 위해, 교회당 건축을 위해 그 많은 재물을 쏟고 있음은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간의 이같은 경쟁은 결국 신자들사이의 갈등과 불신을 가져오는 결과마저 낳고 있다. 같은 신자는 물론 타종교인에 대한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주의’를 불어넣고 있다.
사람 하나하나의 얼굴이 다르듯 종교마다 특성이 있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특정 종교만이 제일이라는 우월주의는 누가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른바 성직자들이다.
종교도 역사와 더불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직과 제도가 필요했다. 오늘날 성직자들이란 바로 그 조직과 제도가 낳은 아들들이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또 사회 속에 살고 있는지라 종교 본래의 가르침보다는 세속적 관리 능력을 더 중요시하고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적자생존의 논리를 배워야 했고 테크닉을 익혀야했다. 어쩌면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교조의 가르침을 전해올 수 있었지 않은가고 되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면을 전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번 근원적인 질문에로 돌아가야 할 때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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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로 서구의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라고 할 수 있는 퀘이커교도에 대해 얘기해보자. 그들은 엄격히 말해 어떤 조직도 성직자도 두고 있지 않다. 누구에게 퀘이커가 되라고 강요하는 법도 없다. 그런데 삼백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오늘날까지 견뎌 오고 있다. 비록 전세계적으로 그 수효는 미미하지만, 그들이 인류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한 발자취는 그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크다. 감옥을 개선한 것이나 전쟁 중에 적국의 인명보호를 위해 구호물자와의약품을 앞장서서 보내는 것이나 오늘날 핵 위기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일들 등등.
비록 그리스도교적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들은 절대자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얻으려는, 그 기쁨에 전율해 ‘떠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불교도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교인일 수도 있다. 제도화된, 조직화된 종교단체로서의 종교인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린 참종교인이라 하겠다.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절대자와의 속깊은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한가닥 줄기를 집어낼 수 있다.
불신사회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종교로 귀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존하는 종교단체가 먼저 일신 (一新)되어야 한다. 진리는 하나다. 참종교도 하나다. 외톨박이 종교인이 아닌 이상, 종교로 귀의하는 신자든 신도든 그들이 사는 세상을 우선 믿을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사회가 진흙탕이라고 해서 그 속에서 나오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진흙 속의 연꽃이 되라고, 갈릴리 뱃사공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일깨워야 한다. 그 길이 우리사회의 믿음을 회복하는 첩경이다.
해탈한 승가에게, 나머지 옷 한벌까지 가난한 자에게 준 예수의 제자에게 무슨 욕심이 남았겠는가. 그 흔한 ‘사회구원이냐, 개인구원이냐’ 하는 논쟁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외톨박이 신앙인’이 존재할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믿음〔信義〕로 가득 찰 때, 아마 거기에는 종교단체가 사라질 것이다. 참종교인에게는 종교란 무의미한 것이다. 해탈과 진리의 문을 넘어선 참세계에 무슨 놈의 ‘네 종교, 내 종교’가 있겠는가. 소똥에 굴러도 이 세상이 더 좋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의 한국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의 회심(回心)이 더없이 요구되고 있다.
해마다 3월이면 그 ‘기미년 3월’을 떠올린다. 나라 잃은 백성에게 누가 희망을 안겨 주었는가. 이 땅의 종교인들이, 종교 단체들이 오늘날 가진 돈을 우리 사회에 환원한다면 아마 몇개의 재벌은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재산 한번 3.1만세 선언하듯 ‘없는 자’들에게 나눠줄 수는 없을까 그렇게 다시 한번 ‘자기’를 버리는, 진정 가난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모임이 종교인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